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부활이란 세상의 상식을 벗어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보았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3, 4). 구속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지금의 우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
구약에는 첫 열매에 대한 말씀들이 나온다(출 23:19, 신 26:1ff). 구약에서 첫 열매란 맏물을 의미한다. 첫 열매란 단순히 시간적으로 맨 처음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의미한다. 즉 첫 열매란 추수할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결실기에 있는 모든 곡식은 같은 시간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열매를 맺는 것이 있고, 또 늦게 열매를 맺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맨 처음 것을 요구하셨다. 맨 처음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은 모든 곡식의 대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헌금이나 새벽기도 등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새벽기도 역시 하루의 삶이 다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대표로 죽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로 부활하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1-22)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은 바 되었던 우리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다시 살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천국은 우리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가고, 안 가는 것은 누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천국으로 향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요 14:6)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누구를 따라가느냐?’, ‘누구와 함께 하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실베스타 스탤론이란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이라잇(Daylight)이란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보면, 뉴저지와 맨하탄 시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저터널 안에서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사고가 나게 된다. 그런데 그 사고로 유독폐기물을 실은 차가 폭발하게 된다. 그 폭발은 대단해서 그만 터널을 무너지게 만든다. 그로 인해 그 터널을 지나던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 갇히게 된다. 양쪽 출구는 막혀있고, 수압에 의해 터널 안으로는 물이 새어 들어온다. 산소는 점점 줄어 들어간다.
그런 급박해진 상황이 벌어지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주인공이 선택한 길을 따라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는 주인공과 반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즉 주인공과 함께 한 사람들과 주인공과 함께 하지 않은 사람들로 나뉜다. 그 결과 한 쪽 부류는 모두 살게 되고, 다른 한 부류는 모두 죽게 된다.
그러면 과연 누구를 따른 사람들이 살았고, 누구를 따른 사람들이 죽었을까? 다시 말해서, 누구와 함께한 사람들이 살았으며, 누구와 함께 한 사람들이 죽었을까?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다. 당연히 주인공을 따랐던 사람들은 살았고, 주인공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따라가면 살게 되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죽는 법이 거의 없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고 죽는다. 그러나 주인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따라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구원이란 무엇을 하느냐 하는 싸움이 아니다. 누구를 따라가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역사의 확실한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마귀와 함께 하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결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싸움이 아니다. 우리가 잘났는가, 못났는가 하는 싸움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배웠는가 못 배웠는가, 가졌는가 못 가졌는가도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행위나 지위 등 인간에 의한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옥에 가는 것은 길을 잘못된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누군가가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죄를 안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른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말씀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일부러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은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과 정반대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셨다. 성령이 임하신 것은 우리에게 소위 능력(힘)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셨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고, 또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요 1:1-3). 그런 예수님에게 더 이상 무슨 능력이 필요했겠는가?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신 삶이었음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세상에서 좋게 보이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삶이었다.
예수님의 길은 세상과 반대 되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길은 자연스럽게 고난의 길이 되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상의 사고와는 전혀 반대가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한글KJV)
동행이란 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품은 채 같은 길을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고생’의 의미하지 않는다. 고생이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고생은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 또한 고생은 얼마든지 세상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이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길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고난은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야만 되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보상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에 동참한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그 삶은 고난의 삶이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부활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간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사도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부활은 단순히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자기가 죽어지는 삶으로 증거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었다. 우리의 부활 신앙 역시 지금 여기에서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신앙을 옆 사람과 비교하곤 한다. 옆 교회와 비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부족함도 옆 사람과 비교하여 합리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옆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죽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이다.
부활이란 우리가 죽은 후에 언젠가 주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부활이다’(요 11:2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 부활의 삶은 우리를 고생이 아닌 고난으로 이끈다.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능히 고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고생을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기뻐하는 것이다. 일부러 고생하려고 하지 말고, 고난에 동참했음을 알고 살아가라. 이런 믿음이 곧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바울의 고백이었음을 기억하자. 부활은 지금 매일 죽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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