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설교

[스크랩] 칼끝의 방향 - (롬3:9~20)/ 옥성석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3. 17:37

칼끝의 방향 - (롬3:9~20)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복음을 기쁜소식이라고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펼치면 복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그는 직접 가지 못한다면 편지라도 써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로마서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핵심주제는 당연히 복음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주제로 한 로마서의 본론은 롬1:18절부터 시작됩니다.
내용은 '하나님의 진노'(롬1:18). 아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심판의 칼날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말하는 이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소식입니다.
축복의 보따리가 아니라, 심판의 칼날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요?

우선,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저희'라는 3인칭을 쓰고 있습니다.(롬1:20, 25, 26, 28, 32) 여기에서 '저희'는 누구를 지칭할까요?
심판의 칼날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을까요? 이방인을 겨냥하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이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을 겨냥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알만한 것' 이 혹은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단 '저희'의 대상이 '이방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2장에 와서는 '너'라는 2인칭으로 바뀝니다.(롬2:1,4,5) 이제는 심판의 칼날이 이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직접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3장에 와서는 다시 1인칭 단수로 바뀝니다.(롬3:9). 1인칭 복수입니다.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쓰는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이 바울을 성령님께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로마서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대상이 1인칭 복수에서 1인칭 단수로 바뀌었습니다.
심판의 칼날이 바울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두려워 떨며 절규합니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그의 감정은 상당히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로마교회 성도들에 대해 불만이 있었습니다. '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저렇게 사는가' '어떤 사람은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데, 저럴 수가 있느냐' 이런 불만스런 감정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깨뜨리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롬1:1~7)
그가 길이 막혀도 굳이 몇 번이나 로마에 가려고 시도한 이유도 저들을 향한 바로 이 의분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의 잘못된 신앙태도를 깨우쳐주려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자 그는 편지라도 써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펜을 들었을때는 이방인들만, 로마교회 성도들만, 유대인들만 죄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저들보다 더 추악한 죄인이 바로 바울 자신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복음의 칼날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너' '우리' 한걸음 더 나아가 '나' 이렇게 호칭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너'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을 사정없이 발가벗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악한 것, 부끄러운 부분들을 들추어내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 자존심을 참담하게 모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정사정없이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칼끝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너는 죄인이야'라는 말은 고상하게 들릴 정도로, 원색적인 표현을 쓰시면서 말입니다.

미국 L.A에 가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목회를 하다 최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후배목사들에게 충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쓰지 마십시오. 특히 죄인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가 인기를 얻는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교회에 나오려하겠습니까?
저도 어떤 말을 하면 교인들이 좋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롬3:1~8절까지를 본문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있어서 입니다. 남의 죄에 대한 지적이니, 마음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롬3:21절부터 본문을 선택하려는 유혹을 느꼈습니다. 그곳에는 듣기 좋은 말씀이 풍성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우리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우리'라는 단어는 본문을 건너뛰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9~12)
나를 향한 이 말씀의 핵심은 '모두 다 죄 아래 있다'입니다.(롬3:9) 우선 롬3:13절 이하에 보면 여러가지 죄악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되어야 정확합니다. 그런데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를 단수와 복수로 쓸 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복수로 쓸 때는 그 사람이 범하는 여러 가지 악한 행위들을 뜻합니다.
그러나 단수로 쓸 때에는 보이지 않는 죄의 실체, 죄의 세력을 뜻합니다.
여기에 '모두 다 죄 아래 있다'라는 말은 그 지배아래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죄의 권세아래 짓눌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죄의 권세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 같은 사람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숨도 못 쉬게 우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무서운 죄의 세력이 우리 배후에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이 무서운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죄는 우리 몸, 생각, 가치관, 심지어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파괴합니다.
존 헨리 조윗이라는 신학자는 이 무서운 죄의 세력에 의해 인간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어 가고 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파괴시키는 존재다. 모든 선한 힘은 죄의 파괴적인 힘에 의해 위축되고 시들어 버린다.
모든 영적인 섬세함은 죄의 저주스런 접촉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죄는 시각을 손상시켜 맹목적으로 일하도록 만든다. 죄는 청각을 손상시켜 영적 귀머거리로 만든다.
죄는 미각을 왜곡시켜 쓴 것을 단 것으로, 단 것을 쓴 것으로 혼돈시켜 버린다. 죄는 촉각을 마비시켜 사람들이 무엇을 만지고 있는 지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의 세력입니다. 죄의 세력 밑에 짓밟히는 인간이 얼마나 처참한지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3:13~15)
목구멍이 열린 무덤의 출입구와 같다면 무덤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유대나라의 무덤은 석회암을 파고 동굴을 만들어 집안 대대로 사용합니다. 때문에 무덤 문을 막는 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무덤 앞을 지나가면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목구명, 혀, 입술, 입은 마음으로 통하는 통로입니다. 결국 내 마음에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고 올바른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자신을 직시해야 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알면 그때부터 자신을 믿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예수 앞으로 나오는데 가장 필요한 조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서 철저하게 절망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하십니까?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자리, 포기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십시오.
이때 비로소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내 의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내 힘과 능력이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밖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끝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진정한 고백이 있기 바랍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영적 탄식, 절망의 통곡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며,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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