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성전의 재발견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신을 알지 못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깨달은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은 성전의 재발견을 의미한 것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건물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사람, 즉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가 곧 진정한 성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원래 하나님 자신도 이스라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 했던 다윗 왕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삼하 7:6,7)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항상 성전 된 우리 자신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므로 어떤 면에서는 붙박이 성전건물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하나님께 그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하늘의 전체라도 이 하나님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축한 붙박이 성전 안에 갇혀 계실분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루살렘의 장엄한 성전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성전 자체가 단순한 하나님의 집이라고만 생각을 하면 자칫 이 성전은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전 밖에서의 삶과 성전 안에서의 삶이 다르면 이 성전은 우상에 불과한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강도의 굴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이것은 예배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상태와 관계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서 먼저 성전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는 비로소 신령과 진정, 즉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다가 베델에서 하늘과 땅이 이어졌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만약 야곱에게 성전 된 삶이 없었다면 이러한 환상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성전 된 우리 자신과 이렇게 교통하십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 얼굴에서 비늘이 벗어진 사울은 성전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왜곡된 인식을 가졌던 것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니요, 주님을 믿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붙박이 성전이 아닌 portable temple, 즉 움직이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쳔이 되었다는 것,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곧 스스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편의상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곧 성전이 되어야 원래의 성전이나 교회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성전이 되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땅의 교회들 역시 실패한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제 어떤 경우에도 성전은 집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전 된 삶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성전 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원리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지난 날 성전의 내부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를 알면 됩니다. 지난 날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진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가 법궤요, 둘째는 금 촛대요, 셋째는 분향단이요, 넷째는 진설병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중 단 하나라도 없으면 그것은 어떠한 건물의 외형과도 상관이 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전이 될 수 없었습니다. 있으면 비록 천막이라도 그 곳이 곧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움직이는 성전이 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바로 이 네 가지를 모두 구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법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전의 중심, 즉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지성소에는 먼저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 법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은 십계명 돌비석이 있었습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움직이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짐이 없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 되는 길이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뿐 아니라 교회의 일꾼은 그 마음에 말씀으로 채워짐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성도도 일꾼도 될 수도 없고 또한 그런 사람이 결코 일꾼으로 세워지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칫 교회 안에 세속주의가 만연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라마 불교에는 마니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법륜(法輪)인데 달리 말씀을 드린다면 이 라마교의 경전을 기록한 금속원통입니다. 그런데 이 원통이 대웅전 주변으로 여러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경전통, 즉 마니차라는 원통을 손으로 돌리면서 계속 대웅전을 돕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 마니차를 손으로 한 번 돌리면 라마교 경전을 한 번 다 읽은 것으로 인정이 되어 그만큼 그들의 업보가 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를 든다면 성경 66권에 해당되는 66개의 마니차를 다 돌리면 성경 66권을 모두 통독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남의 종교를 폄하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경전의 내용은 하나도 모르고 경전 깡통만 돌리면 다 된 것처럼 생각을 한다면 참으로 그들은 깡통신자가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성전 된 삶의 본질은 먼저 믿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용은 아무 것도 없고 소리만 시끄러운 깡통 신자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금 촛대입니다.
옛날의 이동형 성막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붙박이 성전 안에도 금 촛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전의 지성소 안에서는 항상 이 금 촛대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 금 촛대는 달리 말씀을 드리면 성령님의 조명을 뜻합니다. 성령님의 조명이란 성령을 통하여 모든 것을 밝히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장로교의 창시자 죤 칼빈은 성령님의 조명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조명은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래서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 즉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은 인생의 모든 것을 깨닫고 아는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 성령의 임재와 내주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셋째, 분향단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에서 항상 향을 피워 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마음과 정성이 항상 하나님께 올려 바쳐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의 분향단의 의미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이 향은 곧 오늘 날 성도들의 기도를 뜻합니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는 단지 필요할 때만 드리는 단발성 기도가 되면 그것은 매일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매일 매일의 습관이요, 성도의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향단의 향은 금촛대의 불과 함께 매일 매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행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여기서 기도하라는 단어는 헬라어 “데오마이”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붙들어 맨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붙들어 매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생활화 하지 않고는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불교에는 이판사판이 있습니다. 이판은 이판승이고 사판은 사판승입니다. 불교의 조직과 그 관리와 운영을 책임지는 영역의 승려들이 사판승입니다. 그러나 성철, 법정 스님과 같이 불심이 깊고 수도의 경지가 깊은 승려들이 이판승입니다. 그래서 사판승이 아무리 흙탕물을 튀겨도 이판승과 같은 분들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오늘날 까지 건재합니다. 이것은 캐도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독교 아니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진설병입니다.
진설병이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성전 안 진설대, 즉 떡상 위에 놓은 떡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떡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잡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잡수시는 것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후에는 제사장이 그 떡을 먹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제사장을 동일시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오늘 날 많은 크리스쳔들이 주의 종을 잘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캐도릭에서는 감사헌금을 신부님 개인에게 바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 사람을 동일시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전 된 우리 마음에 진설병을 구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와 이질적인 사람, 전혀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 우리의 주변에서 가장 작은 자를 위한 공간을 우리의 마음속에 확보하는 것을 뜻합니다. 타인을 위한 진설병입니다.
원래 진설병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여 12개를 포개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개의 크기도 에바 10분의 2였으니 우리 식으로는 밀가루 2.4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원래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제사장의 몫이었고 더 나아가 특별한 상황에서는 다윗과 같이 굶주린 자를 위한 양식이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오늘날 구제의 개념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나의 주변에 있는 소외된 자와의 교제를 목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사랑의 실천의 개념입니다. 마음속에 크나큰 진설병을 지닌 자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의 성전 된 삶의 본질은 우리 자신이 돌집이 아닌 움직이는 성전으로서의 삶을 뜻하는 것이고 그 삶의 내용은 앞에서 말씀드린
법궤, 즉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금촛대, 즉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는 것과,
분향단, 즉 지속적인 기도의 삶이 있어야 하는 것,
진설병, 즉 남을 위한 넉넉한 배려의 마음을 가진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전이 되는 것이고 성전 된 삶의 본질을 지닌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성전입니다. 성전은 주님이 항상 내주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성전의 복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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