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스크랩] Re:히브리서6:1-8 앞뒤 문맥을 고려한 홀리죠이님의 해석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9. 16:46

  1.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2. 하나님의 선한 말씀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6:1-8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참으로 구구한 입장들이 개진되어 왔습니다. 최소한 다음의 여덟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이러한 여덟가지 입장에 대한 소개는 R.T.Kendall의 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책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켄달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여덟가지는 다음의 세 부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해석입니다. 6절의 “타락한”것을 이미 구원받은 자가 구원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히브리서기자의 강조를 고려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시 회개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견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저의 논의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둘째, 칼빈주의자들의 해석인데, 그 입장에 따라서 다음의 네 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1)히6:4-6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은, 참으로 회심한 자들인데, “타락하게”되는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회심한 사람은 이렇게 타락할 수가 없다.

 2)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타락하게 되어도 회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잃은 것은 아니다. 단지, 상을 받지 못할 뿐이다(이것이 R.T.캔달의 견해입니다).

 3) 이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구원얻게하는 은혜가 역사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4) 이들은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인데, 만약, 그들이 타락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이 견해는 1)과 비슷한데,다른 점은,타락한 자들은, 구원받지 않은 자로 “간주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셋째, 중도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중도적인 견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한 번 구원받은 자가 영원히 구원받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분명한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는 면에서 중도적입니다.

 1)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두번째 기초가 놓여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 회개를 두 번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

 2)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고 있는 중에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

 3)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이 구절들의 해석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해서 질문하신 분도 이곳 저곳에 상담을 많이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답변이 님에게 만족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염려되면서도, 제가 이해하는 이 구절에 대한 견해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많은 고민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음을 말씀드려놓고 싶습니다.

 

 먼저, 이 구절의 맥락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5장에서는 멜기세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이 마땅히 자라야 할 만큼 자라지 않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고 합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다시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6장1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합니다. 이 “버리”라는 말은 무시해라는 말이 아니고, 그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장성한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자리에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6장7-8절에서는 비유를 들어서 그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비유가 이상합니다. 두 가지 종류의 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과 두 가지 땅의 비유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도의 초보를 아는 상태에서 더욱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라는 권면에 어울리려면 땅에 씨가 뿌려지는 상태에서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도록 힘쓰는 식의 비유가 어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히브리서기자는 비유을 아주 이상한 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땅이 두 군데 있습니다. 두 군데 “모두” 비가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한 땅에는 채소가 나오고, 다른 땅에는 “엉겅퀴”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이 비유는, 채소를 내는 것이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시와 엉컹퀴를 내는 경우는, 채소를 내는 땅과 “똑같이” 비를 맞게 되는데도, 채소를 내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히브리서6장4-6절에서 어떤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6절의 “타락한 자”입니다. 

 

이런 전체 맥락을 참고해서  6장4-6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지금 비가 똑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땅에서는 채소가 나오고, 다른 땅에서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4-6절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7-8절의 “비”는, 4-6절의 표현을 빌자면,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 “성령에 참예하는 것”,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는 것”,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7-8절에서 말하는 “비”입니다. 이런 “비”를 맞는데도 어떤 땅은 채소를 내고 어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논지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입니다. “채소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 맞고도 “채소”를 내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이 있다고 합니다. “비”를 맞아도 헛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가 전혀 효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채소를 내게 하는 “비”가 오히려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아도,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일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한번 비췸을 받는 것”,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 “성령에 참예하는 것”,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는 것”,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 등등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번 비췸을 얻고서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가시와 엉겅퀴”를 낼 수 있겠습니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맥락을 참고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혹은 체험적인 면에서 해석하게 되면서 자신의 욕망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저의 해석은 조나단 에드워드나 메튜 핸리 등의 청교도들의 해석을 따릅니다. 이들의 해석이 가장 맥락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존오웬이나 스펄존의 해석도 물론 이들과 일치됩니다. 그것은 곧, “한번 비췸을 받는 것”…..등등의 “은사”, 혹은 “비”가 공통의 은총으로 내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런 “비”, 그런 “은사”가 “구원에 이르도록 효과적으로 역사하지 않아서” 결국은 구원에 이르게 되지 못하게 되는 “은사”, “체험”, “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체험이 있다고도 합니다. 결국,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히브리서의 기자는, 거짓된 체험에 만족하지 말고, 참된 체험을 통해서 “채소”를 맺는데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곧 열매를 맺는 삶, 거짓된 믿음에 만족하지 말고, 선행에까지 이르는 삶을 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래의 11절에서 히브리기자가 권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6장4-6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체험들이 가짜체험을 한 사람들이 타락한 것, 그래서 다시는 회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쩜, 체험위주의 현대신학과 교회에 있어서 용납하기 어려운 견해일 지도 모릅니다. 체험이 기준이 된다면, 모두가 참된 구원에 이른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취향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보다는, 말씀의 맥락과 취지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교회의 취향에 맞도록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성경말씀에 맞도록 현대교회를 인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구절이 갖는 의미는 굉장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저의 해석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이 있으시다면,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적 정서”라는 책을 꼭 읽어보십시오.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엄청난, 진짜 엄청난, 가짜체험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진짜체험들을 구분시켜주는 견해를 구경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몇 개의 견해 중에서 저의 견해가 어떤 것에 해당되는 지는 님께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없이 다른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견해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님의 취향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단지,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그 말씀을 통해서 님에게 풍성하게 주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홀리죠이.

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holy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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