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말은 아무나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유독 말을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 부럽습니다. 그리고 설교 잘하는 목사도 부럽습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목회자에게는 설교 잘 하는 일이 가장 큰복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불로(Apollos)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웅변을 그렇게 잘 했다고 합니다. 한 번 웅변을 하면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주석자에 의하면 구슬 이 흐르듯이 막힘이 없게 그렇게 유창한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 시대 사도바울과 경쟁상대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사도바울도 그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그 시대에는 수사학이 인기였다고 합니다. 수사학(修辭學)이라는 것은 "말을 잘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는 광장 모퉁이에서 자주 토론회가 벌어지고 변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변론에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상대방에게 승리할 경우 명성을 얻고 출세했다고 합니다. 이긴 사람은 박수를 받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런 삶을 즐기는 부류들을 가리켜서
"소피스트"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한 때 헬라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소피스트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피스트들은 말쟁이들이었고 언어 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당시 수사학이 한창 선풍을 일으켰을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구원이나 복음을 설명하는데는 이 수사학으로는 어렵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수사학은 듣기에는 좋고 고상하고 아름다울지는 모르나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설명할 수 없다 말합니다. 복음 전도에 이 수사학은 역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수사학의 한계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평소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하면 아주 구성지고 재미있게 해서 좌중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느 말이나 다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를 시켜 보십시오. 평소 말 잘하는 사람 기도 시켜 보면 잘 못합니다. 그 언변으로 전도하면 잘 할거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가 평소 말 잘하는 성도님이 있어 안심하고 대중기도를 시키고 나서 크게 시험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잘 하던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를 하다가 마무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해서
"예수 이름으로"
이 부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 잘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이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는 별개입니다. 바울도 처음에 전도할 때는 철학적으로 전도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설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도가 되었겠습니까. 처음에는 숫한 시행 착오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되니까 방법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오늘 읽은 본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고백을 합니다.
하나는
"복음전도는 말이나 수단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복음을 전할 때 말이나 이론이나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 는 말이나 지혜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복음전도는 말이나 수단이나 방법으로 예수를 소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복음, 십자가를 전할 때는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처럼 고상하고 아름답고 매끈한 말솜씨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말은 잘 못했던 사람입니다. 설교는 어느 정도 말솜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말씀을 잘 전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점이 약점이었던 사람입니다. 설교를 얼마나 못했으면 창틀에 앉아있던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언변 없는 설교가 또 깁니다. 설교학에서는 설교 하다가 졸게 하는 것은 목회자 책임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언변이 없다고 입방아를 찧어댔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것도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나는 말에는 졸하다"
하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어눌한 말솜씨가 전도하는데는 오히려 잘 먹혔습니다. 투박하고 졸한 언어를 가지고 십자가, 부활, 예수를 전할 때 그것이 오히려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전도나 설교는 사실 미끈한 언변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느 정도는 언변이나 요령도 있어야 하지만 닳고닳은 말솜씨는 오히려 효과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참 묘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설교나 복음전 도는 말솜씨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느 선교 단체에서 선교사 두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일을 해낼 것이다 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말이 참 어눌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두 사람을 모두 선정해서 파송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사람들의 부질없는 염려입니다. 선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말 잘하는 선교사는 매사를 꾀와 요령을 부리고 자기의 말솜씨를 너무 과신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선교를 말로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이 어눌한 선교사는 매사를 묵묵하고 우직하게 일을 해냈습니다. 매사를 진지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면서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그런 만큼 더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 냈던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자기의 약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를 너무 과신한 사람은 실패했지만 자신의 부족을 알고 노력했던 선교사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데는 말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극히 적은 일부분만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구원의 길"을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 방법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도법에 이론이나 방법론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칫 말 잔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간증집회도 보면 말이 너무 많고 과장도 심합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최권능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전도에 사명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의 전도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천당"
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는
"예수 천당"
한마디로 했습니다. 거기에 이론이나 방법론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한 것 같은데 그 전도 방법이 그렇게 잘 먹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론도 없고 앞 뒤 논리적이지도 못한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주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전하는 사람의 믿음과 확신이 실려 서 전달이 되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조용히 들어가 서 있다가 갑자기
"예수 천당"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놀란 사람들은 그 당시에 는 미친 사람의 소행으로 여겼겠지만 집에 가서 조용히 잠을 자려고 하면 그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예수를 영접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모양도 없고 이론도 없고 고상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속에 확 신이 들어있고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짤막한 말 한 마디가 가슴을 깊이 찌르고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능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보고 충청도 사투리를 너무 쓴다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서울 말씨로 고쳐 쓰랴?"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여유가 있고 구수하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아주 세련된 말씨는 거부감이 따르고 지루합니다. 너무 완벽하면 좋지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너무 달변이 면 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전하는데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만들어 내지 않고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난 느낌 그대로를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 체험 그 감각 그대로를 전하니 얼마나 능력이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공부 많이 한 사람입니다. 처음엔 그도 철학적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버블 바꾼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예수를 만나 체험한 그대로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좀 우직하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오직 예수"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상당한 지성인이고 높은 수준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전하는데 철학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철학적으로 예수를 전했더라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라는 투박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을 아주 철학적인 표현으로 고상하고 매끄럽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만일 그렇게 매사를 표현하려고 애썼더라면 그렇게 능력 있는 전도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로 기도할 때 시적(詩的)으로 하 고 논리적으로 하고 감상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듣기에는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기도 속에 힘이 없고 구체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기도는 확신이 결여되어 핵심을 비 켜 나가기 쉽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론을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내분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너무 지식과 이론과 학설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라는 점을 잊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것이 핵심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것을 가지로 왈가왈부하다 보니까 갈등에 휩싸인 것입니다. 그 점이 강조되었더라면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다투거나 분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쓸데없는 문제들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불화하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자꾸만 분열되고 갈등합니다. 거기에는 이유는 있습니다. 교회들이 본질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부활과 회개와 천국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핵심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교회는 모든 역량을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느 대교회 목사님이 세미나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교회에 사람들 이 많이 모이게 하고 싶으냐? 그러면 '죄, 십자가, 심판, 종말'은 설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 교회의 문제점들을 꼬집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 그저 듣기에 편한 말씀을 듣고는 은혜 받았다고, 설교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교회에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죄, 십자가, 심판, 종말 빼고 뭐가 중심이 되겠습니까. 중심 없는 교회는 흔들리기 쉽습니다. 바울은
"나는 오직 예수만 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보면 앞뒤가 없고 논리적이지 못한 것 같지만 그의 전도는 언제나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 전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권세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존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확신있는 고백입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신앙인 되는 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할 때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상대방 듣기 편하도록 다듬어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각색을 하고 다듬어서 표현했더라면 핍박을 덜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의 말은 언제나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도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하다가 핍박을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 말이 얼마나 거칠었습니까.
"이 독사의 새끼들아"
이 얼마나 지독한 욕입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아주 거칠은 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원색적인 욕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요단강으로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말이 거칠었으나 그 말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과 은혜와 진리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전하는 말 한마디가 생명력이 있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감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자신감이 없으니 어디서나 신앙인 표시도 못하고 매사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전도는 유식한 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직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매끄러운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투박하나 힘이 있고 자신감이 배어있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가끔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가 힘이 있어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죽기 전에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3일만 눈을 떠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눈을 뜨면 첫 번째로 선생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두 번째로는 바람에 나풀대는 나뭇잎과 아름다운 눈망울, 그리고 먼동트는 웅대한 장면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도시의 번쩍이는 발코니와 쇼윈도우 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죽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엔 그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겨우 나뭇잎이나 보고 눈망울이나 보고 먼동트는 것 보는 것이 소원입니까. 적어도 성령으로 거듭난 신앙인의 소원은
"아직껏 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 사랑의 세계, 영의 세계를 보고 죽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세계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말이 터져 나올 때마다 누구도 느끼지 못할 만큼 확신에 찬 증거가 터저나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고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도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그 삶이 바로 증거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그랬듯이 여러분들의 삶에도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이 우리의 확신을 보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말은 아무나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유독 말을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 부럽습니다. 그리고 설교 잘하는 목사도 부럽습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목회자에게는 설교 잘 하는 일이 가장 큰복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불로(Apollos)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웅변을 그렇게 잘 했다고 합니다. 한 번 웅변을 하면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주석자에 의하면 구슬 이 흐르듯이 막힘이 없게 그렇게 유창한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 시대 사도바울과 경쟁상대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사도바울도 그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그 시대에는 수사학이 인기였다고 합니다. 수사학(修辭學)이라는 것은 "말을 잘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자기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는 광장 모퉁이에서 자주 토론회가 벌어지고 변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변론에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상대방에게 승리할 경우 명성을 얻고 출세했다고 합니다. 이긴 사람은 박수를 받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런 삶을 즐기는 부류들을 가리켜서
"소피스트"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한 때 헬라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소피스트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피스트들은 말쟁이들이었고 언어 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당시 수사학이 한창 선풍을 일으켰을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구원이나 복음을 설명하는데는 이 수사학으로는 어렵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수사학은 듣기에는 좋고 고상하고 아름다울지는 모르나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설명할 수 없다 말합니다. 복음 전도에 이 수사학은 역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수사학의 한계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평소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하면 아주 구성지고 재미있게 해서 좌중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느 말이나 다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를 시켜 보십시오. 평소 말 잘하는 사람 기도 시켜 보면 잘 못합니다. 그 언변으로 전도하면 잘 할거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가 평소 말 잘하는 성도님이 있어 안심하고 대중기도를 시키고 나서 크게 시험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잘 하던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를 하다가 마무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해서
"예수 이름으로"
이 부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 잘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이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는 별개입니다. 바울도 처음에 전도할 때는 철학적으로 전도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설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도가 되었겠습니까. 처음에는 숫한 시행 착오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되니까 방법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오늘 읽은 본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고백을 합니다.
하나는
"복음전도는 말이나 수단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복음을 전할 때 말이나 이론이나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 는 말이나 지혜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복음전도는 말이나 수단이나 방법으로 예수를 소개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 복음, 십자가를 전할 때는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처럼 고상하고 아름답고 매끈한 말솜씨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말은 잘 못했던 사람입니다. 설교는 어느 정도 말솜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말씀을 잘 전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점이 약점이었던 사람입니다. 설교를 얼마나 못했으면 창틀에 앉아있던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 죽었겠습니까. 언변 없는 설교가 또 깁니다. 설교학에서는 설교 하다가 졸게 하는 것은 목회자 책임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언변이 없다고 입방아를 찧어댔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것도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나는 말에는 졸하다"
하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어눌한 말솜씨가 전도하는데는 오히려 잘 먹혔습니다. 투박하고 졸한 언어를 가지고 십자가, 부활, 예수를 전할 때 그것이 오히려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전도나 설교는 사실 미끈한 언변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느 정도는 언변이나 요령도 있어야 하지만 닳고닳은 말솜씨는 오히려 효과가 반감될 수 있습니다. 참 묘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설교나 복음전 도는 말솜씨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느 선교 단체에서 선교사 두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일을 해낼 것이다 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말이 참 어눌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두 사람을 모두 선정해서 파송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사람들의 부질없는 염려입니다. 선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말 잘하는 선교사는 매사를 꾀와 요령을 부리고 자기의 말솜씨를 너무 과신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선교를 말로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이 어눌한 선교사는 매사를 묵묵하고 우직하게 일을 해냈습니다. 매사를 진지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면서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그런 만큼 더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 냈던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자기의 약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를 너무 과신한 사람은 실패했지만 자신의 부족을 알고 노력했던 선교사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데는 말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극히 적은 일부분만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구원의 길"을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 방법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도법에 이론이나 방법론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칫 말 잔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간증집회도 보면 말이 너무 많고 과장도 심합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최권능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전도에 사명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의 전도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천당"
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는
"예수 천당"
한마디로 했습니다. 거기에 이론이나 방법론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한 것 같은데 그 전도 방법이 그렇게 잘 먹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론도 없고 앞 뒤 논리적이지도 못한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주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전하는 사람의 믿음과 확신이 실려 서 전달이 되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조용히 들어가 서 있다가 갑자기
"예수 천당"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놀란 사람들은 그 당시에 는 미친 사람의 소행으로 여겼겠지만 집에 가서 조용히 잠을 자려고 하면 그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예수를 영접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모양도 없고 이론도 없고 고상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속에 확 신이 들어있고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짤막한 말 한 마디가 가슴을 깊이 찌르고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능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보고 충청도 사투리를 너무 쓴다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서울 말씨로 고쳐 쓰랴?"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여유가 있고 구수하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아주 세련된 말씨는 거부감이 따르고 지루합니다. 너무 완벽하면 좋지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너무 달변이 면 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전하는데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만들어 내지 않고 내가 만난 예수를 만난 느낌 그대로를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 체험 그 감각 그대로를 전하니 얼마나 능력이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공부 많이 한 사람입니다. 처음엔 그도 철학적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버블 바꾼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예수를 만나 체험한 그대로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좀 우직하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오직 예수"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상당한 지성인이고 높은 수준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전하는데 철학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철학적으로 예수를 전했더라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라는 투박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을 아주 철학적인 표현으로 고상하고 매끄럽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만일 그렇게 매사를 표현하려고 애썼더라면 그렇게 능력 있는 전도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로 기도할 때 시적(詩的)으로 하 고 논리적으로 하고 감상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듣기에는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기도 속에 힘이 없고 구체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기도는 확신이 결여되어 핵심을 비 켜 나가기 쉽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론을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내분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너무 지식과 이론과 학설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라는 점을 잊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것이 핵심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것을 가지로 왈가왈부하다 보니까 갈등에 휩싸인 것입니다. 그 점이 강조되었더라면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다투거나 분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쓸데없는 문제들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불화하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들이 자꾸만 분열되고 갈등합니다. 거기에는 이유는 있습니다. 교회들이 본질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부활과 회개와 천국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핵심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교회는 모든 역량을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느 대교회 목사님이 세미나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교회에 사람들 이 많이 모이게 하고 싶으냐? 그러면 '죄, 십자가, 심판, 종말'은 설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 교회의 문제점들을 꼬집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 그저 듣기에 편한 말씀을 듣고는 은혜 받았다고, 설교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교회에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죄, 십자가, 심판, 종말 빼고 뭐가 중심이 되겠습니까. 중심 없는 교회는 흔들리기 쉽습니다. 바울은
"나는 오직 예수만 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보면 앞뒤가 없고 논리적이지 못한 것 같지만 그의 전도는 언제나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 전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권세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존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확신있는 고백입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신앙인 되는 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할 때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상대방 듣기 편하도록 다듬어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각색을 하고 다듬어서 표현했더라면 핍박을 덜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의 말은 언제나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도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하다가 핍박을 당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 말이 얼마나 거칠었습니까.
"이 독사의 새끼들아"
이 얼마나 지독한 욕입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아주 거칠은 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원색적인 욕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요단강으로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말이 거칠었으나 그 말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과 은혜와 진리와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전하는 말 한마디가 생명력이 있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감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자신감이 없으니 어디서나 신앙인 표시도 못하고 매사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전도는 유식한 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직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매끄러운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투박하나 힘이 있고 자신감이 배어있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가끔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가 힘이 있어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죽기 전에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3일만 눈을 떠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눈을 뜨면 첫 번째로 선생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두 번째로는 바람에 나풀대는 나뭇잎과 아름다운 눈망울, 그리고 먼동트는 웅대한 장면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도시의 번쩍이는 발코니와 쇼윈도우 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죽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엔 그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겨우 나뭇잎이나 보고 눈망울이나 보고 먼동트는 것 보는 것이 소원입니까. 적어도 성령으로 거듭난 신앙인의 소원은
"아직껏 보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 사랑의 세계, 영의 세계를 보고 죽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세계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말이 터져 나올 때마다 누구도 느끼지 못할 만큼 확신에 찬 증거가 터저나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고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도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의 그 삶이 바로 증거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그랬듯이 여러분들의 삶에도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이 우리의 확신을 보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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