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스크랩] 요1서 2장 27절의 올바른 해석은?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9. 16:46

요1서 2장 27절의 올바른 해석은? (grace님)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pablo님의 글'

“제가 아는 몇몇 외국 형제들, 그분들 교단배경은 역사적으로 재세례파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근본주의 침례교단입니다. 말씀묵상, 경건생활, 전도열심 등등, 나무랄 데가 없어 보입니다만 신비주의자들은 아니고,... 성경해석에 문제가 더러더러 보였는데, 바로 윗 본문에서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성경 해석하는 것은 자신들 속에 계신 성령이 가르치심으로 옳다고 고집하지요. 난감해집니다.^^그러면 논쟁이 되곤 했는데... 여기서도 다루고 있군요. 성경 전체 문맥 속에서 바르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제각기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면서 다른 행동 다른 말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해석하기가 간단치 않은데,..(pablo)"

 

'pablo님의 글'에 이어서

 

파블로님이 말씀하는 그런 분들을 저도 만나보았습니다. 대개 그들은 제도교회를 비판합니다. 제도교회에는 성령이 없다 합니다. 심지어 제도교회는 바벨론 음녀교회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본문이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이 본문이고요.

그런데 대부분 형제들이 말씀하고 있지만 사도요한이 서신서를 통해 집중한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사도요한은 그 당시 사도적교회(제도교회)를 비판하는 비판자들 때문에 이 서신을 썼고 그노시스가(성경 위의 특별한 지식) 아니라 제도교회의 가르침에 굳게 서도록 하게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사적 교회의 가르침이나 지도를 무시하는 많은 경향들이 바로 ‘성령과 성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주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할 점을 놓치고는 합니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정통 입장에서 벗어나려하지 않지만 정작 우리의 성향은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유혹을 마음속에 감추고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추호의 여지가 없이 이 본문이 의도하는 핵심교훈은 ‘기름부음’도 아니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다’하는 그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요한 사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 반대의 교훈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놓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심지어 성경을 자주 반대로 곡해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문자적으로, 자의적으로, 육욕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의도하는 교훈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하는 말씀입니다. 결코 '마음대로 하라'도 '자유를 누려라'도 아닌 것입니다. 

 

장로교헌법에는 제일 먼저 양심의 자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자유는 성경에서의 자유, 하나님에게서의 자유, 교회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해하지 말아야하는 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아무도, 눈곱만큼도 '배울 필요'가 없다고 본문을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기름부음' 밖에 있는 자들이 복음진리에 대해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 내에 있는 헬라주의자들(인본주의)과 유대주의자들(율법주의)이 그러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기름부음’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그 '기름부음'을 통해, ‘기름부음’ 안에서 계속 배우는 교회이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아마 분명 '현재'시제로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고 되어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는 동안 결코 '하산해도 되는=도를 완전히 깨우치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과 '사도적 교회의 제도및 신앙'과 별개의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 눈곱만큼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직접 보기를 원합니까? 그런 기대는 신앙도 아니고 어림없는 망상이며 영적교만일 뿐입니다.

여기 이 본문에 보면 '거한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고 또 그 안에서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거한다'는 말은 대단히 소중한 용어입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거함'은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에 적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에 거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임시적인 '계시'나 '지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모든 계시는 100%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눈곱만큼도 추가적인 '진리' 또는 하나님의 새로운 '임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 체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오순절의 기름부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사도적 교회에 벌써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진리의 지식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거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따로 알아야하고 따로 배워야하고 따로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과 '복음 외에 다른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도적 교회가 간직한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실상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어쩌면 사필귀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참된 기름부음이 없었고 그러기에 끊임없이 '다른 영'들을 말하며 바다의 파도가 품어내는 거품처럼 요동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공교한 말로 '기름부음'안에 있는 교회를 폄하하는 시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이와 같은 유혹에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를 잘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대적자들은 항상 어떤 '영'과 '특별한 지식'을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도 입술로는 '성령'과 '성경'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 자신의 공교한 '체험'과 '내적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성령론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임마누엘과 동격인 기름부음이 있다 것은 구속사적 경륜을 말하려면 꼭 알아야할 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서정이 단번에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적 경륜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지도와 간섭은 신자 각자에게 교회의 구속사적 기름부음과 함께 계속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고 단번에 그의 교회를 구속적 행위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공효는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완전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세우게 하는 성령의 기름부음도 단번에 허락된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구속사적 '기름부음'은 바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부으심이고 우리는 이 '기름부음'이 교회를 단번에 세우게 하는 영원한 성령의 거하심임을 믿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기름부음'은 이미 그리고 완전히 교회에 주어진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단번에 구속적 공효를 이루신 것처럼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성령의 '기름부음'도 단번에 완전히 교회에 부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는 바로 오순절에 임하여 오신 '성령의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교회는 이 '기름부음'안에 세워졌고 다른 기름부음이 필요한 제도가 아님이 입증되어졌습니다. 교회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바로 그 '기름부음'을 통해 계속해서 완전하게 가르침을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화'의 길이며 그리스도를 깨닫고 닮아가는 '영적 갱신'의 삶입니다.


(tiger)님의 글

 “요한일서는 특별히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강조하면서 이단적인 가르침과 미혹에 대한 배경으로부터의 경계를 위해 쓰여진 책으로 특히 2:27은 전후 문맥을 볼 때 그리스도의 위격과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며 믿는이들이 처음에 보았고 받았던 그 기름부음에 따라 계속 그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계속적인 기름부음이 관건입니다. 다른 이단적인 가르침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처음에 받았던 참된 기름부음에 순종할 때 그 거짓을 구별할 수 있고 내적으로 모든 것을 알게 해줍니다."


(tiger)님의 글에 이어서...

신자가 일상에서 그리고 각자 받는 성령의 체험과 선물은 '기름부음'을 더하거나 혹은 '계속 기름부음'을 받는 것과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일 '기름부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처럼 단회적인 구속사건으로 보지 않으면 잘못된 신비주의를 떨쳐내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의도든 아니던 간에 '다른 기름부음'은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의 '기름부음' 안에 세워졌습니다.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은 오순절에 부어진 기름부음이고 그것은 계속적인 체험이나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임마누엘과 같이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는 '성령의 영원한 거하심'임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그리할 때에 헛된 신비주의나 직통계시나 체험추구의 헛된 유혹으로부터 교회가 벗어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오직 예수의 구속의 공효만으로 구원을 누립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을 위해 필요한 공효를 구하지 않습니다. 마찬 가지로 성령의 기름부음도 '주께 받은 바 오순절의 기름부음'외에 다른 기름부음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교회와 함께 하는 '보혜사'로 교회 가운데 '거하심'을 믿어야만 할 것입니다.


(썬쉬리)님의 글

“오순절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중생한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만큼, 즉 말씀을 통해 주님을 붙들기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만큼,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만큼 더욱 충만해진다고 봅니다. 이것이 '기름부음'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 즉 '기름부음'으로 인해 죄로 말미암아 거짓된 심령이 녹아질 것이고, 또한 이단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게 될 것이니까요... '기름 부으심'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기록된 '말씀'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령의 충만'이라고 봅니다.”

 

(썬쉬리)님의 글에 이어서


이것은 성령론의 민감한 식별에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구속의 공효를 힘입어 살아갑니다. 예수의 피 뿌림과 씻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의 이와 같은 구속의 공효일 뿐입니다.

왜 개혁교회가 로마교황주의 교회를 이단적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의 구속적 공효를 계속, 반복해서 소위 로마교황주의 교회를 통해 받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교황주의 교회의 제사관이며 직분관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태도를 그리스도 유일성을 침범하는 신성모독으로 정죄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모든 은사운동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오순절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그 기름 부으심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의 은사'를 짐짓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영적 궤휼'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교황주의 교회가 지난 세기에 왜 놀라울 정도로 성경(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또 은사운동에 열의를 보이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은 광명의 천사로 연출하는 사단의 전략이며 온갖 '적그리스도'와 온갖 '거짓 영'들로 말세를 가름하는 사단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창설되고 혹은 참된 교회로 갱신됨에 있어 더 이상의 어떤 영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체의 '다른 영'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우리가 직접 체험하려고 어떤 '자의적인 영'도 추구하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교회 안에 이미 그리고 완전히 '거하시는 성령'께서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각양 그리고 모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흘러내리심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보좌에 좌정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거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임하신 오순절의 '기름부음'에서 모든 은사와 충만이 계속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로마교황주의교회가 '계시'와 '은사'의 계속적 부음을 주장하는 유혹에서 승리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과 계시에 대한 지식의 기초입니다. 교회를 창설하신 오순절의 '기름부음'과 신자 각자가 지속적으로 받고 누리고 열망해야할 성령의 '은사와 충만'은 다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주는 진리의 기초가 되는 지식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은 교회 가운데 '이미' 그리고 '완전히' '거하십니다'. 이것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출처 : 포커스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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