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바울이 권면하는 신앙자세/고전16:1-12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22

이제 고린도전서 강해 마지막장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들, 즉 성도들 간의 분쟁 문제와 근친상간 문제, 신자들 간의 소송 문제와 교회 내의 음란 문제, 결혼과 독신 문제. 그리고 이혼과 재혼 문제,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와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 무질서한 성만찬에 관한 문제와 방언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 부활에 관한 문제 등, 수많은 문제를 언급한 후 바른 길을 가르치고 지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바른 신앙 자세를 세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연보를 위한 바른 신앙 자세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 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목적으로 바치는 헌금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 활동을 하던 중에 온 유대 지방에 가뭄이 극심하고 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방문하는 모든 교회들마다 힘을 합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야 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정성껏 헌금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로서 그곳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었고, 여러 이방 지역에 사도들과 일꾼들을 보내서 복음 사역을 도와 준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그 사정을 외면할 수는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힘써서 그 교회를 돕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갈라디아 교회는 이미 동참하였고, 심지어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이 많은 중에서도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하였습니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들도 서둘러서 기꺼이 그 헌금을 바쳤는데, 고린도 교회는 재정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 헌 금을 바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교회가 일하지 않으면 마침내 안으로 모여진 에너지가 내분의 에너지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많은 일꾼이 있고, 헌금도 많이 들어옴에도 자기 교회 성장발전만 위해 일할 뿐, 밖을 향해서 어려운 많은 교회를 돕는 일이나 선교에 힘쓰거나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으로 응축된 에너지가 분열을 가져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영락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그런 면을 지적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재정을 가진 교회가 전담 선교사를 고작 10가정뿐이 파송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라면서 밖으로 퍼주어야 점점 맑은 샘이 솟아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과거 우리 교회가 화재가 발생하여 엄청난 재정에 시달릴 때도 외부로 돕던 재정을 하나도 줄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교회당을 배로 증축하는 복을 주셨고, 고양홍익교회 개척을 위해서 힘쓸 때 교회 아래 150여 평의 땅을 사도록 허락해 주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의 시험의 근본 원인은 엄청난 재정과 인재들, 그리고 영적인 능력이 많은 교회임에도 밖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적극 연보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헌금의 원칙과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절 “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헌금의 네 가지 원칙과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매주일 첫 날’에 헌금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매주 일 첫 날은 곧 주일날입니다. 헌금은 주일날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옳습니다.

(2)‘너희 각 사람이’ 헌금을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헌금을 하고, 누구는 헌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각각 헌금을 해야 합니다. 특히 가족 중에 대표만 헌금하고 나머지는 그냥 예배드리는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예배드릴 때마다 제물을 바쳤는데 신약 이후에는 헌금이 제물을 대신하는 것인데 그 헌금마저 내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던지 적던지 주일날 헌금을 바치어야 마땅합니다.

(3)‘이를 얻은 대로’ 헌금을 하라는 것입니다.
수입을 얻은 대로 헌금을 해야 합니다. 수입이 많은 사람은 많은 헌금을 하고, 수입이 적은 사람은 적은 헌금을 하되, 자기 형편 중에서 힘껏 헌금을 하는 것 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고후9:6-7). 특히 하나님은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물질로 헌금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는 지금 무엇인가 미쳐가는 느낌입니다.

요즈음 많이 유행되는 말 중의 하나가 ‘된장녀’입니다. ‘된장녀’란 무슨 뜻입니까? 아무 능력이 없으면서 허영심에 들뜬 여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여성들 때문에 지금 가짜 명품이 판을 치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원가 8만-20만원의 시계를 만든 뒤에 ‘스위스 빈센트 앤코’의 제품이라고 속여서 개당 580만~9천 750만원의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았는데 날개 돋친 듯 팔리므로 사기업자들이 23억을 챙겼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특히 요즈음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지금 온 나라가 도박판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매일 귀가 따갑게 듣는 뉴스가 성인 오락실의 ‘바다 이야기’입니다. ‘바다이야기’라는 성인오락으로 작년에 순익만 160억 원을 남겼다고 합니다. 허가받기로는 100원 넣어 최고 2만원까지만 가져갈 수 있는 게임인데, 프로그램 조작을 통해 250만원까지 챙겨갈 수 있도록 개조한 게임입니다.

이러한 성인오락실들이 전국 곳곳, 심지어 주택가까지 파고들므로 엄청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딴 사람은 거의 없고 거의 잃었다는 소식입니다. 심지어 어느 분은 수천만 원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망이 들 뜬 돈들이 2년 사이 30조원이 돌았다니 땀 흘리지 않고 떼돈을 벌겠다고 혈안이 되어가는 이 사회는 분명 병든 사회가 아닙니까? 어쩌다가 나라가 이 꼴이 되고 있습니까?

가령 그렇게 도박을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런 돈은 집안과 자녀를 망치는 독이 든 물질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돈으로 한 헌금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인은 허구헌날 복권을 사면서 “하나님, 복권에 1등으로 당선하면 반을 뚝 떼어서 교회 건축헌금에 바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허황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땀 흘려 얻은 수익에서 내는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4)‘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미리 준비하였다가 헌금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준비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되는 대로 헌금을 바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바칠 헌금을 미리 준비하였다가 바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정성껏 하지 않고, 힘껏 하지 않는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주일날 헌금할 때마다 각자가 하되, 땀 흘려 이를 얻은 돈에서 믿음과 정성을 다해 힘껏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바울은 바른 사역 자세를 본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7절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곳은 에베소입니다. 그 곳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마음이 한없이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을 듣고 직접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유하면서 직접 말씀을 가르치고 신앙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싶은 것이 그의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뿐 그곳에 빨리 갈 수 없는 형편과 이유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8-9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에베소에서 모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이 기회를 포기하고 고린도에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복음으로 인하여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외면하고 고린도에 갈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전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복음에 대한 애착심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과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 성도들과 교회와 함께 고난 받으며 복음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요, 그 마음 때문에 에베소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든든히 서 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쉽게 믿고 편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은혜와 복만 받으려는 교인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만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고린도 지역에 가서 머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와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사역지가 다른 곳입니다. 바울은 목회 사역지를 옮길 때 자기 마음대로나 자기 유익만을 쫓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실 때만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에게 바로 이런 바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맡기신 충성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자기 편리와 유익을 쫓아서 교회를 옮겨 다니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항상 그런 유혹을 받을지라도 주께서 허락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멀리 이사 감으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옮기는 경우가 있어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묻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허락을 받은 후에 교회를 옮긴다면 주께서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데 자기 마음대로 옮긴다면, 있던 곳보다 더 못 하고 더 고생하는 역사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교회 보내주시면 그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사역하면서 자기에게 맡긴 성도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두는 자세와 진정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교회가 대우가 신통치 않으면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목회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 목회자는 어느 교회 부임하여 위임목사가 된 지 2년도 안되어 더 좋은 조건의 교회로 쉽게 옮김으로 교인들로 하여금 실망하게 만듭니다. 그런 목회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제 친구 목사가 지방에서 목회할 때, 그 교회가 날로 부흥이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지금에 있는 서울 교회에서 청빙이 왔습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을 위해서 별로 기도도 안 해보고 가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반대를 하고 권사님들이 사택에 와서 버티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음에도 도망치듯이 그 교회를 떠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이상하게 새로 부임한 교회가 전혀 부흥이 안 됩니다. 오히려 계속 시험만 드는 것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 목회자가 교회를 옮긴다는 것이 참으로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다른 친구 목사는 조그마한 소도시에 목회할 때에 더 큰 교회에서 오라는 청빙을 받았지만, 간절히 기도해 보아도 마음이 평안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인들이 붙들고 놓지 않자,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 교회에서 지금까지 목회했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 중에 교수도 있게 하시고 의사도 허락해 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부목사님들, 교육전도사님들이여, 목회할 때에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떠한 교회, 어떠한 양떼를 맡기시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금의 교회의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지요, 직책인 줄 믿으시고 최선을 다해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목회자에 대한 바른 자세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0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 이니라”고 했습니다. 5-9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빨리 고린도교회에 가기를 원했지만, 지금 현재 머물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사정이 당장 떠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대신에 아볼로를 보내려고 했지만 아볼로의 대답은 지금은 갈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기 대신 아볼로를 보내려고 한 것은 그가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사도 바울과 서로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가면 말씀을 잘 가르쳐서 모든 문제들을 잘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 갈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너무나 시달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장 어려운 목회 자리가 어디인 줄 압니까?

분파가 여러 파로 갈라진 교회에 가서 목회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 쪽 파에 의견을 들어주면 저 쪽 파가 반대합니다. 아무리 좋은 목회안이라도 이 쪽 파가 찬성하면 저 쪽 파는 무조건 반대합니다. 그런 갈라지는 분위기에 무슨 목회를 합니까? 아마 아볼로는 여러 파로 나누인 고린도 교회를 목회하다가 너무나 상처를 받고 도망치다 시피해서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온 줄 압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무리 권해도 되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디모데를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리고, 목회 경험도 부족하고, 건강도 썩 좋은 편이 못 되었습니다. 능력이나 경험 면에서 아볼로와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 어린 목회자를,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것은 너무나 염려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내면서 “이 디모데도 나와 함께 주의 일을 힘쓰는 자니 너희는 조심하여서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주의 종이 성도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소신껏 목회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라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 주님의 눈치를 살피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해야지, 성도들의 눈치를 살피고 성도들을 두려워하면 올바른 목회가 되지 못합니다.

자꾸 영락교회가 이야기를 해서 안 되었지만, 작년에 영락교회를 위해서 일할 때 어느 주일 오후에 아주 중요한 제직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시 30분에 영락교회 일부 장로님들과 몇 명의 안수집사님들이 찾아와서 제직회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잘못하면 광성교회처럼 대판 싸움판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위협하기를 “만약에 목사님이 사회를 보다가 어떤 행패를 당할지 모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약속했기 때문에 어떤 위험이 있어도 가야한다.”고 하면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 날 왔던 안수집사님들이 저 언덕에서 제 차가 가지 못하도록 가로 막습니다. 저는 다른 길로 빠져서 영락교회가 갔습니다. 가면서도 대단히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강대상에 서는 순간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심으로 담대한 마음이 생기면서 조금도 두렵지 않고 회를 잘 마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목회자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때 체험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두려워하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 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강단의 생명력과 영적 권위가 떨어지게 되고, 더 나아 가서는 교회가 인본주의화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런 교회는 부흥 성장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목회자가 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도 성도들 눈치 살피지 않고 소신껏 목회를 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 하도록 배려해 주어야합니다.

1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고 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디모데는 연소합니다. 경험도 부족하고, 건강도 좋지 못합니다. 그래도 저를 멸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를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평안히 대해 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과 함께 주의 일을 위해 힘쓰는 주의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임으로, 어떤 경우에라도 멸시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해서도 안 됩니다. 평안히 대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를 멸시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고,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목회하지 않고 자기 욕심으로 치우침으로 교회와 교인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하나님이 직접 처리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처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흔드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어리고 부족할지라도 목회를 잘 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돕는 것이라 생각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27살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인천제일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많은 교인들이 ‘새끼 목사’ ‘아기 목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처럼 대부분 장로님들이 전부 할아버지나 아버지 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천제일교회에서 15년 동안 목회를 잘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교회에 이희영 장로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은 연세가 칠순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장로님이 실수를 해서 “곽 목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순간 이희영 장로님이 “김 장로, 말 다시 해 ‘곽 목사’가 뭐야? ‘님’자를 붙여”라고 호통 칩니다.

“내 나이에도 ‘곽 목사님’이라고 하는 데 자네가 어떻게 해서 ‘곽 목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렇게 하고서 곽 목사님에게 설교를 들을 거야? 이 사람. 정신이 나갔구먼.”라고 야단을 치자, 그 젊은 장로님이 그 자리에서 싹싹 빌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연노하신 장로님들 앞에서 권위를 세워 주는 바람에 거기서 훌륭하게 15년을 잘 목회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장로님들이나 중직들이 저의 영적 권위를 잘 세워주심으로 은혜 가운데 30년 목회를 잘 마쳐가게 하신 것처럼, 앞으로 후임자가 오더라도 여러분 모두는 그 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소신껏 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십시다. 물론, 항상 좋은 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넘어야할 난관의 산이나 문제의 강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시험에 들지 말고 온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늘 승리하는 교회가 되십시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가장 경계할 일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요, 또한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떠한 시험이 오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가며 부흥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제 긴 여름이 지나고 후반기 4개월이 남았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헌금할 뿐 아니라 밖을 향해서 더 많은 선교와 봉사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되십시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할 뿐 아니라, 목회자 중심으로 더욱 협력함으로 더욱더 든든히 서가는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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