구약성경

[스크랩] 역대기 역사의 이해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1. 23. 15:22

 역대기 역사의 이해

 


 

 



1) 일반적 이해


  역대기 사가(歷代記 史家)의 역사서란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역사서를 기록한 기자를 "역대기 사가"라고 부른다. 역대기 역사는 신명기 역사를 토대로 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재정리(개정)했다. 신명기 역사가와 역대기 역사가는 같은 시기(왕조역사)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 대조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였고 따라서 두 역사가의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이 비교되면서 연구되어 왔다.


  신명기 역사서가 여호야긴의 석방 사건을 끝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의 역사는 인류시초인 아담에서 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포로귀환 공동체 시대까지 기록하고 있다. 특히 포로귀환 이후 시대의 기록은 유대교 발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가 역대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소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이란 2세대에 걸친 오랜 세월이었고, 자연히 포로지에서 탄생한 2세나 3세들이 귀환 공동체의 대부분을 구성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이 매우 낯선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에서도 순수한 야훼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바벨론에서도 안식일과 회당제도를 통하여 순수한 야훼 신앙의 과거 전승을 되새겼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이스라엘 전승을 이어 받아서 그것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문서화해서 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의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야훼종교라는 커다란 줄기를 이어받은 부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소위 "땅의 백성들"이라 하여 그 곳에 남아 이방 종교와 타협하였다. 즉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난 후의 70년이란 공백 기간 동안 그 땅을 지배하던 이방인들의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진짜 유대인인가? 누가 진짜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인가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대기 역사가의 대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었다.


  첫째,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예배 계승이다- 스룹바벨의 제2성전은 규모, 규격, 예배순서가 솔로몬의 성전과 같다. 포로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야훼 예배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둘째, 순수한 혈통을 찾는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 되어 있다. 왜냐하면 본토에 남이 있던 사람들은 제사장까지도 그 땅을 지배하던 사람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개혁시 이방사람과 결혼했던 사람들은 제사장일지라도 파면시킨다. 즉 과거 전승의 연속과 순수한 혈통의 보존을 통해서 역대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특히 역대기 기자는 다윗 통치에 대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담에서 사울까지 족보 역사를 역대상 1-9장에, 다윗 왕조를 10-29장까지 20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어서 다윗의 역사를 역대기 전체 분량의 3/1이나 차지하게 하고 있다. 역대기 사가가 다윗을 강조한 이유는 그의 독특한 신학에서 비롯되었기에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가 그처럼 다윗을 강조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무엘서를 대본으로 다윗의 일기를 기록할 때 다윗  의 명예를 손상시킨다고 생각되는 곳은 모두 삭제한 것이다. 가령 사울의 죽음을 탄식하는 부분, 다윗과 사울왕가와의 분쟁, 다윗왕궁 내부의 암흑상, 그리고 밧세바의 사건이나 압살롬의 사건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윗과 그의 시대를 이상화했고, 다윗이 종교의식의 규정을 훌륭히 지켰고, 성전제도가 군주제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긴 추가문을 수록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역대기" 저자는 후세의 유대교 확립 이후, 성전 제사장의 한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며, 이상적인 시인이며, 이상적인 종교가로 추앙하게 되었고, 여기에 메시아사상의 메시아의 원형으로 다윗을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다윗이 메시아상으로까지 추앙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본적이 없다. 다윗시대 때는 통일국가였으며, 주변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독립국가 체제를 잃어버렸고 외국에게 지배당한 상태이며, 과거의 영광을 되돌아보던 시기이다. 그들에게는 언젠가 다윗과 같은 힘을 가진 메시아가 나타나, 외국을 섬멸하고, 신의 백성을 구출해 줄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윗을 이상화하고, 메시아의 모습으로 다윗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신앙도 생겼다.


2) 역대기 저자 문제


  역대기 사가는 누구인가? 탈무드에서는 역대기의 저자를 에스라로 규정하고 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에스라의 신분이 서기관으로 밝혀져 있다. 따라서 그가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후대에서는 에스라설을 부인하고 역대기 기자는 레위인으로서 제사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던 성전 직원 중의 한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사장보다는 레위인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역대기의 저자가 요약된다.


  (1) 한사람이 전체를 다 기록하였다.

  (2) 저자는 두 사람이거나 한 학파이다

  (3) 역대기 역사서들은 각각 그 저자가 다르다.


3) 시대적 배경


  역대기 사가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은 포로귀환 이후 시대이다. 즉 주전 515년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 이후에서부터 그리스 제국시기까지이다.


  유다를 점령하고 포로를 끌고 갔던 바벨론은 주전 6세기(599-500) 초엽까지만 하여도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벨론의 동편에 있는 메대와 페르샤 두 왕국을 하나로 병합하고 바벨론을 공격하여 드디어 주전 539년에 승리한다. 제국의 영역을 더 넓힌 고레스는 여러 민족의 고유한 관습과 종교를 신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유대민족은 포로귀환과 동시에 성전을 재건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왕성하던 페르샤 제국도 결국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페르샤 대왕 다리오는 새 수도를 페르오폴리스에 세우고(페르샤만 바로 위쪽, 인도와 가까운 지역) 인도 서부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513년 그리스 지역인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였지만 490년 마라톤에서 그리스 군에게 패배한다. 그 후 페르샤는 바다에서도 패배하였다(살라미스 해전). 그 후 페르샤와 그리스는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면서 다투었으나, 주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망한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아직 까지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유대민족은 강대국의 다툼과 이권 속에서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선 페  르샤 시대 때, 유대는 페르샤의 각 민족의 관습을 우대하는 식민지 정책에 힘입어 유다지역에 총독을 두고 자치 기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치기구를 인정받았던 사마리아가 유다지역을 계속적으로 예속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느헤미야 등은 유다지역을 독립적인 자치기구로 인정받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사상적인 면에서 유다지역은 페르샤의 쇠퇴와 반비례하여 헬라(그리이스)는 그 영향력이 비등(飛騰)해졌는데, 잘 발달한 헬라의 정치문화와 제우스신을 비롯한 다신론, 이원론, 철학 등의 유입으로 야훼 유일신 사상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화적으로 페르시야 문화가 끝나고 희랍문화가 봇물 터지듯 휩쓸려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야훼종교의 전승을 이어갈 수 있느냐는 역대기 사가가 당면한 과제였다. 이것은 외적인 어려움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것은 그토록 원하던 성전 재건이 이루어 졌는데도 여전히 페르샤의 속국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국에 대한 실망과 열등감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특히 제의 분야에서 더욱 고조되었다. 그 모든 이유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의 분야에서 타락이 초래되었고(말라기의 내용), 이것은 유다 전역에 걸쳐 종교와 신앙의 가치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민족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해 줄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대기 역사는 기록된 것이다. 역대기 사가는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다의 멸망이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됨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다윗왕 시절처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부흥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4) 자료


  역대기 사가는 대체로 현존하고 있는 자료들, 곧 신명기 역사서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자신의 중요 대본으로 삼고 자신의 역사서를 서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도움을 주는 자료들을 선택하고 발췌하였으며, 신명기 역사서에는 전혀 담기지 않은 특수자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문서, 전기, 실록, 제표 등의 문헌, 구전 및 예언집, 성전 및 관청의 서고 자료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여 진다. 역대기 사가가 사용한 자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용한 자료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 자료 (족보책, 역대지략)

  (2) 정경에서 온 자료

  (3) 느헤미야의 실록

  (4) 에스라의 보고문

  (5) 아람어로 된 자료

  (6) 명단록


5) 역대기 역사의 구조


  (1) 아담에서 포로귀환민까지의 계보와 명단 : 역대상 1장-9장

  (2) 다윗의 통치 : 역대상 10장-29장

  (3) 솔로몬의 통치 : 역대하 1장-9장

  (4) 분열 왕국의 역사(남유다 중심으로) : 역대하 10장-36장

  (5) 제1차 포로귀환과 성전재건 : 에스라 1장-6장

  (6) 에스라의 귀환과 개혁 : 에스라 7장-10장

  (7) 느헤미야의 1차 개혁(성벽 재건) : 느헤미야 1장-12장

  (8) 느헤미야의 2차 개혁 : 느헤미야 13장


6) 포로기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미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이스라엘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고, 낯선 이방 민족이 들어와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다수의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하하였고 이 과정에서 북왕국의 종교-신앙적 전통들이 남왕국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구심점이 남유다에 기울게 되었으며 모든 전통들이 유다로 집결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남유다 마저 바벨론에게 함락 당하자 이스라엘은 국가도, 주권도 없는 식민지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게다가 유다의 백성들은 세 차례에 걸쳐(렘 52:28-30)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비교적 지도층의 사람들이었다.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역하 24:14) 여전히 팔레스틴에 남아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지었다.


  앗수르나 바벨론은 팔레스틴을 정복하면서 지도층 인사와 유력한 사람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요새화된 성읍을 철저히 파괴하였고(애가 2:2,5)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포로민으로서 특별한 고초를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누리는 자유란 바벨론에 대한 복종의 대가로 얻어졌던 것이며, 대부분은 나라 잃은 설음과 분노로 살아갔다(시 137편).


  이 시기에 또 다른 특징은 바벨론 이외에도 다른 지역으로 유다 백성이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모여 하나가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분열왕국을 거치더니 급기야는 타민족의 침략과 지배로 인해 그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존립이 끝나고, 제도와 전통들은 아무 가치가 없게 되었다. 꾸준히 지켜오던 제의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로 볼 수 없는 완전히 끝장난 상태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기의 상황은 여러 번 반복되었으나, 포로기보다 더 큰 위기의 시대는 없었다. 이때는 어렵게 정착하여 민족의 삶과 문화를 지탱하여 온 그 땅이 없는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왕조시대는 야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한다는 신앙고백이 그들의 국력만큼이나 커지는 시대였다. 특히 다윗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그들은 인접 국가들에게까지 야훼신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다윗 왕조의 깃발이 내려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다른 나라들처럼 될 위험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겪은 더 큰 어려움은 그들이 속한 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이주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더 이상 자유민이 아니었고, 주권을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인데다 그들의 생활 주거까지 옮겨야 하는 처지였다.


  바벨론 포로기의 포로는 현대적 개념의 전쟁포로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포로들의 생활 모습은 성경구절을 통하여 볼 때 눈에 띄는 압제나 학대의 내용이 문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정체성과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곳으로부터 추방당한 상태에 있었다. 포로기 동안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삶의 모든 조건들과 형식들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였다. 그것은 특히 종교-문화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스라엘 고유의 문화는 바벨론의 이교적 문화 속에 흡수되거나 사장되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더구나 고대사회의 문화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으니 이스라엘을 지탱하여온 야훼사상은 바벨론의 종교문화에 휩쓸려 이스라엘은 이제 그 정체성마저 잃게 될 위험성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는 이스라엘 역사 속의 어느 시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4. P기자에 대하여


  사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는 수차례에 걸친 편집단계가 이루어졌다고 보여 지는데 최종적인 편집은 유대 왕국이 망한 후 바벨론 포로기 동안 사제(P기자)기자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P기자에게는 또는 편집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고유한 사제적 전승 자료들이 있었다. 특히 제의에 관한 제도나 규율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제들에 의해 발전되고 보존된 전승들이었다. P기자는 자신의 뚜렷한 신학적 견해와 의도를 가지고, 전승된 사제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거기에 고대 전승자료들을 첨가하여 신학적 저작을 형성하였다.


P기자의 시대 구분( B. W. Anderson의 견해)


  1)창조의 단계로서, 하나님의 안식으로 종결된다.

  2)노아의 단계로서, 대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땅의 모든 생물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 하늘의 무지개는 노아계약의 표징이 된다.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편무계약-일방적계약).*

  3)아브라함 족장의 단계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대대로의 후손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 할례는 이 계약의 표징이다. 자손번창과 땅 약속을 하는 편무계약이다*.

  4)시내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단계이다. 이때의 표징은 안식일이다. 이 시내산 계시는 일명 모세계약이라고 부른다(출19장-24장). 쌍방계약(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으로 “만약(if)~계약을 지키면......,” 으로 된 조건부 계약이다. 쌍무(쌍방)계약은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따라 지속된다. 이 계약은 국가가 형성된 후에도 북쪽 이스라엘에서 신학적 서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계약들은 편무계약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만한, 이미 의로운 자들이었으며(6:9,15:6), 언약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6:18-22, 17:1,9).


  왜 P기자는 이와 같은 계약사상을 고취시켰는가?


  P기자의 역사적 정황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 말에 바벨론 제국이 재기하더니 6세기 초에 그 힘이 남쪽 유다에 미치었고, 주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유다왕국은 종말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지도급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시련은 또한 신학적 위기였다. 이 비운의 역사 때에 남왕국 유다에서 다윗 계약 신학이 생성되었다. 다윗계약이란,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삼하 23:5)는 것인데, 그 중심내용은 1)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 왕조의 영속을 약속하셨고 2)시온의 성전을 그가 거하시는 성소로 택하셨다(시78, 89, 132)는 것이다.


  이런 다윗 계약은 유대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이 초토화돠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했다. 이것은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다윗계약에 의하면 여호와가 시온을 자기의 거처로 선택했다는 것과 다윗왕조가 영원히 통치하고 그 원수들에게서 승리하리라는 약속이 불변하다고 하였지만 역사적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호와긴이 포로로 끌려와 바벨론 궁정에 있었지만 허수아비 같은 유다의 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인가? 이 물음에 선지자(특히 예레미야, 에스겔4-5장)들은 모세 계약의 특징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에 내린 심판이라고 해석하였다.


  모세계약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전망도 암담하였는데, 이때 P기자가 아브라함의 계약을 재발견하였다. P기자의 신학을 정리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불복종으로 말미암은 역사적 심판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브라함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불복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서약에 의하여 영구히 존속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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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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