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이사야 64:4절을 인용하여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구원도, 전도도 아니 우리의 모든 삶 자체가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강조하십니다.
21세기의 기적들
우리 앞에 길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양 같이 눈이 어두워 우리 앞에 놓인 그 수많은 길들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인도하시고 행하시는 아바 아버지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가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두뇌가 있어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서 행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기적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기적이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보고 듣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적을 표적 또는 이적이라고도 했습니다. 표적이란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시려고 행하신 모든 일들입니다. 모든 표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사실 표적은 예수님에 의해 복음서 시대에 있던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모든 시대에 걸쳐, 21세기 오늘도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요, 이 믿음을 인도하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실을 통하여 이 표적과 이적을 보게 합니다.
불신앙은 어려운 현실 너머 있는 기적과 현실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쉽게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지만, 믿음은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현실은 앞으로 일어날 기적을 위한 전조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면서도, 불신앙의 눈은 무심하거나, ‘농사에 유익한 새인가, 혹은 잡아먹으면 몸보신이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겠지만 믿음의 눈은 ‘그것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봅니다. 나아가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혹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와 같은 말씀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운전을 하면서 그저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시는 기적을 보며 ‘할렐루야!’라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믿음의 눈은 현실을 하나님의 역사의 기회로 바라보기에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 표적과 기적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역사 속에서 기적으로 행하셨듯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은 위대합니다. 일상의 삶이 기적입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기적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사소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사소한 것마저도 그분의 엄청난 능력으로 해결 해 주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일상은 아무리 귀찮아도 버릴 수 없는 여행가방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행을 계속하려면 가방을 버려선 안 되듯, 삶은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로 나날이 새로 채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이 채워져야 할 '소소한 품목' 중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을 인생의 여행 가방에 꼭 지참하시면 하루하루의 삶이 감격적인 기적을 체험하는 위대한 여행이 됩니다.
회개와 사랑
사람의 행동 방향이 바뀌는 기적은 두 가지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바로 회개와 사랑입니다. 회개하면 바뀝니다. 인생이 확 바뀝니다. 사랑하면 바뀝니다. 완전히 바뀝니다. 자기 것을 잊고 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을 보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을 때는 오로지 ‘부분’에만 반응합니다(고전 13:9). 그러나 온전한 사랑을 알게 되면 전인격에 반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은 이타적이 됩니다. 사랑하는 순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의 것과 사랑하는 사람의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것을 다 퍼주지만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웃으면 자기도 웃습니다. 상대가 울면 자기도 웁니다. 상대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고 상대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잊고 온전히 상대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매일 체험해야 할 일종의 신비한 기적입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행위는 사랑인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아침에 우물가에도 나오지 못할 부끄러움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그녀가 예배에 대한 열망이 있는 점을 드러나게 하시고 그 여인이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마리아 전역에 복음을 알리는 메신저로 변화되게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창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 속에 헌신과 사랑의 가치를 드러내어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삭개오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세리장이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열정과 믿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의 집에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의 회개의 고백을 듣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합니다. 그 사람의 가치와 장점과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성장케 합니다. 회개와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낳습니다.
이름난 라디오 해설자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심하게 비난하는 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생각, 특히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재림하신다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만 없어진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분개했습니다. 방송국 측에서는 분개한 청취자들을 위해 곧 사과문을 발표했으나 정작 그 해설자는 사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증오의 편지와 저주하는 말, 심지어는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협박은 증오에 찬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없어져야 이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그 사람의 소신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원수를 이기는 최상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증오의 흉기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최대의 사랑이 용서입니다.
감사와 기쁨
세계적인 부흥목사님인 빌리 그래함이 말했습니다.
“최근 누군가 나에게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파킨슨병과 여러 질병을 허락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냉소로 하나님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것이냐, 아니면 신뢰와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동행이 이 땅에서의 생로병사를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로병사를 넉넉히 이길 능력을 줍니다. 믿음의 선배 빌리 그래함처럼 우리에게도 궂은일이나 재앙처럼 보이는 일이 닥칠 때 (비록 이 땅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을 감동하게 하고 사탄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고통까지도 감사할 수 있다면 일상의 삶은 얼마나 더 큰 감사 조건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첫 발걸음이 잔칫집이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잔칫집처럼 흥겹고 기쁘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첫 나들이를 하신 곳은 결혼식이 열리고 있는 잔칫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잔칫집이 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초대받아 가신 가나의 결혼식 집은 포도주가 떨어져 즐거움과 흥겨움이 사라진 집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흥겨운 자리, 즐거운 자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곧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흥이 깨진 잔칫집에 다시 흥이 살아나도록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포도주는 전에 먹고 취하던 포도주와는 질적으로 다른 포도주였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 예수님은 물처럼 무색무미한 우리의 삶을 포도주처럼 색깔 있고 맛있고 만족스럽고 흥겹고 기쁜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 변화는 정결예식을 위하여 준비된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이 내 속에 거주하시면 삶이 활기차게 되고 모든 것이 변하여 흥겹고 살맛나는 곳으로 바뀝니다. 우리 마음의 항아리를 청결한 항아리로 비우고 거기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면 물 같은 인생이 포도주 같은 행복한 삶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기적 체험의 비결입니다. 이 비결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E.M. 바운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홀로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갖는 것이 그 분을 알고 그 분과 영향력을 함께 가지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그 분을 아는 끈질긴 믿음에 기꺼이 응하십니다. 집요함의 진지함뿐만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사모함과 감사함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충만히 부어 주십니다.”
가족이란 단순히 혈육으로만이 아니라 희노애락을 함께 보낸 오랜 세월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족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주님의 살과 피를 먹었지만, 우리가 늘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가족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의뢰하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친구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영원히 사랑하고 교제해야 할 가장 귀한 관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가꾸어야 할 관계입니다. 성령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가족관계를 지속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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