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12장에서부터 은사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은사 문제를 다루다가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은사의 문제를 사랑으로 풀어나가야 함을 말씀한 것이었다. 사랑만이 문제의 해결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하게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향해서는 사랑이 많다고 생각하는 반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옆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게 해야만 자기가 행복하기 때문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무슨 책이나 세미나에서는 자기가 행복해지려면 옆의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결국 사랑이라는 것도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구를 도와준 결과로 마음의 뿌듯함을 즐기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말로는 ‘무조건적 사랑’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게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쏟아지듯이 우리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도 인간이 중심된 사랑이어서는 안된다. 인간적인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의 유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다. 아니 사랑 그 자체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을 말한다. 나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형제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질 못하다. 무엇을 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갖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하고 싶은 게 사람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결국에는 나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다.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사랑이란 무엇을 기초로 한 것인가를 잘 가르쳐 준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
복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복음이란 복잡하지 않다. 아주 단순하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단순한 것을 못 미더워할 때가 많다. 그래서 뭔가를 첨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첨가할 것이 없다. 이것이 완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성경대로’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자.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당신 스스로 말씀해 약속해 놓으시고,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이 한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언제 인간이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인간은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 했었지만 자기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는 결국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된 것이라곤 전혀 없다. 인간이란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밀물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겠다 싶으면 썰물처럼 모두 도망가 버리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게바와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자기에게도 보이셨다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주께서 몸을 보이셨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외면했던 자들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사랑하는가를 물으신 것이었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한 자들이다.
인간은 십자가을 이해함에 있어서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신을 잘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갈 2:20, 갈 5:24).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활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할 때가 많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서 ‘나도 다시 산다’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을 되새기며 자기 애착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사를 행할 때에는 자기를 드러내는 쪽으로 행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 등 모든 행위를 할 때에도 자기를 증명하는 쪽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쪽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부활은 주님만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고백은 부활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지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8)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고백했던 것이었다(9). 부활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으니까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차원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시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라고 했다(10). 이것은 고린도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믿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믿음이나 고린도교인들의 믿음이 동일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 역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남들은 보지 못한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는데 자신은 부활을 보는 영광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만삭되지 못한 자와 같이 못난 자신에게까지 부활을 확증시켜주셨던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 수 없고 주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수고를 해도 자기가 수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희한한 체험도 할 수 있다. 바로 바울이 바로 그런 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지고 자랑삼아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고백했다.
부활은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주님이 살아계심이 어떻게 증명되는 것인가?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꼭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슨 환상이라도 보아야만 되는 것인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주님의 살아 계신 증거는 주를 핍박했던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 나머지 자기가 많은 수고를 했지만 자기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신 주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했다(10).
오늘날도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그 증거는 자기의 죄를 인정할 줄 모르던 자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를 사랑하던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자기가 수고한 것을 확대시키던 자가 그 모슨 수고를 주님의 은혜로 돌리는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부활에 동참한 자들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가 능력이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주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세상에서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비록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을지라도 내가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능력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는 능력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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