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스크랩]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요? (고전 3:1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9. 16:45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요?

(고전 3:15)



             바른지식/바른신앙/바른교회 하나님을 바로아는 지식


 1. 도입 

  한국교회 현장에서 설교를 통해 순종의 필요성과 열심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종종 상기 본문에 근거해 '부끄러운 구원'이란 주제가 제기되곤 한다. 고전 3:15은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니라"고 기술함으로 문자적으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실은 본문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내용인 '공력'(the quality of each man's work/NIV)이 그리스도의 심판 날에 불로 상징되는 최종 평가를 받게 되는데(고후 5:10), 이때 저들의 수고와 능력과 열심의 정도가 금/은/보석의 가치로 판정 받은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게 됨으로 상대적으로 '자랑스런 구원'이 될 것이며(고전 3:12-14절), 나무/풀/짚으로 평가받은 자들은 행한 공력이 불에 타 전무하게 됨으로 해(害)를 받게 돼 마치 불 속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해 뛰쳐나온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15절).

  

과연 그럴까? 본문의 금/은/보석과 나무/풀/짚이 의미하는 바가 이처럼 자랑스런 구원과 부끄러운 구원을 상대적으로 구분해 진술하는 내용일까? 다시 말해 본문의 내용이 행함과 수고와 열심의 정도에 따른 구원의 상태와 성격 여부를 가름하는 증거본문으로 기능하는 것일까?

  2. 전개

본문의 문맥적 배경

  본 주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적어도 본문을 담고 있는 앞의 문맥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할 줄 안다(고전 3:1-9).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태는 유아적이며 동시에 육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사실은 영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신적이며 외적인 것에 치중한 나머지 교회공동체 내에서 미숙한 분별력과 판단으로 인한 교회원 상호간에 상당한 시기와 분쟁이 야기되었고 이로 인해 무리를 지어 편당을 짓곤 했다.

이런 저들의 미숙함을 일깨우면서 고린도서 기자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동역자에 불과하고 교회의 모든 일을 근본적으로 관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사실을 강변함으로 편당에 따른 분쟁과 다툼을 무마시키려고 애썼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특별히 농사비유를 인용해 교회지도자들 간의 목회사역의 동역성(fellowship of workers)과 통일성을 강조해 설명한다. 즉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고 말이다. 이처럼 저자는 편당으로 인해 분란과 다툼으로 어지러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교회지도자들의 동역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한편, 동시에 저들 지도자들의 사역의 중요성을 '건축물 비유'를 통해 계속 경계시키고 있는 것이다(고전 3:10-12). 이런 관점에서 건축물 비유 또한 그 대상이 일차적으로 교회지도자들의 목회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건축물 비유에 언급된 금/은/보석과 나무/풀/짚은 단순히 상징과 비유 이상의 당시 실제적인 건축 자재들로서 가연성(可燃性)과 불가연성(不可燃性)의 재료들을 의도성을 가지고 차별적으로 적용해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본 건축물 비유가 의도하는바 교회 속에 지도자들을 세우신 주된 목적은 교회의 초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해 주님의 마음에 합한 바른 천상적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목회적 관심과 은사를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본 건축물 비유의 취지

  이 과정에서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란 질문이 제기된다. 바로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본 건축물 비유는 목회자들의 역량과 능력과 수고와 열심의 정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자재들로 건축할 것인가에 보다 깊은 강조점을 제시한다.

결국 본 건축물 비유가 시사하는 바는 '교회를 이루는 구원의 삶'이라는 전제 하에서, 교회지도자들의 행함과 열심의 정도와 차등에 따른 구원의 '성격'을 차별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 아니다.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종말적 심판(계 20:11-15)에 대비되는 성도의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과 그에 따른 '질적 삶의 내용'을 기술한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이루는 구원의 삶의 내용이 얼마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부합된 본질을 추구하는 목회와 신앙생활이었는가에 대한 진리성과 진정성의 문제 말이다. 요한계시록의 증언이 이런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 사람들은 여자(세상/세속주의)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이런 관점에서 본 건축물 비유는 목회자들은 물론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동의 과제요 공동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부끄러운 구원'의 본의

  따라서 본 건축물 비유가 시사하는 바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위해 힘에 부치도록 열심과 능력과 수고에 진력하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바른 '재료'(말씀의 본질과 본의)들을 엄선해 사용함으로 교회를 이루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의미로 곧 진리성에 근거한 진정성의 고취에 대한 강력한 권면으로 이해해야 할 줄 안다.

 "그가 혹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본질에 접촉된 말씀으로),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사랑이 동기유발 된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교회공동체)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를 위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부단히 연구하고 추구함으로 총체적인 성경 계시관에 접촉된 데서 가능한 바른 신앙관과 바른 교회관의 정립을 부단히 모색해 나가란 경종과 경계의 말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 건축물 비유의 취지를 지나치게 발전시켜 금/은/보석에 해당되는 판정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상급이 보장돼 있고(14절), 나무/풀/짚에 해당되는 자들은 해(害) 곧 책망을 받게 될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본문의 취지를 벗어난 논리의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구원의 은혜는 믿음의 순종을 당위적으로 요구한다. 이때의 순종은 맹목적이고 강요된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된 데서 표출된 자율적 순종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 곧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석된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와 절대 가치로 붙들고 살아가는 전인적인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접촉된 데서 이런 순종의 삶이 가능하게 된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이는 실제 상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이다(고후 5:14상). 유대교의 율법 앞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향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바가 이렇다(마 11:30).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로 사랑의 빚 진자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를 구속의 참 자유라는 관점에서 적극 수행해야 한다. 무익한 종의 자원하는 열심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거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눅 17:10).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15절)는 표현은 구원의 상태나 성격을 나타내는 '부끄러운 구원'이란 의미가 아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자의적 숭배신앙관으로 일관함으로 본질에서 이탈된 왜곡되고 자기기만적인 '과정의 삶'을 가리킨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간주한다(롬 10:2-3, 마 7:21-23). 그러나 본인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착각한 나머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과 진위성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특별히 NIV 성경은 본 절과 관련해 '불 속을 지나 가까스로 도망친 사람처럼 구원을 받는 것'(....he himself will be saved, but only as one escaping through the flame)으로 기술한다. 이는 구원의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명백히 설명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 숭배신앙을 좇아 교회를 이루고 섬김으로 사실상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관점을 암시해 준다. 이런 상황은 아슬아슬한 구원의 의미를 담고는 있지만 문맥상 구원의 성격이나 상태 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미 보증된 종말적 구원에 이르는 '과정'의 삶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된 표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만일 이런 식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성도가 있다고 가정할 때, 부끄럽고 염치없는 구원이란 관점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차원에서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더욱 찬미하는 가운데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지 않겠는가(계 5:7-13). 이것이 구원의 은혜에 정상적으로 접촉된 성도의 합당한 반응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엡 1:6-14). 

  성경은 이처럼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극한 경우를 한 편 강도의 구원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시해 준다.(눅 23:40-43). 복음서에서 한결 같이 기술하고 있는 한 편 강도의 구원사건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결코 부끄러운 구원과 염치없는 구원의 전형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편 강도의 구원사건을 통해 적극 강조한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의 선행과 업적으로 획득하거나 보상받을 수 있다면 한 편 강도의 구원은 물론 율법 앞에서 철저히 죄인 된 인류는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불가할 뿐이다(롬 3:10-12, 20, 23, 28절). 이처럼 성경은 행위구원의 가능성을 철저히 불식시키면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죄사함/구원)이 율법(자력/선행)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음을 강변한다(갈 2:21).

'부끄러운 구원'이란 표현의 부당함

  이런 관점에서

첫째, 부끄러운 구원이나 염치없는 구원이란 표현은 자칫 구원의 근거를 사람의 행위에서 찾는 듯한 왜곡된 인상을 줄 수 있다. 건축물 비유 본문에서 금/은/보석으로 판정된 자는 상을 받음으로 자랑스런 구원으로 평가되고, 나무/풀/짚으로 판정된 자는 해를 받음으로 부끄러운 구원에 이른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관점과 용례는 구원을 인간의 행위여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시킨 표현으로 성경이 말하는 총체적인 구원론적 관점과는 상치될 뿐이다. 이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처사다.

왜냐하면 율법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님의 순종과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이루어 주셨는데(롬 8:3-4) 사람의 힘과 능으로 율법의 요구를 어느 정도라도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의 구속을 통한 속죄사건은 무의미하게 된다. 오히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도 있을 수 없다고 인간의 죄인 됨을 적극 고발한다(롬 3:10-12).

선지자들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의 부정함을 지적하며 사람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기술한다(사 64:6). 이상의 논증으로 보건대 '부끄러운 구원'이란 용례를 자칫 인간의 자력구원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리한 시도로 보인다. 어떤 경우에도 성경은 인간의 행위구원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원은 창세전에 수립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기원에 근거한 절대 주권적인 약정 행위로서 그 성격과 정체성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존귀한 천상적 속성을 함의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사역에 인간의 행위는 철저히 무능하고 무력할 뿐이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설파한다(롬 3:20). 그런 의미에서 '부끄러운 구원'이란 표현은 구원의 제반 천상적 정체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채, 타락한 인간의 죄악된 행위와 결부시켜 결과론적으로 설명하는 왜곡된 표현으로 오해될 수 있다. 천상적 관점이 아닌 지상적 관점에서 말이다.

  셋째, 부끄러운 구원이란 용례는 본질상 구원의 영적 의미와 가치의 무한성에 배치되는 표현이다. 성경은 구원의 영적 의미를 사중적으로 기술한다. ①죄로부터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는 구원이다. ②죄 값인 죽음과 음부의 권세로부터 해방돼 부활의 생명에로 옮겨진 구원이다. 그래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구원이다. ③죽음 후에 직면하게 될 정죄와 이로 인한 지옥형벌의 선고 심판으로부터 면제되는 구원이다. ④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부터의 구원이다.

  한편 구원의 무한한 가치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지불된 데서 찾는다. 다시 말해 구원의 가치는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와 방불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의 고별 회동을 통해 교회를 일컬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것'으로 설명한다(행 20:28).


고린도 기자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정체성을 임마누엘의 상징인 성전에 비유하면서 피로 값 주고 산 것으로 기술한다(고전 6:19-20). 교회공동체는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뜻이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이처럼 구속사적 관점과 깊이 연관된다(고전 6:20하).

  이런 관점에서 구원의 가치는 혹자의 지적대로 '예수님짜리'인 셈이다. 예수님짜리란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와 동일한 값이란 뜻으로 곧 무한 가치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부끄러운'이라는 수식어는 가당치 않다.


구원이 창세전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과 택자 사상에 근거해 기원된다는 본질적인 관점을 고려한다면 인간행위에 근거해 좌우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부끄러운 구원이란 표현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관점이며 공리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고려할 때 주님의 생명의 무한 가치와 존귀와 영광과 거룩성을 평가절하시키는 망령된 처사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넷째, 성경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요구에 미달하면 미달 할수록 구원받은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더욱 찬양하게 된다고 증언한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전무한 우리의 연약과 부족과 무능과 전적 타락을 철저히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롬 3:20). 따라서 부끄러운 구원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무한 가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가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적극 충성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부끄러운 심정을 가질망정 구원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불가하다.

오히려 연약하고 불충한 자신을 돌아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구원해 주신 사실에 감사함으로 '인생이 무엇이관대'(시 8:4, 144:3, 히 2:6-7) 이처럼 구원해 주시는 지를 감심으로 여겨 모든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된다는 것이 특별히 계시록의 관점이다. 요한은 이런 사실을 구원받은 성도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의 표상을 통해 기술한다.(계 4:10-11). 이들은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과 승리로 말미암아 교회가 누리는 천상적 축복의 향유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면서 자신들이 쓰고 있는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어 놓는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가 전혀 개입되거나 고려 될 수 없다는 반증이다. 구원은 기원상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이로 말미암는 택정과 예정사상에 철저히 근거하기 때문이다(엡 1:4-6).   

  3. 결론

  이상의 성경적 논증에 근거하면 구원의 정체성은 총론적 관점에서 철저히 천상적이며 신적 기원에 근거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부끄러운 구원'이란 용어는 본문을 통해 문자적으로 해석해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과 부족과 불충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구속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구원의 영속성과 영원성을 깨닫게 되면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뿐 아니라(엡 1:6, 12, 14절), 은혜의 은혜 됨을 더욱 송축하며 영광 돌리게 된다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겠는가(롬 11:32, 고전 15:10, 10:31, 6:19-20).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상과 해를 받는다는 의미 또한 건축물 비유란 문맥을 통해 발견할 수 있듯이 '교회를 이루는 현재적인 구원의 삶'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고 온전하게 살아갈 것에 대한 강력한 권면이요 경종의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롬 10:2-3, 마 7:21-23).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본문은 이런 사실을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고전 3:10)고 경계시키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교회를 이루는 구원의 삶의 내용(과정의 삶)인 각인의 '공력'(the quality of each man's work)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본의를 구체화시킨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출처 : 포커스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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