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사랑이 없으면/고전13:1-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7:49

사도 바울은 12:31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의 ‘더욱 큰 은사’는 실제로는 ‘더욱 큰 은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더욱 큰 은사들이란 사랑으로 행해지는 은사를 말한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있다.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은사는 흔히 생각하듯이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과 같은 특별한 현상만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12:3).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것은 곧 은사이다. 하지만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 31절에 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한다.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랑으로 시행되는 은사이다.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기 위하여 봉사하도록 주어졌다. 그렇다면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쓰여야 할 이런 은사들은 마땅히 사랑이 기초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런 은사들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사용되는 일이 많이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문은 은사와 연결되어 있다. 본 장의 바로 앞인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에 대한 내용이다. 고린도교회에는 다양한 은사가 있었다. 이런 다양한 은사들이 잘 사용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고린도교회에서는 은사들이 잘못 사용되고 있었다. 은사나 직분에 대하여 오해하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사랑의 기초 없이 은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런 이유로 바울 사도는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 12장 31절과 연결되는 것으로 은사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예찬하는 사랑장이다. 이 13장은 12장, 14장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12:31에서 ‘사모하라’(ζηλουτε)를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하여 13장을 설명한 후 다시 14:1에서 ‘사랑을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διωκετε την άγαπην, ζηλουτη δε τα πνευματικα)를 사용하여 현재 명령형을 두 번 씀으로 자신의 이전 논리로 다시 복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사용하여 12장과 14장을 연결시키기 원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바울은 12~14장에서 교회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가운데, 13장에서 사랑을 찬미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은사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르치기 원한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의식하고,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은사를 사모하되 교회를 세우는 정신으로 사랑으로 은사가 시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일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12:31에서 ‘사모하라’(ζηλουτε)를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랑이란 어느 한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순간 순간마다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분 좋으면 사랑한다고 말하다가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워하기를 잘한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자기가 자기 소유화하려는 욕구가 있다. 길에 가다가 좋은 차를 보면 그것을 사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면 자랑하고 싶어진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이나 소유화하려고 한다. 소유화하려는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생각에 바르게 살았다고 여길 때 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게 된다. 그래서 바르게 살지 않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 소유가 있을 때 그것을 경쟁의 도구로 삼게 된다. 그래서 신앙을 가져도, 은사를 받아도 그냥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가지지 못하거나 받지 못한 자들이 눈에 띄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경쟁의 도구로 삼곤 한다. 많이 배운 사람은 그것을 은근히 드러내기를 원하며, 많이 가졌으면 은근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 세상적(?)인 것들을 가지고 함부로 자랑할 수는 없다. “나는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다.”, “나는 외국에서 사온 비싼 옷을 입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랑하다가는 당장 ‘믿음이 없는 사람’ 또는 ‘세상적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래서 좀 더 그럴듯한 것으로, 더 신앙적인 것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기도하는 것’, ‘성경을 많이 읽는 것’,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큰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 등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다 좋은 것들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것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차별화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성경을 많이 읽었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직하게 살았는데, 저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나는 성경을 많이 읽는데 저 사람들은 뭐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이런 식으로 은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고린도교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어떤 자세로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를 말씀했다.

여기서 바울은 ‘~~일지라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이것들은 흔히 사람들이 최고라고 여기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아름다운 말, 지식과 믿음, 열정 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은가?

‘‘천사의 말’은 ‘천사의 혀들’을 말하는데, 당시에 방언은 천사들의 언어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말 그 자체를 찾지 않으신다(1).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 그 자체를 중요하게 보지 않으신다(2). 자신에게 있는 것, 심지어는 자신의 몸까지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는 그러한 열정 자체를 찾으시는 것도 아니다(3). 그러면 무엇을 찾으시는가?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는가를 물으신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문구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사랑을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것은, 사랑이 없을 때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자체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뜻이 아니요, ‘내가’ 소리 나는 구리가 되고 ‘내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 없는 방언은 ‘내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1절의 ‘천사들의 혀들’(ταις γλωσσαις των άγγελων)에서 보이는 것처럼 당시에 방언은 천사들의 언어로 생각되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헬라 신비 종교의 광란 의식 때 쓰이는 도구들이었다. 그러니까 만일 내가 천사들의 언어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 ‘방언’이 쓸모없는 것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내가’ 아무런 쓸모없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밀과 지식, 이적을 행하는 은사, 자기희생 등의 최상의 윤리적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벗어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세우거나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은사를 가졌다고 교만을 부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서로를 세워 주는데 은사가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하락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은 인간 본성을 찌르는 말씀이다. 너무나 정곡을 찌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들은 곧잘 ‘아름다운 말’을 추구한다. 그것을 함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뭇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어 한다. ‘비밀’이나 ‘지식’ 등을 갖기를 원하며 ‘큰 능력(?)의 믿음’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사모하곤 한다. 집회에 가면 방언, 믿음, 열정을 가지라는 내용이 대부분 아닌가! 말, 지식, 믿음, 열정, 이런 것들에 의해 신앙이 평가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 너무나도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름다운 말을 찾지 않으신다. 우리의 열심과 능력, 산을 옮기는 믿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 불사르는 열정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기초되지 않은 은사에는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의 흔적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을 보이려고 애쓴다. 내 지식, 내 믿음, 내 열정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 열정을 가지고 만족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 형제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사랑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쏙 빠진 껍데기들만 추구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이러한 은사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주님을 세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세우기 위한 것인가? 만일 주님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사랑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사랑이 기초되지 아니하게 된다.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기도는 얼마나 하는가?”, “성경은 얼마나 읽는가?” 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 우리는 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어떤 행위나 은사들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떳떳한가를 확인하려는 버릇이 있다. 기도를 했기 때문에, 헌금을 했기 때문에, 청소를 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은 것이다. 보다 큰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유화하기 때문에 이렇게 자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알고, 주께서 주신 은사를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데 내 몸이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화려한 말이나 자기의 지식, 믿음, 열정 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해서는 안된다. 다만 사랑에 기초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기도했느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가?’가 되어야 한다.

‘금식을 몇 일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가?’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헌금을 얼마나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은사를 소유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알고 사랑으로 섬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사랑으로 하라. 누구에게 식사 대접을 할 때, 비록 비싸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맘 편하게 먹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싼 것 사주면서 먹는 사람 앞에서 핀잔을 준다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고린도교회는 음식을 사주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그런 식이었다. 정녕 중요한 것은 사랑이 기초가 되는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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