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믿음의 집 짓기 /고전3:10-1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55
수년 전부터 웰빙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와 일상 생활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먹은 음식에서부터 주거 환경에 이르기까지 웰빙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웰빙이라는 말은 ‘친환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웰빙에서 진화된 개념의 웰다잉이라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웰다잉은 웰빙의 완성 개념입니다. 웰다잉은 ‘잘 죽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웰다잉에는 ‘잘 죽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라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 준비된 죽음을 실천하는 것이 웰다잉의 최종 목표입니다.

임종 체험 프로그램을 가지고 성장해서 기업화가 된 회사가 있습니다. 코리아라이프컨설팅센터라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임종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임종을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임종을 경험함으로 자신의 남은 삶을 더 새롭고 의미있게 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코리아라이프컨설팅센터만이 아니라 대학에서, 종교 단체에서, 사회복지재단들에서 ‘웰다잉 전문강사 교육과정’이 개설되어 운영될 만큼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 좋은 주일 아침에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잘 죽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데 성경은 죽음에 대해 터부시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씀하고 있고, 잘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이 지혜롭고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소망을 가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죽음의 순간에 소망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1883년 3월 14일은 칼 막스가 사망한 날입니다. 그 날에 죽음의 순간을 앞두고 있는 칼 막스에게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막스는 ‘시끄러워, 나가!’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초라하게 죽었습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병명도 묻지 않고 한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 땅의 삶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는 말씀을 믿고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죤 칼빈은 임종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활란 박사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모두 슬퍼서 장송곡을 준비하려 했는데 김 박사는 장송곡 대신에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인생은 언젠가 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결산을 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인생의 결산을 집 짓는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집을 지을 때는 기초가 중요한데 그 기초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인생의 집이 달라집니다. 세상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 죽음 이후에 구원에 이르지를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위에 기초를 두고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죽음 이후에 구원의 자리에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기초 삼아 집을 짓는 것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구분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짓는데 사용되는 재료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나, 판자를 가지고 쉽게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돌로 지을 수도 있고 보석으로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초 삼아 믿음의 집을 지을 때 허드레 것으로 하지 말고 가장 귀하고 소중한 재료들을 사용해 지으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집을 지을 때 좋은 재료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13-15절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니라’

본문에 나오는 ‘공력’은 헬라어로 ‘에르곤’입니다. 이는 ‘수고’입니다. 믿음의 집을 짓는데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집을 지으려면 좋은 재료로 지을 뿐만 아니라 정성을 다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력은 공력인데 ‘각각의 공력’입니다. ‘각각의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공력이 아닌 내 공력입니다. 남의 정성과 수고가 아닌 내 정성과 내 수고입니다. 남의 땀과 헌신이 아닌 내 땀과 헌신입니다. 남의 기도와 예배가 아닌 내 기도와 예배입니다. 좋은 재료와 집을 짓은 사람의 정성과 수고가 있을 때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해도 정성과 수고가 없으면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집을 짓는 재료와 공력의 진정성은 ‘그 날에’ 즉 마지막 날에 숨김없이 다 드러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불로 심판이 있는데 그때에 재료를 값싼 허드레 것으로 지은 집은 불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다 타버립니다. 그러나 좋은 재료를 사용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지은 집은 불의 심판이 있어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 심판에 타버리는 허술한 집을 지은 사람은 불 가운데 받는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급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말합니다.

집을 짓는데 허술한 재료를 가지고도 외형상으로 멋있는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지으면 외부로부터 약간의 충격만 있어도 곧 균열이 생기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좋은 재료를 가지고 정성을 들여 집을 지으면 외부로부터 어떤 충격이 와도 균열이 생기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의 집이 최상의 재료를 가지고 정성을 다해 지었는지 아니면 허술한 재료를 가지고 대충 지었는지를 테스트하는 때가 분명히 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테스트를 통해 내가 지은 믿음의 집의 허와 실이 모두 드러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믿음의 집을 지을 때 좋은 재료들을 선택해야 할 이유입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용기도 있고 유머도 풍부한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영어도 곧 잘하셔서 의사 소통하는데 별로 어려움이없었습니다. 교회당이 없어서 캐나다인들이 세운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교회가 지역의 한인 노인들을 모시고 경로행사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개회 예배에서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행사날이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교회 목사님이 뜰에 계셨습니다. 서로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캐나다 목사님에게 ‘목사님, 오늘 한인 노인들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데 성경 봉독을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부탁했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이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캐나다 목사님이 나오셔서 성경을 봉독해 주겠다고 소개했는데, 목사님이 나와서 성경 봉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캐나다 목사님과 한인 목사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목사님이 설교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영어를 잘한다 해도 설교 통역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영어 수준이 설교 통역을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통역을 하는데, 어떤 말씀은 들리고 어떤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라며 당황하고 있는데 ‘네가 설교 준비한 대로 해라’ 하는 깨달음이 오더랍니다. 그래서 캐나다 목사님은 영어로 자기 설교를 하고, 한인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했습니다. 노인들은 영어를 잘 모르니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영어를 잘 모르고 캐나다 목사님의 설교와는 관계없이 그냥 자신이 준비해 온 설교를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니, 노인들이 ‘목사님이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난처하기도 했지만, 노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요, 영어를 잘 한다고 하니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니,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서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캐나다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 자네가 웬일이야?’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용기가 대단하시던데요?’ 목사님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감춰진 것은 때가 되면 다 드러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충성을 하는 것도 다 드러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충성하고 많은 장로님들과 안수 집사님들, 권사님들, 성가대원들, 교사들, 구역장들, 안내위원들, 차량 안내위원들이 다 귀하게 충성하는데, 사람이 보기에는 모두 시간과 물질을 바치며 귀하게 충성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테스트하실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 같고, 어떤 사람은 은 같고, 어떤 사람은 보석 같은데, 어떤 사람은 나무 같고, 어떤 사람은 짚 같고, 어떤 사람은 풀 같다는 것입니다.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풀을 두고 불이 지나가면 나무와 짚과 풀은 타버립니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은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우리들이 지은 믿음의 집의 재료가 무엇인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모두가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권사님이 들려 주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길을 걸어가는데 뒤에서 한 남자가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라고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처녀라고 부르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집에 도착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내가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를 보고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라고 부르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손자는 그럴리가 있는가 하며 할머니가 뭔가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보청기를 끼고 나가 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할머니가 외출하고 돌아오는데 어제와 마찬가지로 어느 남자가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들어 보니 외침 소리가 조금 이상합니다. 할머니가 끼고 있는 보청기 소리를 조금 높이고 귀를 기울여 들으니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이라고 외치는 갈치 장사의 외침이었습니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이라고 외치는 갈치 장사의 외침을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로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착각은 자유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사실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도 하나님 안에서 다 드러나는 때가 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기초를 두고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지, 어떤 재료를 가지고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지, 믿음의 집을 짓는데 우리의 수고와 정성을 얼마만큼 기울여 지었는지 ‘그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합리화시키고 정당함을 말해도 ‘그 날이 오면’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 그 날이 올 때 부끄럽지 않은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좋은 재료와 수고를 아끼지 말고 믿음의 좋은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주일 아침에 우리가 짓는 믿음의 집이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믿음이 집을 짓는데 우리들이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우리들이 믿음의 집을 짓는데 얼마만큼 수고와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집을 아름답게 지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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