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탕자문명의 가치관 [누가복음 15장 11-12절]|

작은샘 큰물줄기 2017. 8. 10. 17:51


 

"탕자문명의 가치관"

누가복음 15장 11-12절

석원태 원로목사

  사람은 어디로 보든지 사람입니다. 사람이 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은 동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기계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말입니다. 당연한 이치이며 쉽사리 긍정이 되는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사람의 사람 된 가치를 평가할 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돈이라는 새로운 측정기를 사용함으로, 돈에 의하여 사람의 사람된 가치가 좌우되는 것으로 전락되어 가는 현상입니다. 유물론적 가치관입니다.
  그런가하면 현대인은 강철로 만들어진 새로운 신(神)인 기계를 섬기는 벅찬 고역으로 그 고귀한 인간성을 송두리째 강탈당하고 있는, 기계의 종노릇을 하는 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생의 가치관에 대한 오산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위대한 탕자비유에서도 탕자가 보았던 잘못된 인생의 가치관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비유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된 한 형제요, 한 족속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기업이십니다. 말라기 2장 10절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졌고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아들은 협의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눅 15:1), 광의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하였습니다(롬 3:29).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는 실로 평화롭고 만족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둘째 아들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은 불행한 사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의 소행을 가리켜서 '탕자'라고 합니다.
  문명이란 보통 사람의 지혜가 열려 정신적, 물질적 생활이 풍부하고 편리하게 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적인 인간 문명사(人間 文明史)를 성경적으로 엄격하게 말할 때 '탕자 문명사(蕩子 文明史)'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탕자 문명의 가치관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가치의 척도를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게 두는 잘못에서 나온 문명입니다.
  누가복음 15장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은 물질적으로 볼 때, 신명기 21장 17절대로 유대인의 재산 분배법에 의한 것입니다. 즉 장자는 두 몫, 차자들은 그 나머지를 동일하게 나누는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천품,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본성을 말함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를 여기에다 국한시킬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비유 전체가 주는 교훈과 연관시켜 보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얼핏 볼 때 둘째 아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정당한 권리 주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의 요구는 '자기'라고 하는 것을 기준하고 움직였던 잘못된 가치관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Ⅰ. 가치의 척도를 자율주의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의 가치관의 척도는 아버지(하나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존재 근원은 아버지입니다. 그의 존재 시작이 아버지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의 의의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의 존재 목적이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 분깃은 본래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 분깃 자체는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깃 그것보다는 아버지요,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성립이 분깃 그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분깃은 전혀 2차적인 것입니다. 분깃이 있어서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은 다음에 분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인 관계에서 볼 때 우선적이요, 시간적인 관계에서 볼 때도 우선적이요, 가치관에서 볼 때도 우선적입니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은 '내게'라고 함으로 모든 사고방식을 철두철미하게 자기로부터 출발시키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선행되거나 전제되지 않았습니다. 돌아올 분깃이 그에게 선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율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자율주의적인 사상은 성경 역사에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하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근거하고 자율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취하여 계약을 파괴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자율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동생 아벨을 쳐 죽임으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율주의의 길을 걸은 사람입니다. 이런 길을 성경은 「화 받을 길」(유 1:11)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6장 2절에 노아 시대의 사람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아내를 삼아 자율주의적인 혼합사상을 잉태함으로 깊어가는 죄악상을 이루어 마침내 홍수 심판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1장 1절∼9절에 노아의 후손인 니므롯 자손들이 시날 평지에서 자율주의적인 바벨탑 공사를 시공하였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율주의적인 과학 공사 진행을 하나님은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서 에서는 장자 명분을 물질적인 팥죽 한 그릇에 흥정함으로 자율사상의 첨단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울면서 이 축복을 회복코자 하였으나 영원히 가난한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이 자율주의 사상이 명성을 떨치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삿 21:25). 그 결과 무법과 혼란과 침노와 전쟁, 약탈과 방화와 음란과 동족상쟁의 비극이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열왕시대에 와서 여로보암은 자율주의 사상의 대표자였고 모든 죄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우고 산당을 짓고 보통 백성들로 마구 제사장을 세우고 절기를 정하였습니다(왕상 12:28∼33). 그는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자율주의 사상의 표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존하여 산다고 하는 아버지 의존적 사상이 전혀 없는 탕자의 가치관은 비단 구약에서뿐만 아니고 신약 도처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이것은 교회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초기에 나타난 아리우스의 이단운동, 노스틱주의(동양의 이원론+헬라철학+기독교), 중세 로마가톨릭, 독일을 중심한 근세의 합리주의 운동(자유주의 신학), 현대에 이르러 위기신학, 비신화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해방신학, 67년도 고백서 등은 자율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목록들입니다.
  기독교 문명권 외는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고대 헬라 사상, 중세 스콜라 철학, 하나님을 떠난 문예부흥, 계몽주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등등의 자율주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그 가치의 척도(기준)를 자기(인간 자신)에게 둔 것입니다. 이것이 탕자 문명 가치관의 오류입니다.
  탕자문명은 절대자가 선행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전제되지 않은 아들만의 절대가 바로 탕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오직 '내게 돌아올'것 만을 생각하는, '나'중심의 사상이 탕자문명입니다.

  Ⅱ. 가치의 척도를 분깃 그 자체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자녀의 신분을 버린 데서 기인된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윤리보다, 즉 아버지보다 돈을 우선적인 지위에 놓았습니다. 그는 가치의 기준을 돈에다가 두었습니다. 행복의 표준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고상한 윤리적인 입장이나 정신적인 차원에서 찾지 않고 순수한 외부적인 조건, 2차적인 조건에서 찾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복에 있어서 돈보다 우선적인 것은 건강이라고 합니다. 건강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신령한 평안, 즉 영적인 건강이라고 합니다. 에덴의 비극이 외부적인 조건의 결여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소유한 외부적인 조건은 100% 만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에서 여호와의 말씀의 지배가 떠날 때 캄캄하였습니다. 언약계시의존 사상이 저들에게서 떠났을 때 저들은 두려웠습니다. 떨렸습니다. 공허 속에서 허덕이고 도망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인간이 모든 행복의 조건을 유물주의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만근(輓近) 백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영국 런던 광장에서 행한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바로 이 점에서 성공을 거둔 셈이 됩니다. 기계 앞에서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긴 영세 시민들을 향하여 배고픈 사람에게 빵과 물이 필요하다고 외친 저들의 열띤 외침은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입니다. 저들은 모든 행복의 일차적인 근원을 물질에 두고 있습니다. 가치의 척도를 잘못 두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공산권 내의 유물주의적인 경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자유진영 내에도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물질의 주인이라는 사상이 없으면 자본주의 그 자체는 역시 유물주의와 같은 지점에 도달합니다. 돈 그 자체가 모든 해결의 실마리라고 생각한다고 볼 때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형태와 방법상의 차이 뿐입니다. 이 두 세력이 꼭 같이 통하는 것은 돈 만능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새로운 경제정책, 새로운 사회제도, 새로운 교육제도, 새로운 정책 수립, 새로운 개발 등 전혀 외부적인 조건에다가 인간의 평화나 행복의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탕자문명이 내건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덴마크 같은 나라는 지상의 낙원이라고 할 만큼 소비자의 경제성이 좋습니다. 산업이 풍부합니다. 생활수준이 높습니다. 아름다운 공원과 사회보장제도 등 모든 것이 완전에 가깝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단연 수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이 결코 외부적이 조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불행은 아버지를 떠나는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심령의 내부적인 붕괴, 하나님이 없는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의 이 둘째 아들의 의지는 돈입니다. 감정은 돈입니다. 힘은 돈입니다. 그의 소망도, 포부도, 꿈도 모두 돈입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돈뿐입니다. 그 마음의 지배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돈입니다. 그에게 돌아올 분깃 이것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깃 그 자체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서도 안 됩니다. 분깃 그 자체가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분깃 그것으로 관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Ⅲ. 그는 아버지 밖에서 자유하고 싶어 한 자만자였습니다.

  그는 선의 척도를 자기에게다가 두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모든 척도를 아버지에게 두는 것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자체가 의심이 났습니다. 절대 의존할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보다는 마귀의 말이 들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졌습니다. 아버지의 관리가 마땅치 못하고 아버지의 보호가 싫어졌습니다.
  자기가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아버지 없는 데서 그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불신앙의 자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의지를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내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권리행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올 분깃은 물질 그것이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아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속에 생긴 교만, 자만을 따라 아버지를 떠나 머나먼 곳으로 방탕의 여행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탕자문명의 가치관은 잘못되었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인본주의적 자율사상에서 탕자문명이 출발을 보게 된 것입니다. 탕자는 '분깃', 즉 '돈' 그 자체에다가 가치의 기준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마침내 아버지와 대결하여 아버지와 같이 되어 보고픈 무서운 불신앙의 교만으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탕자문명의 횡포가 지금 극한 상황에까지 다다랐습니다. 이 탕자문명의 잘못된 가치관은 저 에덴동산의 주인 아담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시대 시대마다 각이한 내용과 형태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형태와 방법은 많이많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똑똑히 보십시오. 창세기 3장의 경우와 누가복음 15장의 경우는 꼭 같습니다.
  여러분! 어떤 물건에 가치가 부여될 때 그것은 사실상 제한적이요, 유한적인 것입니다. 도무지 가치의 측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될 때 그것은 분명히 이 세상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가치 척도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아버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 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자존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소생입니다. 그러므로 천하를 주고도 우리의 목숨을 바꿀 수 없는 정도의 것입니다.
  가치 측정 이상의 하나님의 소생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분명히 외적인 그 무엇으로, 분깃 그 자체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한 것입니다.
  인생에게 돌아올 분깃! 그것은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 아 멘 -

석원태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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