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스크랩] 장로교회사 강의노트(종합본)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0. 22. 08:31

장로교회사(박영실)

(6월 03일 수정본 ==> http://cafe.daum.net/gvcm 지구촌 선교회 제공)

 

3월부터 현재(6월 01일 종강 강의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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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답안을 작성 할 때 반드시 이 강의안을 참조하세요.

자세한 것은 본 사이트 신대원⇔과제 시험자료실-시험문제 목록 총정리를 볼 것.

 

아래 보이는 것은 4월 27일까지 강의노트입니다.

한글 2002 이상을 쓰시는 분들에게  --> 위 파일을 다운 받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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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적 고려들


가. 장로교회

 장로:

 노회( 장로회: Presbytery)- Presbyterian Church

 장로교회- 장로회 정치제도하에 유형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 형태를 말한다.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 catholicity

- 어거스틴은 무형교회, 유형교회의 구별- catholicity

cf. 유형교회를 강조. 지상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절대권. 외면적 조직에 강조.


루터- 만인 제사장설- 직분, 말씀과 성례( 객관적 규례)

개혁파- 성도의 교통 강조. 권징 강조.


박형룡-장로회 정치체제- 장로에 의한 대의적 정체- 권위와 자유의 양면적 성격


나. 개혁파 교회 - L. Berkhof

  -  대표적 기관에 의한 권세의 행사.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와 권위의 원천.

  말씀은 권위 행사의 방편.

  치리회 .



다. 교회의 속성

-1) 통일성.(unity)


  2) 거룩성(holiness)


  3) 보편성(catholicity)

 4) 사도성( apostolic)- 말씀에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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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의 경향과 관련하여서 그 방향을 잡아야 한다.

1) 장로교가 전체는 아니다 - 정체성의 문제를 낳는다.

2) 실용주의 경향-  탈역사적 방향



2. 1장. 역사 조망:  사도들에서 종교 개혁시대까지

처음부터 장로교회는 항상 전체교회의 한부분이었었다.

사도시대로부터 개신교 종교개혁까지도 계속되어져 왔다.

교단들은 이런 전통으로 그들 자신들을 동일시해왔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래서 이장 “사도행전으로부터 종교 개혁시대까지”은 장로교 역사의 서문이 되어야 한다.


가. “사도행전으로부터 콘스탄틴 대제까지”

예수는 그레코 로만(Greco-Roman) 세계에서 때가 찼을 때( fullness of time)" 출현하셨다.


필립과 알렉산더 대제.-  헬라 문화와 철학을 널리 전파.

  - 행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로마의 황제들은 그리스를 정복.

   법과 건축

- Highway system

  - Pantheon( a temple for all the gods)

예수는 헬라와 로마 세계를 정복.

교회는 동으로 퍼져서 페르시아와 인디어; 서로는 로마와 스페인; 남으로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 북으로는 고올 지방과 독일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자랐다. 그것의 기관은 지방 중심지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하에서 확장되었다.

교회는 감독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주재되었다.( 두용어는 상호 교환될 수 있다. )

집사들은 교회의 중직자로 봉사.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에 순교자가 되었다.-ex)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

313년 밀란 칙령은 핍박을 공식적으로는 끝냈다.

이 칙령은 Theodosius 황제하에서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는 데 중요한 진보를 이뤘다.

콘스탄틴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틴으로 이주.

동방교회에서는 콘스탄틴을 13번째 사도로 간주.

예수님의 가르침: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울의 가르침: 권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위에 있는 권세들보다 하나님께 먼저 순종해야 한다”


그들은 황제를 위해서는 기도했지만, 황제에게는 기도하지 않았다. 


나. 콘스탄틴으로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천도가 동서방교회의 차이를 벌여놓았다.

410년의 사건- 로마 “the eternal City"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 이성경이 모여서 정경(canon)

  cf. 말시온의 도전- 응전.

382년 로마에서 개최하는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채택.

Jerome- 가장 중요한 최기 성경 번역가.


기독인들이 예배의 형식을 발전시키기 시작.

 예배: 히브리어 성경 봉독; 설교; 기도; 노래; 세례; 주의 만찬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이 중요한 절기. 콘스탄틴의 회심경에 성탄절이 지켜지기 시작.

교회가 영향력이 있고 부유해지고 힘이 있게 될 때, 의식(liturgy)은 더 형식을 갖추고 더 정교해짐. 예배의 형식이 더 복잡해 짐.

특별히 서방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더 강조감


동방교회는 모든 삶을 성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서방교회는 7성례라고 부르는 것에 중점.

서방교회의 7성례(Baptism of infants(and adults); confirmation; the Eucharist; Penance, anointing of the sick( became Extreme Unction); ordination to the priesthood and marriage


서방교회의 화체설

- 이런 이해는 서방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엄청한 권위와 권세를 갖게 함.

성당의 건축 양식

사도신경( 390년경에 명칭이 주어졌다.)

신학적 진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성에 관한 진술: Nicea(325); Chalcedon(451)

수많은 신학자들- Augustine of Hippo

   죄와 하나님의 주권 강조.

다스림의 방법: 초기에는 감독, 장로, 집사.(단순)로 단순한 구조.

서방에서의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요 베드로 교구의 계승자다.

그는 교권제도(hierarchical)와 관리 제도를 다스리는 중심인물

여성들 귀한 봉사 그러나 공식적인 다스림에서는 벗어나 있었음.

800년의 사르마뉴의 기독교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

-교황이 주재. 교황의 권위와 권세를 고양. 황제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성례체계를 주재.


교회의 관심과 세속 권세들과의 충돌:  ex)Ambrose와 황제 Theodosius.

- 이런 맥락에서 교황 Boniface 8세- Unam Sanctam(1302)-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해와 달의 관계이다.


기독교인들의 세상에 관한 관계는 무엇이었던가?

1Cor.1:26- 세상적으로 지혜로운자, 부자, 권세있는 자가 많지 않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회심후로는 교회의 책임이 달라짐.


수도회의출현. 


파코미우스, 베네딕틴, 13세기의 수도원 운동

- 이것들 역시 타락.


다. 종교개혁에 이르는 길.

John Huss(1372-1415)- 콘스탄스 회의

John Wycliffe

Martin Luther( 1483- 1546)

- 로마서 1: 16-17: 그리스도의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보여진 unmerited grace

  - 95개 조항( Ninety-five theses)

    An address to Christian Nobility. - 귀족들이 교회의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복음의 참된 유익을 부인하는 것 같은 교회의 성례 제도를 공격

   Christian Liberty- 행위와는 무관한 기독교인들의 자유에 대해 선포.

웜스 회의(1521)- 성경에 어필.


루터- Ketherine von Bora; 결혼 장려.

celibacy를 크리스탄의 삶의 더 높은 실천으로 받아들이지 않음

1)만인 제사장설

2) 2종 성찬

3)성경을 번역



라.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의 계급 구조화에 대한 고찰

 1) 교회의 계급 구조화

로마의 감독 Damasus( 304-84)가 최초로 로마교회의 우위성을강조. 후계자들에 의해서 그우위성이 확립.


여러교회의 감독들이 로마의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기 시작.

그때마다 로마 감독은 로마의 황제가 쓰는 칙서의 형식으로 답서를 보냄.

교황제도의 윤곽은 Leo 1(440-461)때 나타남.

476년에 게르만 민족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서로마 지역에서 중심적인 정치세력으로 섰다.

Gregory the Great( 540-604)는 롬바르드족을 뛰어난 웅변술로 물리침. 가난한 자들을 돌아봄- 그는 교황권을 신장시켰지만 교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의 후계자인 Boniface III 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포카스에 의해서 보편교회의 감독이라고 불려지면서 교황이라는 말이 보편화.




 2) 로마 교황권의 절정.

7세기에 로마교회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가 됨

135년 예루살렘 완전한 뒤에 예루살렘 교회 영향력 상실.

알렉산드리아 & 안디옥 교회도 모슬렘에 의해서 그 영향력 상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모슬렘과 자주 전쟁.

로마는 서로마 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


로마 교회의 절대적인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위조 문서들

Legend of St. Silvester과 Donation of Constantine- Lateran 궁전을 주었다

- 1440년에  Lorenzo Valla에 의해서 위조임이 증명.


800년- 교황레오 3세와 Charlemagne. - 교황의 대관없는 왕권은 무효.

그레고리 7세와 헨리 4세.(카놋사의 굴욕사건)


교황 Boniface 8의 1302년의 칙서. - 교회에 영적이며 세속적인 두개의 검.

눅 22: 38-“여기 검둘이 있나이다.”

하나의 검은 또 하나의 검의 지배아래 있어야 하며 세속적인 권위는 영적인 권위에 따라야 한다.  


3. 2장. 장로 정치 제도

가. 교회 정치의 제형태

신학적인 전제의 차이로 다양한 교회 형태가 존재한다.


 1) 교황 정치

카톨릭 교회.  교황이 지상의 모든 교회를 통치한다.

성경과 전통(중요한 신학적 전제).

교회를 계급 구조적인 단체로 이해한다. 

교황, 추기경단. 대주교. 주교. 부제.

교황은 모든 지상의 권세를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교회뿐만 아니라 세속 정부의 영역까지 관할.

장점: 일사불란하다.

성경: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마 20: 25-28)


 2) 감독 정치

성공회와 감리교회

교황정치- 보편적 교회를 추구.  감독정치-국가교회

성직자의 계급 구조를 인정.( 상회와 하회차이가 분명)

지역교회의 평등권과 자율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3) 회중 정치

침례교회와 회중교회.

계층구조의 반발로 일어남.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강조(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등을 강조.)

개교회 주의를 지향.

교회 연합을 부정& 교회와 세속정부의 업무의 절대분리 주장.


 4) 장로 정치

딤전 4: 14: 장로회에서 안수 받은 것을 기억하라.


장로정치. 

계급적인 구조가 교회의 본질이 될 수 없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 만인 제사장설)

자율과 평등 사상을수용.

연합을 수용.  교회와 정부를 적대적인 관계로 보지 않는다.



나. 성경에서의 장로정치

 광야교회(행 7: 38)는 장로들에 의해서 통치(출 3: 16; 민 11:6)


 1)구약에 나타난 장로 정치


장로제도는 모세이전에 이미 실시.

 - 출 3: 16: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라. 

반석을 쳐서 물을 낼때도 목격한 증인(출 2: 16)

말씀을 받을 때 70인 장로를 데리고 나아갔다.( 출 24: 1-9)

속죄를 드릴때 제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안수.(레 4: 15)

바벨론 포로 기간중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렘 29; 겔 8:1)

포로 이후에도 장로의 권한은 여전히 존재.(스 10: 8, 14)

이스라엘에서의 장로직의 존재와 그 영향은 자치성의 원리와 습성을 배양.


구약에 100회 이상 그중에 모세 오경에 46회

사용 단어:

가돌(gadol:           ) - 손 윗사람. 형.

자켄.(zaqen:          ) - 연장자.


구약시대의 교회와 정부는 상호의존적이면서도 분리된 관계를 유지.

삼상 13: 12-13 - 사울과 사무엘

대하 26: 16-21 - 웃시야왕 교만하여 제사. 문둥병


2) 신약에서의 장로정치

롬 11: 17-21: 신약의 이방인의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교회에 접붙임을받았다고 하였다.


신약의 교회 원리 역시 장로 제도였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장로들을 세우므로 교회를 조직 (행 14: 23).

이를 위해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었다.(딛 1: 5)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연보를 전달 (행 11: 30)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배소 장로들을 초청


3) 2 직분론

교회의 직분이 감독(장로)과 집사라는 2가지 직분이었다. 


3직분론자들은 감독과 장로를 구별.

“한 교회, 한 감독” 사상 주장. 



장로와 감독이 동일한 직분이었다는 것은

*성경이 말한다.

디도서 1: 5-7에서 장로를 감독이라 칭하면서 감독과 장로를 같이 사용.

딤전 3: 2; 행 20 : 17-28


*사도들을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벧전 5: 1 -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로 소개

요이 1:1; 요삼 1: 1- 제자 요한도 장로로 칭함.

* 교부들이 주장한다.

Clement of Rome 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교회가 장로와 집사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말하고 장로와 감독을 동일 직분으로 간주한다.

Polycarp도 빌립보인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the Philippians) 도 교회의 직분은 두가지, 감독과 집사, 라고 하고 직분의 상하 구분은 없다.

Irenaeus 와 저스틴 마터도 2직분론 주장.



딤전 5: 17: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더한 것이니라.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목사)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에 교사라는 말이 포함된다.

그러나 성경은 강도 장로와 치리 장로의 신분상의 우열을 말하지 않고 교회일을 할때 기능상의 차이만을 인정.


결론: 장로 정치는 성경적인 정치 제도이다.

     신약의 교회는 다른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운영.

       : 직분자 선택 - 모든 제자가 맛디아 선택(행 1: 23-26), 모든 교인이 참여하여 집사 선택(행 6: 3)

         예산 사용-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 마케도니아 교회가 바울을 위하여 선교비 제공.

     교직자 사이의 평등

     연합사상을 강조(행 15장)

     교회 연합 사상에 기초하여 교회회의는 목사를 안수. - 디모데에게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의 일을 기억하라고 한다.(딤전 4: 14)



4. 3장. 유럽에서의 개혁주의 전통의 탄생


“주여,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내 심장을 당신께 드리나이다”를 봉인된 문장으로 해서 갖고 다녔다.


요한 칼빈( 1509-1564) 은 그의 회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cf.


1557년에 출판된 그의 시편 주석에서 그 주제에 대해서 드물게 진술했다.  그것은 갑작스럽고도 깊은 경험이었다.

칼빈이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종교개혁에 자기만의 공헌을 했고 그의 영향은 유럽과 영국의 섬들에 퍼졌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기독교 신앙과 삶 그리고 서양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람중의 한사람인 칼빈에게서부터 그 정체성을 추적해 나간다.

        칼빈도 루터의 경우처럼 인간의 조건과 상황 큰 변화를 가져온 르네상스 중에 일어났다. 이 르네상스 기간에 유럽인들은 서구적인 개념들의 성경적이고 헬라적 그리고 로마적 원천을 신선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런 지적 자극은 지구는 거의 둥글고 또한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입증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적 약진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발달은 유럽인들의 세계의 탐험, 착취 그리고 식민지화를 가속화시켰다. 중세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기구들은 점점 입헌적 군주제들, 대의 정부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들에 점점 양보하고 있었다. 이모든 변화들은 의사소통의 큰 변화와 가속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일고 쓰는 능력을 크게 향상 시켰다.

        18-9세의 장로회 목사들은 이런 소용돌이의 후예들이다.

개혁파들은 현대세계의 출현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는 유럽에서의 개혁파들의 확산. 예배, 신학, 정치에서의 개혁주의적 강조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은 교육의 발달과 경제적, 정치적 삶에 큰 기여를 했다.


가.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

종교개혁이란 15-16세기의 종교적인 운동을 기술하는 용어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보통 루터와 관련된 용어이지만,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에 관한 광범위한 불만족을 포함한다. 부정적 의미에서는 항의를 의미하지만, 중세 카톨릭 주의에 관한 적극적인 대안을 말한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보통 루터란이라고 부른다. 칼빈의 추총자들도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제네바의 영향은 칼빈주의 주제들에 대해서 다양성을 낳게 했다. 이런 항의에 포함된 자들을 개혁파라고 불렀다.

        칼빈은 프랑스의 리용에서 태어나서 원래는 법조계에 진출하고자 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르네상스의 지적 영향을 받았다. 세네카의 작품에 대한 책을 출판하고 마키아 벨리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공격했다. 칼빈이 회심한 것은 그의 나이 23세나 아니면 24세때 쯤이다. 프랑스 위그노들에 대한 핍박 때문에 그는 이미 개혁이 시작된 스위스로 피신했다. 칼빈이 스위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Huldrych Zwingli(1484-1531)는 이미 쯔리히를 중심으로 개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설교와 두 성례( 세례와 성찬)를 강조했다. 그의 성찬론은 영적 임재설이었다. 그의 개혁은 엄격한 윤리성을 특징으로 한다.

        쯔윙글 리가 죽은 지 몇 년 후에 칼빈은 그의 개혁파 신앙에 관한 가장 유명한 진술서인 기독교 강요의 첫판을 출판했다.(1536) 그는 그것은 프랑스왕에게 헌정하고 프랑스인들에게 개혁을 요청했다. 칼빈은 William Farel에 의해서 설득을 받아서 자기 뜻과는 상치되게 제네바에 남아서 교회를 위해서 일했다. 칼빈은 제네바를 떠나서 Strassburg로 가야 했다. 후에 제네바의 목회자로 다시 초청을 받아서야 돌아왔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그 도시의 종교적인 삶을 가다듬었다. 하나님을 예배를 중요시 했고 대중들의 충분한 참여가 있는 경배의 형식을 계발했다. 공적인 시편 찬송은 제네바 시민들에게 감격을 가져다 주었다. 칼빈은 또한 설교하는 것과 성경을 주석하는 것 그리고 신학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독교 강요(institutes)를 계속해서 개정하고 확장해서 마지막 판이 1559년에 나왔다. 그는 또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대표적 조직하에 교회의 치리회를 재조직했고 시 행정관들과 적절한 관계를 계속유지했다. 칼빈의 권세와 권위에 관한 보통 간주되는 견해들과 반대로, 이 행정관들은 항상 칼빈이 하길 원하는 것들을 승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재세례파 배경을 가진 Idelette de Bure와 결혼을 했는 데  아들이 하나 있었는 데, 어렸을 때 죽었다. 그들은 서로 매우 깊이 사랑했는 데, 둘 다 건강이 약했다. 아내가 죽은 후에 칼빈은 그녀는 “내 생애에 가장 좋은 친구”였다고 썼다.

        한동안 자기 조국을 떠나서 제네바에 거주해야 했던, 스코틀랜드 개혁가 John Knox는 제네바를 지칭하여 “사도시대 이래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했다. 그것은 과장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칼빈이 때로는 화가 나서 시관리들과 싸우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는 로만 캐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당국에 Michael Servetus에 대한 이단 증거를 제공했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고 해서 제네바에서 화형을 당했다. 카톨릭 교도들과 루터란들도 세르베투스가 자기들손에 떨어졌더라면 화형시켰을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화형보다는 교수형에 처할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런 청원이 그의 잘못을 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네바 개혁가는 조언과 위로를 주는 그의 출판된 저술들과 서신들로 온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글들에는 그의 목회자적 마음이 나타나 있다.  제네바를 방문하는 망명객들도 칼빈의 사상을 유럽 도처에 펄쳤다. 이런 식으로 칼빈은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동유럽 그리고 영국에서 개혁 운동을 강화시켰다.

        칼빈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에게도 큰영향을 미쳤다. 위그노들은 전국 규모의 대회 정치형태를 조직할 수가 있어서 구성원들에게 힘을 줄 수 있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예배 형태와 프랑스에서의 개혁파들의 신앙과 삶을 표현하는 Gallican Confession(1559)를 만들었다.  그 운동은 프랑스 카톨릭 교도들을 자극해서 1572년 성 바돌레뮤 축제때 경악스러운 대학살을 하게 했다.  Henry of Navarre 는 개혁파였지만 왕위 상속을 우해서 카톨릭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598년에 the Edict of Nantes를 반포했다. 그 칙령은 칼빈주의자들에게 베푼 관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위그노들이 계속되는 카톨릭 군주제하에서 핍박을 받았지만, 종교 자유를 향한 이정표였다.

        쯔윙글리 후에 Johann Heinrich Bullinger(1504-1575)가 스위스와 유럽에서 독일어권에서 개혁파 운동을 강화했다. 불링거 또한 그의 학문과 언약 신학에 관한 강조를 담은 그의 제 1, 2 Helvetic Confessions 때문에 온 대륙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다. 프레드릭 3세때는 칼빈주의가 라인강 지역에 확산이 되었다. 왕은 칼빈주의 학자들인 Zacharias Ursinus(d.1583)와 Kaspar Olevianus(d. 1587). 이들 신학자들이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서신에 기초한 Heidelberg Catechism(1563)을 작성했다. 이 요리문답은 특히 네델란드의 개혁파교회중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 지역이 유산에 의해서 자기 통치하에 왔을 때, 스페인의 카톨릭왕인 필립 2세가 북유럽에 있는 로마 카톨릭주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네델란드에 관심이 많았는 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이 프로테스탄트즘이 확신하고 있었고 오렌지 공작 William에 의해서 경제적으로도 활기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립이 지칭하는 대로 화란의 베거들이 스페인의 멍에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피의 투쟁을 벌였고 결국은 윌리암은 독립을 얻었다. 화란의 개신교들은 자신들의 예배형태인 a Belgic Confession(1561)을 발전시켰고 회의적 통치형태를 계발했다. 아마도 비관용은 좋은 정책이 아니다라는 감정 뿐만 아니라 핍박에 대한 그들의 경험 때문에 화란인들은 더 관용적이고 다 문화적 국가를 발전시켰다. 개혁파의 영향은 또한 동쪽으로 보헤미아, 헝가리, 특히 개혁자들이  불링거의 Second Helvetic Confessions(1566)를 사용하여,  그들 자신의 민족적인 예배 형태를 계발한  트랜실반니아에 까지 확산되었다. 그들은 감독적 지도력을 포함한 정치형태를 조직했다.

대륙의 개혁파 운동은 영국의 섬등에서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고 칼빈주의 영향의 다민족 성격을 확산시켰다.



나. 칼빈의 예배와 신학

Strassbourg체재시 (1538.8-1541.9)  M. Bucher와 Capito에게서 배움

7교구로 나누어 각 교구마다. 3명의 모범된 평신도를 세워서 목사의 치리 사역과 심방사역을 보조.


1537년 제 1차제네바에서의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지침서. ( Articles concerning to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


1541년 9월 13일 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


칼빈과 개혁파 전통에 있는자들은 로마 카톨릭과 루터란들, 재세레파들과 많은 확신을 공유했다. 그러나 루터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한 위대한 신학자라면,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했다. 모든 삶을 주장하시고 통제하신다는 하나님의 성경적인 이미지는 개혁파 예배, 신학, 정치와 기독교적 삶을 형성시켰다.

        개혁파 전통에 따르면, 예배는 기독교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요한 봉사이다. 예배는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고 지원된다. 그것은 말씀의 설교와 청취와 예수에 의해서 시작된 성례전적 삶을 포함한다. 칼빈이 제네바에 처음에 했던 것들에 하나가 예배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경에 기초하고 신학적 순수성과 지성 그리고 단순성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체 기독교 공동체의 건덕을 위한 것이다. 칼빈은 즉흥적인 것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작성되어 있는 기도가 있는 예배의 형태를 제공했다. 그의 순서는 시편 124편 8절: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로 시작한다. 예배의 첫부분은 말씀 설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 설교는 인쇄되어 있고, 벌게이트의 라틴어가 아니라 제나라말  성경에서 더 실감이 난다. 루터란 뿐만 아니라 개혁파들도 중세의 성례 제도를 없애고 세례( 유아세례를 포함하여)와 성찬만을 포함시켰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해 계시고 중세의 스콜라적 용어인 “transubstantiation"를 통한 육체적이지 않다. 칼빈은 성찬식은 매주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개혁파들은 시편 찬양자로 알려져 있다. 시편은 성경적이고 그래서 정통적이다. 그러나 칼빈은 사람이 작사한 찬송가를 반대하지 않았다.

        칼빈은 자유기도 뿐만 아니라 작성된 기도문 사용을 허락하면서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세례, 결혼, 병자 심방을 위한 형식들을 계발했다. 1542년 의식에 따르면 아침 예배는 말씀의 의식과 다락방 의식의 두부분으로 되어 있다.


말씀 의식


성경 문장(시편 124:8)

죄의 고백

사죄의기도

운율이 있는 시편

예배시에 암송하는 성구

설교


다락방 의식


(구제)헌금 거둠

중재기도

주기도

사도신경(노래로)

성찬 빵과 포도주 준비

성찬의 말씀

권면

축성 기도

빵을 뗌

성찬 (시편이나 성경)

성찬후 모으는 것

아론의 축복


 그래서 개혁 신학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성과 운명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고백하며 확증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칼빈은 그의 가장 광범위한 저술은 성경 주석들이지만 생애를 두고 계속하여 개정한 기독교 강요 때문에 신학자로 유명하다. 자시 신학이 발전하면서, 칼빈은 예배시간에 암송하는 사도신경 주변에 자기 자료를 더 더욱 조직화했다. 칼빈을 추종하여 개혁파들은 자기 신학을 성경에 정초시켰다. 그들은 또한 교회의 고대 신경을 받아들였다. 개혁파는 우리는 신적인 완전성에 있는 하나님을 알수 없고, 창조주와 구원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관계하시는 방식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혁파들은 고대신경 용어에서 하나님의 관계의 신비를 표현하는 삼위일체주의자들이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강력하시고 목적 지향적이셔서 창조 질서로 부르시고,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창조의 청지기로 세우셨다. 개혁파는 바울이 기록한대로 여전히 완성을 위해서 탄식하지만(롬 8:22), 창조의 선함을 주장한다.  구원주로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불안의 시대에 죄와 소외로 부터 구원하신다. 인간은 그들이 금생에서 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의도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시각에서 선해 보이는 것도 인간의 교만에 의해서 훼손되어 있다. 칼빈은 이것을 우상숭배와 자기 예배의 경향으로 분석했다. ... 이런 소외의 결과가 창조의 질서에 스며들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킨 죄와 사망이다.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고 성경을 통해서 대면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신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을 강조한다. 루터가 한 것처럼 개혁파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예정론의 문제점을 탐구한다. ... 칼빈의 법적인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지성에 관계에서 이문제를 생각하도록 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불편했다. 왜나햐면 그것은 그로 하여금 이중 예정 즉 구원과 죽음을 주장하게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값없는 은혜를 적을 때 이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그것을 믿는 자를 위한 편안한 교리로 간주하고 이 문제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경고했다. 

        선택에 관한 이런 문제 때문에 1618-1619년에 네델란드 Dort Synod에서  Jacobus Arminius에 응답하기 위해서 개신교 회의가 열렸다.  그 대회는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total depravity, unconditional election, limited atonement, irresistible grace, and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강조.



다. 칼빈의 교회 정치

  1) 그리스도 왕권의 회복


루터와 칼빈의 개혁의 차이점


칼빈의 개혁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회복함으로.


제네바는 복음적인 교리는 설교했지만 생활의 개혁에는 무관심.

- 교회 권징을 실시.


1537. 7. 29에 시의회에 신앙고백서, 요리문답서, 교회권징서를 제출.

모든 시민은 서약해야.

그러면 생활 개혁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권징을 통한 생활개혁을 제안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1)개혁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동일한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2)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교회와 정부의 업무가 구별 필요.

출교는 교회에 속한 것이지 정부에 속한 것이 아니다.

권징권은 교회로 환원되어야 한다.

정부는 성문법을 어긴자를 징벌.

통치자는 단순히 사인에 불과하므로 교회를 다스리려 하지 말고 교회의 권징에 순종.


시의회는 받아들이지 못함.- 칼빈은 1538. 4.22에 제네바를 떠남.



스트라스 부르그에서의 부쳐(Martin Bucer)  cf. 쯔윙글리와 달랐다.

부쳐는 도덕적인 권징을 교회의 고유의 업무로 이해.

권징의 최고 행위인 출교는 정부가 아닌 교회에서 행해야 한다. 



 2) 교회 헌법

칼빈이 없는 제네바

추기경 사돌렛- 다시 로마교회로.

베른과의 동맹을 맺으려 했다. 위기?


칼빈의 두가지 귀국 조건

1) 성문화된 종교 헌장을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거룩한 도시를세울 것

2) 제네바 시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학교를 세우는 데 협력할 것.


칼빈은 질서 유지를 위한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다.

-  교회 헌법(Ecclesiastical Ordinances)- 1541. 11, 20에 대 위원회와 소위원회에서 통과되고 비준되었다. 이때로부터 장로교회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우선 교회 헌법에서 목사의 자격과 임무를 설명.

목사는 “하나님의 입”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예배를 인도하며, 교육하고, 권징을 행하며, 성례를 집행한다.


목회자는 인격적으로 결함이 없고 신학적으로 건전해야 한다.


목사는 지교회에서 청빙을 의해서만 임직.

목사 시험을 치르고. 교육을 받은 뒤 안수.


목사에게 교리적인 오류.

목사들이 모여서 당사자와 얘기.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 통치자에게 보내서 징벌.


교사(doctor)- 주로 교육을 위한 직분

바른 신학을 교수.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신학교육으로 바른 신학을 후대에 계승시켜야 할 사명.

제네바에서의 교사는 장년과 어린이 교육에 전념.

일주일에 3번, 월, 수, 금요일에 신구약을 강해.

교사들의 신구약 강해는 학구적이었고

주로 나이든 학생들과 목사들이 참석, 그러나 원하는 자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가 있었다.


집사-

1) 구제

2) 병자 간호.

- 병원을 돌보며, 사회 보장제를 집행, 구제 기관을 감독하므로 사회 복지 업무를 감당.

칼빈-직업 소명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노동정책을 펴는 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장로- 모든 회중의 생활을 관찰하며 권면하되 특히 형제애를 가지고 처리하는 직분

제네바의 모든 구역에는 영적인 문제를 살피는 두명의 장로.


제네바의 장로 법원- 권징의 문제를 다룸.

12명 (2- 소의회. 4- 중의회(6으로 구성).6- 대의회(200으로 구성))


장로의 최초 임기는 1년이지만 매년 연말 시의회의 자격 시험을 통과하면 직무를 계속, 불합격하면 정직

후에 법개정. 1년이 지나 소의회의 심사에서 통과하면 종신직으로 승인. 불합격하면 자격 박탈.


장로의 자격_ 선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는 자로, 도덕적으로 무흠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적으로 신실해야 했다.


선거 방법: 소의회에서 이름을 추천. 목사들이 재심. 대의회에서 추천한 후, 인정하면 공적인 서약을 거쳐서 장로로 취임.


장로 법원 운영은 매주 목요일 아침에 목사와 장로가 운영. 사회는 행정 관료가 맡았고 목사와 장로는 도덕법을 범한자를 심사.

 1) 장로는 형제애로 권면

 2) 장로회에 보고하여 치리

 3) 출교 



3) 칼빈의 교회 정치 원리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교회 정치 체제는 장로 정치였으나 나중에 감독이 등장하였다고 보았다.

교권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정치제도로 개혁해야 한다.

칼빈의 교회 정치의 기본 요소는 그리스도의 주권, 직무의 분배, 대의정치로 이뤄진다.- 그리스도의 주권하에서의 equality(평등성), autonomy(자율성), unity(연합성)으로 요약.


교회와 교회 사이,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의 평등을 주장.

교회 직분을 계급적으로 보려는 모든 시도를 배척.


교회의 자율사상- 목회자의 청빙이나 예산 사용은 교회의 당국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교회의 회중이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장로교 정치의 자율사상은 스코틀랜드와 미국 장로교회에 채택되어 장로교 정치의 핵심 사상으로 정착.


동시에 칼빈은 교회 연합을 역설.

- 교회 회의에 참석할 자격은 전회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에게 있다. ( 사도행전 15: 6 주석)


결론: 무너진 그리스도의 왕권을 교회에서 회복하고자 했다.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권징을 지목하였고 장로법원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사회를 제네바에 건설하고자 했다.

특히 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초요, 예배의 근거요, 교회 정치의 틀을 제공한다는 그의 사상은 장로교회의 예배원리요 정치 원리의 틀을 제공하였다.



(04/06/2004)

라. 칼빈 이후의 스위스 개혁 교회

칼빈의 사후에 제네바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다.

그러나 이때에 제네바를 지도해 온 이는 칼빈의 후계자요 Geneva Academy의 학장인  Theodore Beza( 1519-1605)이다.


베자는 1548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개종후에 개혁파로들어왔다.

1555년에 모든 기독교 신앙의 핵심(Sum of all Christianity) 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칼빈의 예정 교리를 주장하였고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장이 되었다.

칼빈의 사후에는 The life of Calvin(1564)을 저술하였고 1576년에는 칼빈의 교회 헌법을 개정하여 권징을 더 엄격하게 시행하고 제네바를 더 철저하게 개혁하였다.


1573년에는 행정관료의 규율(1573) 이란 책에서 행정관료나 백성은 다같이 법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의 원리를 베자는 교회정치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베자는 예정론을 신봉하여 타락전 예정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예배 개혁을 주장하여 인위적인 요소 제거를 주장하였다. 특히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은 구습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칼빈과 그 이후의 베자의 영향으로 스위스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장로교 정치제도를 받아들었다.

불어권 지역인 Geneva, Neuchatel(로이샤텔),  Lausanne(로잔)에 장로교회들이 세워졌고

독일어권 지역인 Basel, Bern, Zurich에 신앙은 칼빈신앙을 채택. 그러나 교회정치는 쯔윙글리적 교회 정치인 교회를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다.

바젤에서는 요한야곱 그리나우스(Johann Jakob Grynaus, 1540-1607)가 바젤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개혁신학을 고백하였고 그를 이어서 요하네스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 1586-1629)가 개혁 신학을 정착시켰다. 특히 볼레비우스는 당시에 있어서 장로교 신학교의 대표적인 신학서인 기독교 신앙개요(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ae: 1626)을 저술하였다.



마. 프랑스의 위그노

프랑스에서의 종교 개혁은 칼빈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12세기의 왈도파 운동

 - Peter Waldo가 마 19: 21에 의해서 감동을 받고 리용(Lyons)에서 시작(1173년)- 리용의 가난한 설교자들

 - 연옥설, 화체설 등 중세교리를 거부.

   기성 종교계급 및 성직 제도 그리고 성자 숭배들을 반대.

   원시 기독교의 소박한 모습을 재현시킴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특히 왈도파의 신앙고백서( A Confession of Faith of the Waldenses: 1220)는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점이 많음.


 성경만을 신앙의 유일한 기초로 인정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두가지 성례(세례와 성찬)-이미 칼빈 이전에 주장되어져 있다.

왈도파들은 2직분(장로, 집사)를 채택.


대주교는 이들의 활동을 금지 시킴, 로마에 항소했으나 저들의 무식을 조롱.

후에 알프스의 산맥의 계곡에 있는 산촌으로 잠적. 결국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 프로테스탄트가 됨. 

  

16세기의 인문주의자를 중심으로한 개혁 운동

  -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evre d"Etaples)

    - 미신적인 신앙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성경을 불어로 번역(1523년)

  - 그의 번역본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칼빈과 파렐의 배출


루터의 1517년  95개조 조항을 비텐베르그성 교회 정문에 붙이고 난후에 종교 개혁의 명분은 특히 이제 신진 기술인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서 유럽 전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유럽 여러 지방의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다. 기존의 로마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종교개혁 그룹에 합류할 것인가?


종교개혁의 중요한 발원지들인 독일과 스위스와 인접하고 있는 프랑스도 결코 예외가 될 수없었다. - 프랑스에서는 학자층과 귀족층에서 많은 추종자들은 얻음.

 - 종교 개혁 초기에 프랑스의 통치자는 프란시스 1세였는 데, 그이 통치 스타일은 일관성이 없는 애매모호함이 특징.  강압책과 온건책을 교차로 사용하는 그의 정책 때문에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망명길에 오름( 칼빈)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위치한 나바르왕국의 왕비가 된 프란시스의 누이인 앙고르매의 마가렛( Margaret of Angouleme)이 프랑스에서 망명해온 프로테스탄트들을 받아들여 보호하였고 동시에 나바르 왕국과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로부터 프로테스탄트 서적들이 프랑스에 밀수입되고 있었음.


* Huguenot(위그노)- 기원이 불분명.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을 일컬음.


최초의 프랑스의 신교의 교회

 - 1555년. La Ferriere 집에서의 모임. 세례집례의 필요성에 기인해서 교회구성(목사, 장로, 집사를 세움)

1559년. 최초의 프랑스에서의 개혁파 교회 조직( 칼빈의 모형을 따름).

 - 파리근처에서 비밀리에 회집하였던 1차 총회때는 Confession of faith과 Discipline를 채택. 


그러나 이런 신교의 발전상황은 로마 카톨릭 파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바시(Vassy) 사건 - 기즈가 형제들이 200명 정도의 무장군인들을 이끌고 가서 예배처소를 급습하여 60여명의 신교 교인들을 살해. - 30년 전쟁의 효시가 됨.

  - 이 사건후에 카톨릭 교도들은 기즈공(Duke of Guise)의 지휘하에, 위그노들은 가스파르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제독의 지도하에 모여듬.

 - 1년후에는 양자간에 휴전이 이뤄져서 위그노들에게 상당한 자유가 허락됨


1571년의 Rochelle 대회( 2150 교회가 소속)는 프랑스 장로교 주의에서 매우 중요.


1572년 8월 24일 성바돌로매 축제 날 밤의 대학살 - 수천명의 위그노가 학살 당함.

 - 정황: 카톨릭 교도인 프랑스 국왕의 누이 동생인 마가렛 발로아(Margaret Valois)와  신교도인 나바르 왕국의 국왕인 Henry of Navarre가 결혼함. 많은 위그노 지도자들이 모여듬.  왕의 모친에 의해서 충동되어진 왕의 명에 의해서 학살됨


- 이소식이 유럽의 다른 나라에 전해졌을 때 특히 엘리자베스는 상복을 입음.


1598년 4월 13일에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s)


- 카톨릭으로 개종한 Henry of Navarre에 의해서 되어짐( 5번의 개종끝에 파리에 입성하여 수십년에 걸친 종교 전쟁을 종식시킴)


- 낭트 칙령의 내용: 위그노들이 파리만을 제외하고는 이전의 예배당이 있었던 모든 장소에서 자유스럽게 예배드릴 수가 있었다. 

    - 위그노들이 1597년 이전에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요새와 성채를 돌려줌

- 헨리는 1610년에 암살됨- 광신적 카톨릭 교도에 의해 국왕은 아직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므로 국왕을 살해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수 있음.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 루이 14세는 그 이전에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많은 위그노들을 학살.

 - 숙련된 기술자들인 수천의 위그노들이  영국, 화란, 독일, 아일랜드, 미국으로 이주해서 공업 기술 전파가 이뤄짐.


1715년- The Church in the Desert( 프랑스 Nimes의 채석장에서 조직)

 - 정황: 루이 14세의 박해중에도 소년 용사 Jean Cavalrier의 지도하에 프랑스의 Cevennes의 산악지대로 도망해서 프랑스 정예부대에 대항해서 3년동안 대항. 사막교회는 조직되었고 수년내에 3000명 회집.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 모든 교회당 문 폐쇄. 


1795년 - 신앙의 자유 허용. - 그때 이후로는 위그노들도 양심에 따라 예배할 수 있게 됨


바. 네델란드의 Beggars.(거지떼들)


저지대라고 불리우는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의 나라들처럼 일찍부터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소개됨.   네델란드에는 특히 칼핀의 개혁파 종교개혁 사상이 소개됨


스페인의 국왕인 찰스 5세는 라인강 유역의 17개 지방(Seventeen Provinces: 오늘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그 지역을 의미)을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음


1555년- 스페인의 필립 2세가 네델란드의 통치자가 됨.


1566년- 수백명의 귀족들이 필립의 네델란드 섭정자에게 정의로운 통치를 간청하는 평화적인 노력. 이때 이미 네델란드의 신교도들은 거지떼들(Beggars of the see)로 불려지고 있었음


1567년 -  평화로운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신교도들은 구교회당들을 파괴함

        - 필립왕의 명을 받은 Alva 공작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란과 이단을 종식시키려함

        - 약 2000명의 신교도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함.


그 이후에 오렌지공 윌리암( William the Silent Prince of Orange)과 그의 아들 모리스는  일어나서 40년 동안 투쟁하였고 결국은 북부 네델란드의 개신교들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


1574 - 스페인 군대는 Leyden시를 포위

      -  윌리엄과 레이든시민들은 전설적인 용기로 버팀.

      - 윌리엄은 제방을 헐어서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스페인 군대를 물리침.

      - 이를 기념하여 1575년에 윌리엄은 레이든 대학을 설립( 화란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대학)


후에 프로테스탄트들이 크게 세력을 얻고 있는 북부 네덜란드의 여러성들은 우트레히트 동맹을 구성했는 데 이 동맹에서 지금의 Holland가 나왔다.


그러나 남부의 여러 성들은 스페인과 카톨릭에 얽매였는 데 이곳은 후에 벨기에가 되었다.


1583년에 오렌지공 윌리암은 스페인이 현상금을 걸고 고용한 자객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당시 19세에 지나지 않은 모리스는 오히려 부친보다 더 뛰어난 용맹으로 스페인에 대해서 수차례의 승리를 거둠.


1607년에 스페인은 결국 휴전에 서명해야 했다.

이때 북부 지방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칼빈주의자 였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칼빈주의적 신념을 애국심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 지방의 사람들은 계속 카톨릭 신앙으로 남았다.  결국 종교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개신교국인 네델란드와 카톨릭국들인 벨기에와 룩셈부르그로 나뉘었다.


그러나 네델란드 교회는 후에 내부의 신앙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레이든 대학의 교수인 Jacobus Arminius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점과는 달리 인간의 선과 도덕적 자유에 대한 견해를 피력.


1618년 Dort에서 종교회의가 소집됨

 - 네델란드외에 28명의 타국의 대표들이 참석.


윌리암은 종교적으로 박해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 그결과 화란은 저들의 피난처가 됨


프랑스의 위그노, 잉글랜드의 청교도들, 스코틀랜드의 카버넌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델란드에서 정착, 저들이 그곳을 떠날 때는 이전에 자신들이 장로주의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도 더 뜨거운 확신은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감.


5. 4장.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가. 스코틀랜드의 개혁적 토양

a. 롤라드 파들(존 위클리의 추종자들)

 -  롤라드파의 영향에 관해서는 불분명한 요소들이 많으나

그럼에도 장차 있을 본격적인 개혁을 대비하여 좋은 토양을 조성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b. 루터의 사상 :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루터파에 대해서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은  Patrick Hamilton이었다.

 - 1527년에 비텐베르그를 방문.

 - 루터란 교리 전문가 Francis Lambert(Marburg대학)에게서 배웠다.

 - 성 앤드류의 추기경인 데이빗 비튼에 의해서 소환을 당해서 처형당했다.

 - 그의 주장은 교회의 타락에 관해서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핵심적 원리인 이신칭의도 주장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루터주의의 확산에 일조한 인물들로는 Alexander Alesius, John Gau, Henry Balnaves 등이 있다.


c. 구교회에서의 개혁적인 성향의 수도사들

 - 1530년대부터 개혁적인 성향의 수도원장들 혹은 수도사들(프란체스칸, 도미티칸, 어거스틴파, 시스터시안, 카투시안파 등)이 나타났다. 

 - 1550년대에 지도적 개혁 인사들의 대부분은 카톨릭 교회에서 중요 교회직을 수행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중에 John Row, John Winram, John Willock등이 있다.


나. John Knox와 종교개혁

 1) 개혁가 존 낙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거장으로는 단연 존 낙스( 1514-72)가 거론되어야 한다.

  

  - 1514년 이스트 로디안의 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 1536년 사제로 서품


낙스의 회심

 - 도미니크 파 수도승이었던 Thomas Guilliame 의 개혁적인 설교를 듣교 개신교로 회심


회심이후에 낙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이들은

 - John Rough와 George Wishart등이 있다.

   

 - 특히 위사트는 하딩톤 지역에서 만난 이후, 낙스를 동반하고 순회설교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위사트는 성 엔드류의 데이빗 비튼 추기경에 의해서 1546년에 순교당했지만, 그의 사역은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을 보편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낙스는 위사트로부터 개혁적인 신앙과 실천에 관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낙스의 포로 생활

 - 1547년에는 성 엔드류성에 가서 데이빗 비튼 추기경을 처형하고 그 성 엔드류성을 중심으로 설교 사역을 했다.

 - 그성이 프랑스군에 의해서 함락될 때 포로가 되어서 노예 범선에 노젓는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19개월)


포로에서의 석방

 -영국왕 에드워드 6세의 교섭에 의해서 되어졌다.

 -1549년에 영국의 Berwick 시(Newcastle)에서 목회하였다.

- 1551년에 영국의 에드워드 6세( 헨리 8세와 Jane Seymour의 아들)의 왕실 설교자가 되었다. (Rochester 주교직을 제안. 거절)


스위스로의 망명

- 에드워드 6세후에 열광적인 카톨릭 교도인 메리 투더가 여왕이 되었다.

- 낙스의 제네바 칭송: “사도이래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

- 스위스에서 칼빈, 불링거 등을 비롯한 여러 개혁가들과 교제를 할 수 있었다. 


1555년. 낙스의 스코틀랜드 방문

-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모친인 귀즈가의 메리 섭정의 종교 관용정책

- 낙스는 6개월동안 스코틀랜드 전역을 여행하면서 개혁 신앙을 전파하였고 평등과 자율에 근거한 교회정치를 강조하였다.

- 귀족들( James Steward경, Lome경, Glemcaim 백작, William Maitland of Lethington 등)과 친분을 나누면서 개혁 신앙을 소개하였다.

- 이들 귀족들은 후에 진정한 개혁을 실행하기로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제일 계약(First Bond)에 서명함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운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영국인 망명교회 담임

 - 칼빈에 의해서 1555년 11월에 시작된 교회를 칼빈의 권유로  담임하였다.

 - 그 교회는 최초의 청교도적인 교회로 간주되어 질 수 있는 교회였다.

 - 낙스는 기도의 형식과 성례등의 집행( The Form of Prayers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etc. 1556)를 출판하였다.


기도의 형식과 성례등의 집행의 내용

- 예배 의식이나 성례집행이 신약에 나타나는 규범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 목사는 예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을 중심으로 자의적으로 드리도록 하였다. 이때 예배는 성경해석이라 할 만큼 설교 중심적이었다.

-성찬은 한달에 한번씩이나 회중이 원하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회 행정 문제: 목사, 장로, 집사를 인정하였는 데, 이 직분들은 동등하다.

목사는 말씀과 성례집행을 담당하며 장로는 목사일을 보좌하며, 교리들을 다스리며, 권면한다. 집사는 구제를 담당한다.


1558년의 괴물같은 여성 통치에 대항하는 첫 번째 나팔소리( First Blast of a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여성 통치자들에 의해서 가해지는 박해를 비난하였다.

- 낙스의 여성 통치 비판은 당시 영국의 피의 메리, 스코틀랜드의 섭정이었던 귀즈가의  메리,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왕비인 캐더린 메디치를 의식한 것이었다.

- 하지만 그의 여성들의 통치는 잘못이다라는 그의 논지는 칼빈등과 같은 개혁자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559년의 귀국

- 노예선 포로에서의 석방이후 잠시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잉글랜드,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지를 유랑하면서 12년을 보냄

- 이때 스코틀랜드는 개혁의 열기로 무르익고 있었다.


1960년의 의회

 - 스코틀랜드에서 로마카톨릭 교회를 금지시켰고 장로주의 교회를 출발시켰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지도하에 기독교 국가로 현저하게 개혁되어 갔다. 그는 설교 사역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개혁의 대열에 합류시키면서 진정한 성경적인 개혁운동이 무엇인가를 제시했던 것이다.


2) 메리와의 대결


메리의 귀국( 1561.8)

 - 메리는 프랑스에서의 교육( 엄격한 로마카톨릭 교도로의 양육) 받고 프랑스 왕 프란시스 2세와 결혼했다.

 - 남편 프란스시 2세가 사망(1559)후에 스코틀랜드에 귀국

 - 절대왕정(왕권신수설)과 로마 카톨릭 교회 회복 기도

 - 메리는 왕궁에서 이미 국법에서 금지한 미사를 행한 것이었다.


양자의 충돌

 - 낙스는 국법에서 금한 메리의 여왕의 미사시행은 잘못이라고 설교하였다.

 - 국왕의 미사 시행에 관한 낙스의 비난을 메리 여왕은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 낙스는 국왕이 참된 종교를 계속하여 박해한다면 국민들의 무력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하였다.


메리의 결혼들

- 메리가 스페인의 Don Carlos(1563)와 결혼을 기도하자 낙스는 반대.

- 메리의 1565년 Darnley 경과의 결혼과 스캔들 (David Riccio)

- 메리의 3번째 결혼( 보스웰 백작)


메리의 하야(1567. 7. 24)

- 그러나 메리의 이 결혼 때문에 대내외적인 비난에 직면해서 하야해야 했다.

- 메리의 나이어린 아들( 제임스 6세)의 대관식의 설교는 낙스가 맡았다.

3)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역사서, 제 1 치리서


이런 문서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의 기초가 된 중요한 역사적인 문서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 개혁의회가 개회한 후 4일만에 낙스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자성된 것인데, 조직저기인 면에서 다소 부족하다고 평가받는다.

 - 그럼에도 당대의 정황속에서 개혁세력의 신앙과 교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개혁교회의 귀중한 역사적 문서들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 12개 보편신앙의 기본 진리들을 25개 조항으로 설명한다.

- 교회의 교리는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로 나누어 설명했는 데, 낙스는 가견적 교회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 진정한 가견적 교회의 표징을 말씀의 진정한 선포와 성례의  바른 집행에서 찾았다.

- 두가지 성례만을 인정하였다. 

- 성경의 권위의 교리 유래주장을 배격하고 성경해석을 오직 성령에만 귀속시켰다. 

- 위정자들의 참된 종교 유지 임무를 규정하였다.

        


예식서(Book of Common Order)

 - 보통 낙스의 예식서로 알려진 이문서는 1564년 에딘버러에서 인쇄되었다.

 -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서(1645)까지는 모든 예식의 표준서였다.  

 - 예식서의 기원

    - 프랑크 푸르트의 영국 망명자 교회를 위한 낙스와 그의 동료들의 예식서를 작성(1554)

    -  제네바 영국 망명 교회에서 사용된 성례의 집행과 기도에대한 규례(The Forms of Prayers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used in the Englishe Congregation at Genneva: 1556)라는 제목으로의 출판

    - 1559년(낙스의 스코틀랜드로의 귀환한 해)이후에 개혁교회를 위해서 그의 이 예식서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1562년 이후에 시편송과 기도문들을 증보하여 발간.


- 성례, 기도, 결혼, 장례등의 집전을 이 예식서에 따라서 집행하였다.



제 1치리서

 - 1560년 이 3문서들중 가장 중요한 문서

 - 6인의 John( Winram, Spottiswood, Willock, Douglas, Row, Knox)에게 개혁의 실행문서를 초안하도록 지시하였다.

 - 1치리서는 전 9장으로 이뤄져있는 데,

1(교리); 2(성례); 3(우상타파); 4(목사직); 5(교회의 재정); 6(교회 재산); 7(치리); 8(장로와 집사); 9(교회 행정)을 다루고 있다.

 - 특히 성례는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집전되어야 할 것을 명시했고 오직 물외에는 어떤 재료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제 1치리서의 한계들

a) 타국의 제도를 억지로 맞추는 경향이 있다.

b) 명시한 교회 재산에 관한 규정은 당시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


2. 앤드류 멜빌와 제 2 치리서

Andrew Melville( 1545-1622)

- 성 엔드류 대학 졸업과 제 1치리서의 공동저자인 더글라스와 교제

-  프랑스와 스위스등지에서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교제

- 1574년 7월의 귀국

        

리스 회의(Convention of Leith, 1572)와 감독제 부활

 - 섭정 제후인 Morton 경에 의해 되어진 리스협약은 개혁파들에 대한 굉장한 도전

 - 대안 동의 불가피

    - 대안:  제 2치리서 (1576)


제 2치리서

- 교회권과 세속권의 명확한 분리로 시작된다.

- 기독교인 위정자는 교회가 타락할 때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이 있으며 정상적으로 목회 사역이 이뤄질 때는 사역의 극대화가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 항시적인 4 직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a) 목사 혹은 감독 b) 박사 혹은 교사 c) 장로 d) 집사.

- 교회 정치 구조

  - 각 치리회들로 구성되며 목사와 장로들이 그회원이 된다.

  - 4종류의 치리회( 지교회, 지방, 국가, 에큐메니칼)

  - 단계적 상하 체제

-제2 치리서의 중요 특징

  - 노회제도(presbytery) 도입.

  - 구 잔재들 지적하였다.

     - 제후들에 의한 성직 임명 배격되어야 하며 회중에 의한 목사 회복 필요.

     - 감독들의 타교회 지도 방문 중단.


그러나 제 2 치리서의 인준은 지연되었다. 엔드류 멜빌등의 개혁파 총회가 합법화 조례(1581) 발표하고도 거의 10년이 지난 후인  1592년에 가서야 의회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장로교 헌법을 인준하였던 것이다. 또 위정자들은 이 제 2치리서의 법적인 효력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효력의 발생을 위해서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세력들은 위정자들과의  기나긴 투쟁의 기간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수정분

Andrew Melville( 1545-1622) 은 성 엔드류 대학을 다녔고 제 1치리서의 공동저자인 더글라스와 교제를 나누었고 프랑스와 스위스등지에서 개혁교회들과 그 지도자들과 친분을 가졌다. 그는 1574년 7월에 조국에 다시 돌아왔다.

        이때 스코틀랜드는 기득권 세력들의 이권챙기기로 교회측과 국왕측은 첨예하게 대랍하고 있었다. 그가 귀국하기 2년전인 1572년에는 섭정 제후인 Morton 경이 리스 회의(Convention of Leith)를 소집하여 감독제를 부활시켰다. 아 리스협약은 개혁파들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다. 결국은 1576년에 섭정 제후는 교회가 대안책을 찾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2치리서 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 2치리서는 교회권과 세속권의 명확한 분리로 시작된다. 기독교인 위정자는 교회가 타락할 때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이 있으며 정상적으로 목회 사역이 이뤄질 때는 사역의 극대화가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항시적인 4 직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a) 목사 혹은 감독 b) 박사 혹은 교사 c) 장로 d) 집사.

         교회 정치 구조는 각 치리회들로 구성되며 목사와 장로들이 그회원이 된다. 4종류의 치리회들이 있는 데, 지교회, 지방, 국가, 에큐메니칼 모임들이 그것들이다. 이런 치리회들은 단계적인 구조 체제를 갖고 있으며, 하급 치리회는 상급 치리회의 결정에 순복해야 한다.

        이 제 2 치리서는 특징은 노회제도(presbytery)가 사상 처음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노회는 지교회의 당회의 수준을 넘어서 상급 치리회로 정착했다. 또한 이 치리서는 개혁교회에 남아 있는 여러 구 잔재를 지적하였다. 제후등에 의해서 행사되던 성직 임명 제도는 중단되어야 하며 회중들의 투표에 의해서 목사 선출 관행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감독들은 단지 지교회의 담임이 되어야 하며 타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방문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감독제를 선호하던 정부로부터 제 2 치리서의 인준이 용이하지 않았다. 엔드류 멜빌등의 개혁 세력들이 이끌던 총회는 1581년 4월에 가서야 제2 치리서를 합법화하는 조례를 발표하게 되었다.  1592년에 의회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장로교 헌법을 인준하였다. 그러나 국왕과 의회는 이 제 2치리서의 법적인 지위를 인정할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 권력과의 기나긴 투쟁의 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3. 언약파 운동

 163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군주들이 강화하려고 하는 감독제를 추방하고 장로교회를 복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런 움직임의 지도자들로 Alexander Henderson과 Samuel Rutherford을 거론해야 한다. 이들은 1643년의 영국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스코틀랜드 감독관으로 참석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보통 제 2의 종교 개혁가로 알려져 있는 사무엘 핸더슨은 원래 감독제도를 선호했지만,  Robert Bruce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고서는 감독제는 비성경적이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 1638.2.28. Grey Friar Church)을 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시민 및 종교적 협약 문서)의 출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러더포드는 낙스와  멜빌등의 전통에 따라서 시민 불복종 사상을 발전시켰다.

        러더포드는 법, 왕(Lex Rex)책에서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의 이중적인 계약하에 있다. 백성이 계약을 깰때에 법에 의해서 제재를 받는 것과 같이 통치자도 백성과의 계약을 깰 때는 백성도 통치자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러더포드는 당시의 군주인 찰스 1세의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군주의 통치권은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그의 사상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영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영국과 아일랜드와 함께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에 알렉산더 핸드슨이 초안하고 총회에서 인준)을 맺어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신앙을 보존하며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교리. 예배, 정치를 성경에 따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 언약은 의회의 권리를 인정하고 왕권을 제한하며 왕권을 참된 종교를 육성,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기했으며 영국에서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반대하던 청교도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바로 이언약에 충실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 교회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감독관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교회의 이름으로 소집된 종교 회의라기 보다는 종교적 현안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서 모인 종교 자문회의와 같은 성격을 가시고 있었다. 이때 스코틀랜드 대표들은 회원 자격이 아니라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럼에도 이들 대표는 그 회의가 만든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정치조례, 예배모범등에 큰 기여를 하였다. 후에 스코틀랜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만든 문서들을 장로교 신앙, 정치 그리고 예배의식의 공적 규범으로 삼았다.

        이 엄숙동맹으로 찰스 1세는 입지를 잃었고 결국은 처형되었다. 그후 크롬웰의 통치를 거쳐서 스코틀랜드는 네델란드에 가 있던 찰스 2세를 초청했는 데, 그 찰스 2세가 왕위계승을 조건으로 엄숙 동맹과 언약에 서약하였기에 장로교 편에 설 것을 기대하였다. 찰스 2세는 또한 영국의 통치자이기도 하였는 데,  찰스 2세는 장로교를 탄압하고 성공회 정책을 폈던 것이다. 배신을 당한 스코틀랜드인들은 1638년의 국가 언약과 1643년의 엄숙동맹과 언약을 재확인하고 찰스 2세와의 항전에 나선다. 이들을 언약도들(Covenanters)라고 부른다.

        이들 언약도들은 성경에 의하면 왕의 권세는 왕권 신수설에서 말하듯이 결코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며 제한적이며 오직 무제적 권세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언약파의 정치 사상은 조지 부케년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러더 포드에 의해서 완숙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언약도들에 대한 박해는 너무나도 잔인해서 수많은 언약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4. 언약파 운동 이후


제임스 2세의 시도- 로마 천주교 국가 지향

메리( + William of Orange- 화란 장로교도) 초청 - 개혁주의적 노선- 명예 혁명(1688)

   - Act of Toleration

   - 장로교 총회 재개(1690)


1) 카스테어스와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

  William Carstares(1649-1715)

    - William of Orange와 함께 돌아옴

    - 궁중목사로서 조언: 장로정치를 통하여 충성심을 일이키라.

    - 스코틀랜드 의회로 하여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채택

    - 감독제 폐지: “장로정치는 이나라 안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 정부 형태”

    - 의회 설득: ( 영국과 스코틀랜드)한의회, 한 왕실(1707.5.1)

    - 장로교의 분열

       -지주들의목사임명권(1710년대)-평신도의 목사 임명권(Lay Patronage Act)(1712)

         - 교회 자율권을 침해. 자유주의 신학을 확장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



2) 교회 분열과 토마스 찰머스

   Ebenezer Erskine(1680-1754)

   -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 비판; 시찰장에 의한 회중이 원치 않은 목회자 파송 비판

   - 목사 제명. 총회에서 면직(1740)

   - 분리교회( Secession Church) 창립

      - 다시 서약파와 반 서약파로 다시 분리.


 Thomas Gillespie(1708-1774)

  - 평신도 목사 임명권 거부; 본인도 파송 받은 교회 취임 거부; 총회에서의 면직

  - 구원교회(The Relief Church: 1716


Thomas Chalmers(1780-1847)

  - 그 이전의  David Hume의 사상 영향-Moderatism( 중도주의) 일어남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학장 및 교수      

  - 교회 확장 운동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장(1832)

다.   -평신도목사 임명제도거부(1832)

     -목사 추천 거부                                                                    -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1876)




교회 연합 운동

 -1847의 연합: 길레스피의 구원교회 + 어스킨의 장로교회 = 연합 장로교회

 -1900의 연합: 자유교회 +연합 장로교회= 연합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1929년의 연합: 스코틀랜드 교회와 연합 자유교회 = 스코틀랜드 교회(Church)




5장 영국 장로 교회


1. 아일랜드


북부 아일랜드에서 온 이주민들이 나중에 미국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임스 1세가 왕이 되기 수년전에 북부 아일랜드의 울스터지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 반란자들은 진압, 재산 몰수

제임스 1세는 1603년에 왕이 되자 이울스터 지역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초청했는 데, 이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이 초청에 호응해 이주 해서 이 아일랜드 북부 지방을 스코틀랜드화 해버렸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지역 사람들은 Scot-Irish이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장로교 목사들이 이 새로운 이주민들 속에서 일해서 곧 힘찬 부흥이 Scot-Irish 장로주의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난관도 적지 않았다.

영국왕이었던 찰스 1세는 북부 아일랜드의 장로회주의에 말살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박해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본래 북부 아일랜드의 원주민들은 로마 카톨릭 교인들이었는 데, 이들은 새로운 이주민들의 유입에 분개해서 개신교도들인 이주민들을 많이 살해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장로교 목사는 살해되거나 추방되다. 후에 아일랜드에 간 자국의 이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는 상당한 군대를 파송하였다. 사실 울스터에 있는 장로교 목사는 군대에 있는 장로교 목사뿐이었다. 그래서 각 연대는 교회로 조직되었고 이교회에 군목과 군인 장로가 있어서 활동을 했다. 1642년에는 아일랜드에서는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조직되었고 1660대에 접어들어서는 이 울스터에 80여개 장로 교회들과 10만명의 장로교 회중들이 있었다.

        크롬웰의 통치후에 왕좌에 오른 찰스 2세 역시 아일랜드에서 장로주의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였다. 이런 박해속에서 북부 아일랜드의 장로교 목사들은 신실하고도 용감하게 장로교주의를 수호하였던 것이다. 찰스 2세후에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자신이 카톨릭 신자였는 데, 장로교회주의자들은 감독주의자들로 바꾸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대신에 제임스2세는 군대의 군목을 장로교인들에서 로마 카톨릭 신자로 교채하였다.

그런가하면, 로마카톨릭과 장로교를 포함한 모든 비감독주의 사람들에게 신앙의자유를 허용해준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군대를 로마 카톨릭 교인들 책임하에 두려했는 데, 이런 시도는 그가 신교도들은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낳게 되었다.

- 카톨릭 교도 안트림의 지휘하의 정부군의 울스터의 데리시의 입성시의 장로교도들의 출입문 봉쇄

- 영웅적인 항쟁.


1688년의 명예혁명. - 제임스 2세의 퇴위와 신교도 William of Orange의 계승

    -  Boyne 전쟁- 울스터의 장회주의 구출.

오렌지공 윌리엄은 장로굦주의에 충실하여서 그의 치하에서 북부 아일랜드의 장로회주의는 번성.        .                                                                       


      북부 아일랜드의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회 기초를 견고하게 했다.

찰스 2세 치하에서의 박해- 많은 장로교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683년의 미국에 정착한  Scot-Irish 이주민들의 목회자를 요청

 - 아일랜드의 Laggan 노회의 Rev. Francis Makemie(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칭함) 목사 파송.                                       

계속된 부북 아일랜드에서 심화된 불만- 계속적인 Scot-Irish들의 미국내 유입.


그리스도 신성에 관한 저급한 주장들(Arianism, Unitarianism)

- Sucession Synod( 새로운 교리적 주장에 반대)

- Synod of Ulster(  구교회로서 사역자들에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 촉구)

- 그러나 이 두 대회는 1840년에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Ireland로 연합 - 북부 아일랜드에서 강력한 장로교주의로의 발전에 크게 도움읻

- 이후에 외지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섬.


북부 아일랜드교회는 보수적이었으며 가장 완전한 정통에 서있었다.

2. 잉글랜드


Puritanism-  장로교인들이  이운동에서 중요한 역할 담당.

 - W. Tyndale의 성경번역(  11년 후에 순교.)


1588년 엘리자베스1세의 왕위계승


  * 청교도-



그러나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영국 국가 교회에서 이탈할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 청교도들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로교인들이었다.

 -교회가 감독에 의해서 다스려 지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장로교적인 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다.

- 장로교 지도자 Thomas Cartwright(켐브지 교수) 면직


엘리자베스 사망(1603)하자 제임스 6세(제임스 1세)가 왕위 계승

- 통치기간중에서 청교도들로 하여금 영국 교회의 반 카톨릭적 의식(the semi-Catholic ritualof the English Church)을 준수하도록 노력을 경주


찰스1세는 부친 제임스 1세보다 더 청교도 핍박

- 피신한 청교도들은 미국 Plymouth에 식민지; 메사추세스에도 식민지


찰스(찰스 1세) 학정은 찰스와 크롬웰이 영도하는 의회군과의 대결- 찰스 1세의 처형(1649)


청교도내의 장로교파가 국민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

- 1642년 의회는 감독제를 폐지하고 웨스터민스터 회의(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nes) 소집(1643)

- Covenant Theology

출처 : 온누리 선교회
글쓴이 : ls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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