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야!” (로마서 9:14-18)
Election and Freedom
1. 모세의 경우 (Moses' Case, 15-16절)
* 선택≠ 정의, 선택= 자유
Election ≠ Justice, Election = Freedom
* 범죄에 대한 정의는 지옥
Justice = Hell on account of sin
* 선택의 자유는 선의(善意)
Freedom = Good will
2. 바로의 경우 (Pharaoh's Case, 17-18절)
*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God hardened Pharaoh
*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 현시
Demonstration of God's power and name
* 버려두심은 하나님의 심판
Reprobation is God's judgment
3. 우리의 경우 (Our Case)
* 선택은 우리의 놀라움
Divine election is our surprise
* 자격과 상관없는 사랑
Divine love regardless of our merits
* 넉넉한 품으로 자녀를 품자
Let's embrace our children in our bosom
“내 마음이야!” (로마서 9:14-18)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 유독 이삭의 자녀들만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이 태속에 있을 때에 장자 에서는 버리시고 차자 야곱은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바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이 아닌가?” 오늘 본문 14절이 그런 질문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바울은 바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이 왜 선택하신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다고 대답했을까요? 바울이 선택하신 하나님은 불공평하시지 않다고 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택 교리는 미로(labyrinth)와 같습니다. 선택 교리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mystery)입니다. 바울은 선택을 다루는 에베소 1장에서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11절)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미로와 같이 신비스러운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선택 교리에서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요?
1. 모세의 경우 (15-16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출 33:19). 바울은 이 말씀을 놓고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정의의 차원이 아니라 긍휼의 차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인류의 대표 아담 안에서 원죄도 짓고, 각자 자범죄(自犯罪)도 지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사망에는 영적인 사망, 육적인 사망, 영원한 사망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망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망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은 지옥에서 영원히 의식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죽고 죽은 후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이것이 정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사망, 육적인 사망, 영원한 사망을 당해야 할 사람들 중에 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선택하셨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이 덤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선택은 내 마음이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놓고 우리가 가타부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놀 때에 가끔씩 “내 마음이야!”라고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잔소리야? 왜 간섭해?’라는 것입니다. 변덕쟁이가 “내 마음이야!”라고 하면 그것은 변덕을 고집하겠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내 마음이야!”라고 하면 그것은 악행을 고집하겠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이 “내 마음이야!”라고 하면 불의를 고집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야!”라고 하신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분이나 불의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내 마음이야!”라는 것은 신실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마 20:1-16). 아침 일찍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주인이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정의의 차원이 아니라 선의의 차원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선한 마음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는데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고 주인에게 원망할 때에 주인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이것이 정의의 차원입니다. 주인이 먼저 온 사람에게 약속대로 지켰으니 정의롭게 행동한 것입니다. 주인은 불의한 것도 아니고 불공평한 것도 아닙니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4-15). 나중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주는 것은 주인의 선한 마음입니다. 주인의 선한 마음을 놓고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선한 분의 선한 일을 놓고 불평을 하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어떤 학교의 학생 1,000명 중에 100명에게 장학금을 500만원씩 주었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그에게 불평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가 장학금을 주느냐 안 주느냐 하는 것은 그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장학금을 안 준다고 해서 누구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장학금을 주어야 할 의무나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 것은 그의 선한 뜻입니다. 그가 장학금을 준 것은 정의의 차원이 아니라 선의(善意)의 차원, 호의(好意)의 차원입니다.
인간이 원한다고 하나님이 일부 인간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달음박질한다고 하나님이 일부 인간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노력과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의이고 호의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거나 불의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 바로의 경우 (17-18절)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출 9:16).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의 땅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에 10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요즈음 돼지 독감으로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돼지 독감 정도로 온 세상이 떨고 있는데 바로는 돼지 독감보다 몇 백 배 더 심한 재앙을 여러 번 당해도 완악했습니다. 바로는 항복했다가도 숨 돌릴 만하면 다시 완악해졌습니다(출 7:13; 8:15, 32; 9:34).
놀라운 것은 바로가 완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출 4:21; 7:3; 9:12; 10:1, 20, 27; 11:10; 14:4, 8). 본문 18절에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을 두고 “내 마음이야!”라고 하신 셈입니다.
하나님이 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까? 17절 말씀대로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가 완악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으니 계속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1) 물이 피가 되는 재앙, 2) 개구리 떼가 몰려오는 재앙, 3)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 4) 파리 떼가 가득한 재앙, 5) 가축이 죽는 재앙, 6) 악성 종기가 생기는 재앙, 7) 우박이 내리는 재앙, 8) 메뚜기가 땅을 덮는 재앙, 9) 흑암이 땅을 가리는 재앙, 10) 장자가 죽는 재앙.
바로가 완악한 탓에 하나님이 계속 재앙을 내리시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만큼 강력하게 반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온 땅에 있는 사람들이 “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와, 여호와는 대단한 신이야!” 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시기 위해서 바로를 더욱 더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 그럴 수 있는가?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 마음이야!”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일부를 선택(election) 하시고 일부를 유기(遺棄, reprobation) 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죄를 즐기고 죄를 짓는 것을 죄성(罪性)이라고 합니다. 죄성은 그냥 놔 주면 봇물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댐이 터져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악마처럼 되고 이 세상은 바로 지옥처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댐을 막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죄의 댐을 막으시지 않으면 사람이 금방 완악해집니다.
바로처럼 계속 죄악을 고집하면 하나님은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봐라!”하고 내버려 두십니다. 로마서 1장 24, 26, 28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꾸 죄를 즐기고 고집하니 하나님이 마음대로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고집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계속 완악한 짓을 하는 사람을 완악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마음입니다.
3. 우리의 경우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구원과 선택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바로에게는 ‘유기와 심판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지난 주일에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으니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완전 보장을 받고 산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선택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믿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도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을 한 주간 더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깨닫고 무릎을 쳤습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일부 사람들을 버리시는가?’ 하고 놀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버리시는 것은 사람들이 버림받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정의를 두고 놀랄 수 있습니까?
진짜 놀라운 것은 ‘왜 하나님이 일부 사람들을 선택해서 구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짓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석방이요!’라는 특사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죄의 값으로 지옥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천국에서 살게 해 주시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선택하셔도 되고 선택 안 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안 하신다고 누가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시면 선택 받은 사람들은 감지덕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고 할 뿐입니다.
우리가 또 놀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실 때에 우리의 자격을 따지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의 자격을 따지시지 않고 우리를 예정 선택하셨습니다. 자격도 안 따지시고 우리를 총애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을 따지신 후에도 우리를 총애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격을 따져 보시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총애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인자를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선택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감격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을 따지시기 전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을 따지신 후에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최고의 확증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할 때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때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4살 백이 아이가 애완용 개를 키웠습니다. 매일 같이 놀고 같이 잤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밖을 내다보니 아버지가 그 개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빵!’ 하고 총을 맞은 개는 바로 쓰러졌습니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개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아빠가 왜 내 개를 죽여? 아빠 싫어! 아빠 싫어!” 아버지는 “얘야, 내가 왜 죽였는지 설명해 줄게.” 하고 아이를 달랬습니다. 아이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싫어! 아빠가 싫단 말이야!”
아이가 성장한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개가 전염병을 아이에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빠가 개를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근심과 걱정이 없이 안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녀가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자녀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까? 자녀가 우리의 조건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자녀를 달달 볶지 않습니까? 자녀들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자녀를 몰아붙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격을 따지시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처럼 자녀들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쳐도 자녀들을 품에 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심장의 박동소리까지 들으시고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처럼 자녀들의 아픈 가슴을 알고 자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녀가 아무리 잘못해도 아버지의 푸근한 마음,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기억하도록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선택과 자유’를 다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정의의 차원이 아니고 자유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놓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놓고, “내 마음이야!”라고 하시는 셈입니다. “내 마음이야!”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시지 않고 신실하십니다. 악한 분이 아니라 선하신 분입니다. 불의하신 분이 아니라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선택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이런 하나님의 품 안에서 딴 근심 없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사십시다(엡 1:11-12). 하늘보다 넓고 태속보다 포근한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 우리의 자녀들을 품으며 사십시다.
권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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