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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 직분의 계급적 이원구조: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작은샘 큰물줄기 2016. 11. 27. 19:23

 

 

 교회 직분의 계급적 이원구조: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용복/ 침신대 교수


Ⅰ. 서론: 평신도 문제

현대 교회직분의 계급적 이원구조, 즉 성직자와 평신도의 문제는 오늘날 평신도운동에 대한 좀더 전향적인 신학적, 목회적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현대 교회 안에서 평신도와 성직자의 갈등 혹은 계급적 이원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평신도와 성직자의 계급적 이원구조가 교회 안에 자리 잡았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먼저 검토하고, 이 이원구조가 안고 있는 신학적인 문제점과 그에 대한 원인 분석, 그리고 해결 방안 등을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일반적으로 평신도 문제는 목회현장에서 볼 때 대단히 민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현대 교회 안에 평신도와 성직자란 대칭적 개념이 만연해있는 현상은 분명 성서적인 교회를 실현하는데 커다란 장애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헨드릭 크레머(Hendrik Kraemer)가 「평신도신학」이란 책에서 평신도 문제를 “시대의 징조”(signs of time)라고 부른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Hendrik Kraemer, A Theology of the Laity (London : Lutterworth Press, 1958), 18.
오늘날 평신도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은 평신도가 객체가 아니라 주체 혹은 행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나 대상으로 전락하는 문제는 대체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이원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계급적 이원구조는 성직자를 주체로, 평신도를 객체로 분리시키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런 이원적 시각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분리시켜, 전자를 더 중요하고 거룩한 부류에 속하게 하고, 후자를 덜 중요하고 세속적인 부류에 속하게 한다. 심지어 평신도는 마치 성직자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하면 사실 평신도의 역할은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성직자의 역할에 비해 결코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활동 범위와 사역의 내용을 놓고 볼 때, 성직자의 활동 범위는 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평신도는 교회 안과 밖을 모두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성직자를 보조하는 수준으로 전락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직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목수로 부름 받은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핵물리학자가 성직자보다 더 열등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성직자인 셈이다. Paul Stevens,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서울: 한국기독교학생출판부, 1992), 39.

평신도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배경에는 평신도의 의존적 신앙과 성직자의 잘못된 목회철학이 다같이 한 몫 했으리라 본다. 채희동 목사는 「교회가 주는 물은 맑습니까」라는 책에서 평신도와 성직자를 대조적으로 비교하면서 다소 과격한 목소리로 현대교회의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현대교회는 이미 시장화되었다. 현대교회의 장사꾼들은 교인들이 아니라 성직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아직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선량하며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이지만 교회지도자들은 장사꾼이요, 모리배요, 자본가들이다. 기발한 상품을 개발하여 교인들을 이용하여 예수와 구원을 내다 판다.

이런 비판은 너무 주관적이라 일반화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진단한 하나의 고발임에는 틀림없다. 한국 교회는 사실 평신도보다 성직자들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글도 어쩌면 “평신도 문제”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성직자 문제”로 말문을 열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신도와 성직자의 문제, 어느 쪽이 문제 발생의 출발점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물고 도는 상관 관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평신도와 성직자 직분의 계급적 이원구조에 있다. 성직자는 상층 구조, 평신도는 하층 구조, 성직자는 베푸는 주체, 평신도는 받는 대상이라는 이원구조가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사실 우리 가운데 평신도와 성직자의 차이를 신분상의 존재론적 차이로 인식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구든 그 차이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로 인정한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평신도가 일정 기간 신학수업을 받고 정해진 최소한의 실습 기간을 거쳐서 목사로서 안수를 받게 되면, 그때부터 그는 교회 안에서 영적 지도자로, 목회사역의 전문가로 행세하게 된다. 마치 자격증을 따듯이, 실력이 있는 없든, 영성이 풍부하든 그렇지 않든, 인격이 훌륭하든 그렇지 못하든, 믿음이 좋든 나쁘든, 이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목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렇다고 신앙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너무나 엉터리 성경해석을 남발하고, 성도들을 잘 돌보기는커녕, 교회에 물의만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한국 교회 안에서는 감히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평신도는 별로 없다. 이미 두 계층간의 간격이 너무 벌어졌기 때문이다.

Ⅱ. 이원구조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초대 교회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이원구조가 존재했을까? 그 역사적 기원과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이원구조의 기원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단어는 본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했다. 가톨릭 신학자 콩가(Yves M. J. Congar)에 따르면, 평신도(laity)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라오스(laos)의 형용사 라이코스(lakos)에서 유래한 것인데, 특별히 라오스란 단어는 이방인과 구별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성직자에 해당하는 용어 클레로스(cleros)는 본래 제비뽑기의 “심지”를 의미했다고 하는데, 제비뽑기와 관련된 “몫” 혹은 “유산”을 뜻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단어였다고 하니, 어원적으로는 평신도와 성직자란 개념이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크레머도 “성경에는 ‘성직자’라는 특정된 단체에 관한 개념이 아무 데도 없다”고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라오스’와 ‘클레로스’ 개념에 관한 성서적 내용과 의미는 교회 역사에서 형성된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의미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결코 이원적 계급 구조를 이루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1세기 말경,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평신도라는 단어가 “성직자”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Yves M. J. Congar, Lay People in The Church: A Study for a Theological of Laity (London: Geoffrey Chapman, 1959), 1-2.
대체로 이른 시기부터 라오스란 말은 신약성서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크레머의 설명에 따르면, 라오스 혹은 라이코스는 성서적 의미로부터 변질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단어에 대한 고대 사회의 비하된 세속적인 용법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로마의 도시국가에는 하나의 행정조직 안에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나는 클레로스(kleros)라는 장관이요 다른 하나는 라오스라는 시민이다. 이 클레로스에서 클러지(clergy), 즉 오늘의 성직자라는 의미가 나오고, 라오스에서 평신도가 형성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성직자라는 닫혀진 신분 계층이 일반 회중과 대립된 존재로 대두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서의 용례와 다른 이원화된 구도가 본격화된 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였고, 이것은 중세 로마교회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Kraemer, 53.
이런 현상은 스티븐스의 지적처럼, 교회가 세상의 지도 체제를 모방하여 세속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Stevens, 30.

특히 성직자의 교권은 아프리카의 감독 가운데 하나였던 키프리안(Cyprian, 200-258)을 통해 절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구원과 교회와 감독의 관계를 이렇게 선언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감독은 교회 안에,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감독과 같이 하지 않는 자는 교회 안에 있지 않다.” 심일섭, 「平信徒神學과 韓國敎會」 (서울: 한글, 1997), 61.
키프리안의 이와 같은 파격적인 진술은 특별한 성직자 계급을 낳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 뒤 이런 유형이 고착된 중세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중심주의는 교회의 삶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레지 맥닐(Reggie McNeal)은 이런 현상을 “물의 흐름은 방향을 바꾸어, 좁은 수로를 비집고 나아갔다. 보편적 제사장직은 성직자들을 위해 예비된 성직자 중심적인 제사장직에 길을 양보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Reggie McNeal, “전신자 제사장직,” 「침례교신학의 흐름」, 폴 바스든 편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301.

로빈슨(W. Robinson)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라오스요,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클레로스”라고 말한 것처럼, Kraemer, 52.
성서적 교회에는 결코 성직자와 평신도가 지금처럼 계급적 신분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신약성서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기에 앞서 분명히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불렀고,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사실 구약시대에 통용되던 제사장의 계급구도는 신약시대에 와서 끝이 났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과 같은 존재가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제사장과 같은 존재이니 교회 안에 특별한 성직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Oscar E. Feucht, Everypne A Minister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94), 64.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이원적으로 계급화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계급화되지 않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몸” 모델로 설명했던 것이다(엡4:15-16; 5:23).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비유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지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특정 지체가 다른 지체보다 더 신분적으로, 본질적으로 고귀한 것은 아니다. 모두 하나의 몸을 연합하여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몸” 모델은 로마 제국의 계층 구조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상실되었고, 기독교 문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런 변화는 축복이기보다 저주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다. Melvin J. Steinbron, 「평신도 목회자를 깨우라」, 홍용표 옮김 (서울: 서로사랑, 1999), 69.
교회의 지도계급층으로 변모한 성직자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담당해오면서, 한편으로는 교회의 구심점이 되어 이단 사상을 차단하고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공헌한 바도 있지만, 그 부정적 결과는 교회의 온갖 부정과 부패가 만연케 되는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마틴 루터가 1920년 8월에 발표한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혁파하고자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로마 가톨릭의 고질화된 성직중심주의 혹은 성직패권주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세 가지의 “담”을 허물고자 했다. 첫째는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의 담이고, 둘째는 성서해석자인 교황와 교황무오설의 담이며, 셋째는 교황과 공의회의 담이다. Martin Luther,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지원용 옮김 (서울: 컨콜디아사, 1993), 28-46.
이런 상황에서 전신자 제사장 직분을 선포한 것은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루터의 도전이요 영적 탁월함이었다. 루터가 “전신자 제사장직” 개념을 강조하면서, 성직자의 이원화된 구조를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자:

“司祭,” “승려,” “靈的인 것” 및 “성직자”란 말들이 그릇된 용법에 따라 현재 “성직자들”이라 불리우고 있는 소수 사람들에게 잘못 적용되고 있다. 성서는 현재 교황, 주교 및 군주라고 당당하게 불리우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에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믿음과 크리스찬의 자유를 가르쳐야 할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들,” “종들,” “청지기들”이란 명칭을 붙이기는 하나, 이런 칭호들을 특별히 구분하지는 않는다. Martin Luther, “크리스찬의 자유,”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314.


성직자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또한 루터는 주의만찬에서 잔을 나눌 때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도 폐지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고 표현한 것은 가톨릭의 잘못된 성찬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루터는 포도주를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두 계급의 격차를 크게 해소시켰다. Martin Lutter, “교회의 바벨론 감금,”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174-5.

하지만 루터가 이 개념들을 철저하게 적용하는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루터의 직분론이 오늘날 교회 사역에 만족스러운 개념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가 교회의 성직자 직분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 없었으며, 사역이란 개념 속에는 질서와 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격차를 그대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George Peck, "The Call to Ministry: Its Meaning and Scope," The Laity in Ministry, George Peck & John S. Hoffman eds. (Valley Forge: Judson Press, 1984), 87-8.
그는 모든 신자가 공식적으로 교회의 봉사를 맡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칫 교회의 무질서와 혼란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직분을 아래로부터의 직분과 위로부터의 직분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성직자 직분의 존재근거가 나온다. 루터에 따르면 “공동체는 한 개인을 그 특별한 직분, 즉 말씀과 성례전에 봉사하는 일을 위하여 임명”할 필요가 있고, “부름을 받은 목사와 평교인 사이에는 직분상의 구별만 있을 뿐이며, 존재의 구별이 아니라, 사역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루터가 말씀 선포와 예전을 집례하는 공동체의 대리자를 성직자로 규정하는 한, Paul Althaus, 「마르틴 루터의 신학」, 구영철 옮김 (서울: 성광문화사, 1994), 449-56 passim.
교회 안의 계급적 이원구조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교단에 비해 성례전을 강조하지 않았던 침례교회는 어떠했는가? 불행히도 침례교회 역시 계급적 이원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19세기 남침례교 신학자들은 대체로 집사들이 일반적인 직무에 종사하는 반면, 목사들은 교회의 “영적인 직무”를 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목회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훈련받은 본질적인 사역들 외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Brad Creed, “교회의 지도자들,” 「침례교신학의 흐름」, 268.
「20세기 목회자」란 책을 썼던 캐롤(B. H. Carroll)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는 교회 지도력의 관계에서 평등과 협력을 강조했지만, 목사와 교회의 관계를 “장군과 군대의 관계”로 비유했다. Ibid., 274-6.
크리스웰(W. A. Criswell)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는 「목회자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설교자는 조직가이다. 그는 장교들과 군대들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말을 오르는 장군이다. 그는 회사의 성장과 확장을 책임지는 회사 경영인이다.” Ibid., 281.
또한 최근 100여 년에 걸쳐 집사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남침례교인은 호웰(R. B. C. Howell, 1801­1868)은 「집사직」(The Deaconship)에서 목사와 집사 사이의 역할들을 이원구조로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가 교회의 모든 영적인 것들을 감독하며.... 그런 식으로 집사들은 교회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관리하는 자들이며, 또한 집사들이 당연한 권리로서 그러한 일들을 충실하게 관리한다.” Ibid., 283.
목사와 집사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들은 교회를 여전히 계급적인 이원구조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크리드는 “몇몇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교회 구조와 정체를 재고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목사의 신성한 사역과 집사의 세속적 역할간의 이분법은 거의 100년간 출판물을 통해 계속 주장되었다”고 평가한다. Ibid., 286.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신도와 성직자의 계급적 이원구조를 깨기 위한 노력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을 “제2차 종교개혁”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1차 종교개혁이 성경을 교인들에게 제공한 것이라면, 제2차 종교개혁은 사역을 교인들에게 안겨준 것이라 할 수 있다. Steinbron, 71.
이후 일부 신학자와 교회들은 신약성경의 원리를 재발견하고 평신도에게 사역을 되돌려주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교회들은 여전히 계급적 이원구조 속에서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고 있다. 여전히 평신도는 전문가가 아닐 뿐더러 성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때로는 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받지 못한 사람들,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초신자들을 일컫는 말로도 사용된다. 심지어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뿐 아니라, 일반성도 안에서도 직분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부분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의 연륜에 따라 평신도에서 권찰로, 권찰에서 집사로, 집사에서 권사로, 권사에서 안수집사로, 안수집사에서 장로로 신분상승이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평신도 안에서의 계급구조가 이미 뿌리깊게 고착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의 교회 형편이다.

Ⅲ. 이원 구도에 대한 목회적신학적 반성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각 지체가 연합하여 구성된다. 이 지체들은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코 존재론적 위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지체는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어떤 지체는 좀 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지체는 그 자체로 귀중하고 독립적이다. 몸의 특정 부위에 이상이 생긴다면 몸 전체는 고통을 당한다. 몸은 하나의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없다.
교회 역시 하나의 공동운명체다. 만일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결국 그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져야 한다. 성직자라 해서 책임을 다 떠맡을 수 없는 것이고, 평신도라 해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평신도만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또 성직자에게서만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평신도나 성직자 모두는 교회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평신도와 성직자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고 한다면, 마땅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평신도와 성직자는 함께 주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성직자는 지시하고 명령하고, 평신도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하수인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계급적 이원구조는 장기적으로 볼 때 교회를 죽이고 변질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이런 이원구조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세 가지 차원에서 근본 원인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1.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
첫째, 교회 안에 존재하는 잘못된 성속의 이분법은 계급적 이원구조를 낳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은 거룩한 일이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은 속된 일이라는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을 주로 하는 목사는 거룩한 신분이라 성직자(聖職者)요,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을 주로 하는 성도는 그냥 평신도(平信徒)인 것이다. 어떤 일이 거룩한 것이며, 어떤 일이 속된 것인가?  기도하는 일은 경건한 일이고, 구제하는 일은 속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한다. 속된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이다. 꼭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만이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사역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거룩한 일이다. 더 이상 목회자는 성직(聖職)을 가진 사람, 일반 성도들은 세속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원구조가 교회 안에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성직자는 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소명에 전념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고, 일반 성도는 대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행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성직자는 거룩한 부류의 사람이고, 일반 성도는 그렇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인식은 불식되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직자 제일주의로 만들거나 “성직자를 위한 교회”로 만드는 것은 계급적 이원구조를 더욱 극대화할 뿐이다.
메사추세츠주 힝햄의 제일침례교회 성도이며 평신도목회연구소 소장인 리챠드 브로홈(Richard B. Broholm)은 “전신자 제사장직”에 대해 설교하면서, “날마다 당신의 사역에서 신앙 가운데 살라”는 권고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교회의 구조와 성례전의 실천 때문에 교회 구조 밖에서 참다운 사역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계속해서 평신도가 소명감에 따라 행동하고 세속사회의 구조 안에서도 사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소명을 정당한 사역으로 교회가 “확증”하는 좀더 결정적인 방법이 마련되어야 하며, 그런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적응”하는 경험을 평신도가 할 수 있도록 좀더 의미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Richard R. Broholm, "How Can You Believe You're a Minister When the Church Keeps Telling You You're Not?," The Laity in Ministry, 22.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이분화된 성속 개념은 극복돼야 한다. 교회 안에 성과 속의 구분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교회의 직분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성직자는 성도들의 사역을 거룩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고, 성도들도 스스로 자신들의 사역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직분에서 성속의 개념은 평신도의 개혁의지를 가로막는 대표적 원인 가운데 하나다.

2. 설교와 성례전 중심의 예배
둘째,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예배에서 너무 크게 차지하는 설교와 성례전의 비중이 또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개신교가 가톨릭의 성례전적 예배구도를 버리고 설교 중심으로 전환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역으로 설교가 너무 강조되고 있는 개신교 예배는 또 하나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복음은 대체로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복음에 인격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설교는 여전히 복음증거에 중요한 수단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예배가 무엇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예배의 본질로 이해한다. 설교는 그 가운데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설교 중심의 예배가 될 때, 그리고 설교는 성직자의 고유 권한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때, 교회 안의 계급적 이원구조는 불가피하게 된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의 설교를 동일시하는 폐단까지 더해지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다. 하물며 성직자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한, 자신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쏟아낸다고 할 때, 어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깁스(M. Gibbs)는 「하나님의 얼어붙은 백성」(God's Frozen People)이라는 책에서 설교의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시장거리이며 심지어 감옥일 수도 있음을 알았다.... 설교하는 일은 사람들이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곳에서만 효과적으로 계속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의 정상적인 설교는 질문이나 토론이 금지된 건물 안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특별한 작업이라고 여기는 이상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M. Gibbs & T. R. Morton, 「오늘의 平信徒와 敎會」, 김성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143.


설교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특별한 작업이 아니라는 말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다시 말해서 설교는 성직자가 전매특허를 낸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신도에게도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성직자만 성경을 해석하고 전할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로마 가톨릭은 성경 읽는 것을 일반 성도에게 금지시켰던 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다.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성경이 주어졌지만, 아직도 우리 교회 안에는 성경에 대한 해석을 성직자가 지나치게 독점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신자로 하여금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는 침례교회의 전통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 귀중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직자의 설교도 비판받아야 한다. 어떤 목사는 설교를 한 뒤에 자신의 설교 내용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로부터 건전한 비판을 스스로 자청해서 받는다고 한다. 성직자의 권위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실험정신이다.
인터넷 신문 「뉴스엔조이」에 실린 “누가 <설교비평>을 두려워하랴?: 정장복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에서 평신도로 보이는 한 성도의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글은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제까지 설교에만 의지한 신앙인들, 목사만 바라보는 신앙공동체로 남아야 합니까? ... 사도 바울조차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종종 설교의 단에서 행해지는 지식의 폭력으로 인해 심한 양심의 걸림돌과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는 겁니다. “누가 <설교비평>을 두려워하랴?: 정장복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 「뉴스엔조이」, [인터넷자료];http://www.newsnjoy.co.kr/rnews/pastorate-1.asp?cnewsDay=20020430&cnewsID=12&opNo=44; 2002년 5월 3일 접속.


성직자의 설교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자의식이 잘 반영된 글이다. 또한 이 글은 성직자의 설교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성도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이 성직자의 설교에 대한 모든 성도들의 반응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이런 목소리가 결코 교회 안에서 작은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Ken Blue, 「교회에서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 노용찬 옮김 (서울: 하늘기획, 1997)의 일독을 권한다.

또한 교회가 성례전을 예배의 중심으로 간주하게 되면 제사장, 즉 성찬식을 집례하는 계층이 구조적으로 교회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관장하고, 배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의 상층구조를 이루게 된다. 마땅히 은혜의 수혜자인 일반 성도들은 은혜의 대상이고 지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만찬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의식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크레머는 교회 안에서 특수 신분계층이 형성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를 들었다. 성직자는 성례전을 통해 은혜를 공급하는 주체가 되고 평신도는 그 은혜를 받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Kraemer, 51.

「21세기를 행한 한국 교회와 실천신학」에서 “열린 예배”를 위해 제시한 네 가지 변화 가운데 설교중심의 예배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전 중심의 예배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일웅,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와 실천신학」 (서울: 여수룬, 1999), 326.
평신도운동이란 차원에서 볼 때는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둘 다 성직자의 특권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직자의 특권으로 인식되고 있는 안수와 축도권도 재고해 볼 문제다.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는 축도를 할 수 없다거나, 안수할 수 없다는 성직자의 특권의식은 평신도운동이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산이다. 다음과 같은 주장이 아직도 한국 교회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면 평신도운동의 갈 길은 요원할 뿐이다: “평신도 가운데 축도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교단 신학교에서 일정한 신학 훈련과 목사 준비 과정을 마친 다음에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준비 과정과 훈련을 거치지 않고 목사의 사역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은 억지와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안종철, 「열린 목회와 예수 공동체」 [서울: 쿰란출판사, 1997], 202).

교회는 설교와 성례전 중심에서 탈피해야 한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설교와 성례전으로 인한 성직자의 특권의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교회가 왜 모였는가? 교회가 모인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구원받은 신자들이 그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나가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다. 그 일을 하는데 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해주고, 성직자와 평신도가 합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성직자의 우월의식이나 특권의식은 제거돼야 한다.

3. 목자-양의 은유
셋째,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자와 양의 은유다. 이 은유는 대체로 성직자를 목자로 평신도는 양으로 분리시키는 하나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성경에는 이 은유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지 어떤 사람은 성직자들은 “목자의 모델”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 Glenn Wagner, 「하나님의 교회 vs. 교회 주식회사」, 차성구 옮김 (서울: 좋은 씨앗, 2000). 이 책에서 와그너는 지도자와 목자 모델을 비교하면서, 지도자 모델은 교회 주식회사를, 목자 모델은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어간다는 논조를 펴고 있다.
하지만 본래 이 은유가 일차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23:1)요, 이스라엘의 목자(시80:1)시며, 예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요10:11)라고 고백하고 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라 했고, 베드로전서 2장 25절은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는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직자가 평신도의 목자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목자를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악한 목자를 책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겔34: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유12).
하나님만이 우리의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양이다. 하나님 말고 누가 감히 우리의 목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장이시니(벧전5:4), 그의 사역을 맡은 성직자들은 작은 목자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요21:15) 하셨으니, 베드로의 목자 역할을 위임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할의 위임을 말하는 것이지 신분의 상승 혹은 존재론적인 차이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하라”는 것이다. 성직자를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간주했을 때, 대 그레고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고위 성직자의 행동은 평신도의 행동보다 훨씬 뛰어나야 하는 것은 목자의 생활이 양떼와 분리된 것과 같다.” Philip L. Culberston and Auther B. Shippes, 「목회자와 목회: 초기 교부시대 목회자상을 적용한 현대의 목회학」, 이억부, 김종 공역 (서울: 은성, 1997), 330.
목자와 양의 관계를 존재론적인 차이로 받아들였을 때,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교황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를 구축하고 그 결과로 온갖 권력과 종교적 만행을 행사하는지 않았던가? 그런 까닭에 종교개혁자들은 “전신자 제사장직”을 외치며 뛰쳐나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는 옛 교황의 과오를 다시 범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실로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와 카리스마를 전횡적으로 행사하는 개신교회의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그런 일들이 회중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침례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같은 맥락에서 성직자가 평신도의 규범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위험한 신앙행태로 보아야 한다. 깁스와 모튼은 성직자의 중앙집권이 낳는 위험한 결과 가운데 하나를 “목회자가 평신도의 경건성의 원형이요 모범으로 간주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Gibbs, 67.
그리고 그는 목사를 모방하는 것은 “평신도 생활의 발전과 교회의 증언을 위해서는 비참한 일”이라고까지 비판한다. Ibid., 71.
이것은 맞는 말이다. 마치 양이 목자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듯이, 평신도가 성직자를 비판없이 추종하는 것은 평신도의 정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고, 자기 임무를 망각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성직자는 성도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뿐이지 스스로 성도들의 목적지 내지는 구심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코 평신도는 목사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등한 관계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런 주장이 교회의 직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의 계급적 직분을 반대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교회의 봉”이라고 자조하는 세간의 말을 꼭 빗대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을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교회의 봉”은 고사하고, “성직자의 봉”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Ⅳ. 평신도운동의 가능성과 방향

평신도든 성직자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야 할 과제가 있다. 더 이상 어린아이로 방치되는 일이 용납되지 않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다(고전13:11; 엡4:14). 평신도운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목표는 평신도들이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신앙을 갖니 않고, 장성한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1. 평신도 주체의 신학
평신도운동은 평신도를 위한(for) 신학이나 운동이 아니다. 또한 평신도운동은 평신도에 관한(of) 신학이니 운동도 아니다. 평신도운동은 평신도에 의한(by) 신학이며 운동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의 눈이 떠져야 한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평신도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비주의 운동의 주창자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영향을 받은 게르하르트 그루트(Gerhard Groot, 1340-1384)는 평신도 중심의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을 창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도원을 개혁하고 교육과 경건을 주도하게 되었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에라스무스(Erasmus), 루터 등도 이 평신도 중심의 형제단 출신들이었다. 심일섭, 63-5.

평신도운동은 현행 교회론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재검토를 요구한다. 크레머는 평신도신학 운동이 “단순한 환상이나 힘으로만 머물러 있을 뿐이요, 현존하는 교회론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가 없다고 한다면, ‘평신도 신학’이라는 것은 결국 굳어진 혈관 속에 효과적인 주사나 놓는 정도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Kraemer, 81.

교회는 오랜 동안 지나치게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 고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개발된 평신도신학이 주장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성직자-평신도의 이원구조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도전을 받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는 마리아 해리스(Maria Harris)의 말은 적절한 지적이다. Maria Harris, "Questioning Lay Ministry," The Laity in Ministry, 35.
교회사역을 위한 그녀의 구체적인 제안은 우선 교회 언어에서 “평신도”(“평신도 사역”), 혹은 “성직자”란 단어도 제거한 다음, 교회사역을 다원화하고, 안수의 본질적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Ibid., 41-3.
그녀의 마지막 진술처럼, “‘평신도’ 사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교회의 재-창조를 시작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Ibid., 45.

그런데 대부분 평신도의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성직자가 평신도를 훈련시킬 주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티븐스는 프랑크 틸라파(Frank Tillapaugh)가 「교회를 해방시켜라」(The Church Unleashed)에서, 전문적인 성직자가 해야 할 일은 일반 성도들을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평신도층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Stevens, 45-6.
과연 스티븐스의 비판처럼 성직자가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주체가 되는 것이 성서적인가? 평신도 사역을 향상시키기 위해 효과적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성숙하게 만들어 다 같은 사역자가 되게 하면 교회에서 평신도층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훈련의 주체는 성직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요 성령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교회를 준비시키는데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고 계신 분이다. 에배소서 4장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서 “마디”(ligaments)란 단어는 본래 “만지다” 혹은 “접촉하다”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 바울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성도 각 사람이 다른 성도들과 접촉하면서 몸의 기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성도 각 사람이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구조를 교회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Ibid., 42-3.
스티븐스는 이렇게 단언한다: “머리의 뜻은 여러 계층을(목사, 장로, 집사, 소그룹 리더 등) 통해서 중재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지체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다.... 교회지도자의 주된 역할은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각 지체가 머리와 스스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Ibid., 49.

결코 성도들이 성직자에 비해서 영적으로 무능하지도 않고 늘 지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라고 하거나, 또 한편으로는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후11:5)고 말한 대목에서 우리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성도와 사도는 바울에게 결코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한 백성이요, 그분의 양일 뿐이다.
한국 교회가 미신화되고 기복화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성직자들은 성도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다 보니 자꾸 기복신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한다. 성도들은 또한 강단에서 터져 나오는 기복신앙화된 복음을 들으면서 그렇게 변해간다고 불평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물고 들어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누가 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교회 개혁의 성패 90%는 성직자에게 달려있다고 주장하지만, 이평소, 「교회 어떻게 새로워져야 하나」 (서울: 대장간, 1995), 34-5.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진단인지는 의문이다.
이 일은 상층구조의 성직자보다는 하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치의 민주화도 아래로부터의 시민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평신도가 먼저 일어나면 성직자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성직자의 자정능력을 완전히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를 적대 혹은 대립 구도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계급적 이원구조 속에서는 기득권에 속하는 성직자들로부터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자각한 것이고, 그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평신도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 또한 평신도와 성직자의 개념을 제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현실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직분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직분의 차이는 역할의 차이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따름이다.

2. 구조의 패러다임 변화
휴스톤 서울침례교회의 담임목사 최영기는 평신도운동의 하나로서 가정교회 운동을 전개한다. 그가 제시하는 가정교회의 근거는 초대교회에서 모든 성도가 다 평신도요 모든 성도가 다 성직자였다는 데 있다. 그 증거로 바울은 사도였지만 평신도처럼 사역을 했고(살전2:9), 빌립은 집사였지만 사도처럼 침례를 주었다는 것과(행8:38), 각 도시에는 하나의 교회밖에 없었고, 각 도시마다 집집에서 모이는 수많은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내세운다. 최영기, 「가정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서울: 두란노, 1999), 40-2.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예배당이 없으니까 가정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회자가 없으니까 평신도가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이 없으니까 직접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Ibid., 43.

예배당이 없어서 가정에서 모였다는 식의 논리를 가정교회의 근거로 내세우기에는 빈약하지만, 예배당도 많고, 성직자도 많고, 성경도 완전하게 주어진 현대에도 여전히 신약성서적 교회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한다. 이정배는 이런 형태의 교회를 “살림공동체”라 부른다. 이 살림공동체는 교회를 가정이란 모델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는 교회란 용어가 희랍어 퀴리아케 오이키아(Kyriake Oikia), 곧 주님의 가정이란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살림행위(살림살이)가 이루어진다고 해석한다. 이정배, “평신도 신학의 전망과 살림공동체,” 「복음과 상황」, 1995년 1월호, 29.

문제의 관건은 교회 직분의 구조 변화에 달려있다.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살림공동체든, 평신도 사역자 양성도 실효를 거둘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 중심, 교회 중심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전문(유급) 사역자 중심에서 자비량 평신도 사역자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스티븐스는 깁스와 모튼의 견해에 따라 평신도의 사역을 디아스포라(diaspora) 교회형과 에클레시아(ecclesia) 교회형으로 나누고, 전자는 세상에서 후자는 교회에서 사역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 설명한다. Ibid., 31. 깁스는 이렇게 구분한다: “편의상 ‘A’ 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세상적인 평신도들은 주된 관심을 교회 건물 바깥의 세상에, 그들의 경력에, 상(商)거래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 역시 주로 이들 ‘세상적’인 중대사 속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평신도 유형 ‘B’라고 부를 ‘교회적’인 평신도들은 ...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주요 관심사는 교회와 교회기관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예리한 평신도 설교자이며 주일학교 선생이고, 모금하는 사람, 교회 상담자 등이다”(Gibbs, 「오늘의 平信徒와 交會」, 24).
이것은 결국 모든 평신도를 성직자로 만들고, 성직자는 자비량으로 사역하도록 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성직자를 사도 바울처럼 자비량 전문사역자로 전환하자는 발상은 현대 교회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실현가능성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서적 교회의 모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성직자 중심의 구조 때문에 빚어진 문제점들이 너무나 많이 노출되고 있다. 성직자의 주관적인 신앙형태가 모든 성도에게 강요되어 신앙을 획일화한다거나, 성직자 개인의 목회철학과 계획에 따라 교회의 유기체적인 관계가 무시된다거나, 성직자 사이의 경쟁의식으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이 수단화된다거나 하는 병폐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성직자-교회 중심의 목회방식이 그대로 답습되기 때문에, 평신도의 삶은 교회 안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교회 모임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성직자는 365일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평신도는 일주일에 6일은 세상에서 일을 한다. 구조적으로 삶의 패턴이 다르다. 그런데도 성직자는 성도들에게 자신들과 같이 교회 일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교회의 수많은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마치 신앙의 기준인 것처럼 강조한다. 이제는 평신도 중심의 신앙형태와 목회방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평신도가 신앙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구조적 변화가 불가피하다. 예배, 모임, 목회방식 등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평신도들도 신학적인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신앙의 이유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정연락은 이것을 “신학의 대중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정연락, 송인규 대담, “평신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한국교회,” 「목회와 신학」, 2002년 7월, [온라인자료]; http://www.durano.com/moksin/newmoksin/299207/m_dl.asp; 2002년 7월 5일 접속.
이제부터 일반 성도들도 성직자가 마음대로 성서를 잘못 해석할 수 없도록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신도는 성직자의 설교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직자가 마음대로 교회 행정을 독재하지 않도록 모든 성도들은 함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직자의 소유가 아니다. 교인은 최악의 경우 교회를 떠나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일반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모든 교회 회원들이 교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구조적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전문적인 사역자도 필요하고, 자비량 전문 사역자도 필요하고, 평신도 사역자도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목회를 생업으로 하는 전문 사역자 혹은 성직자보다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평신도가 더 존중되는 풍토가 교회 안에 조성되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믿지 않는 나라들을 복음화하려면, 보조받는 사역자들의 수를 줄이고 스스로 벌면서 생활하는 사역자들의 수를 늘여야 한다”는 스티븐스의 주장은 Stevens, 168.
현대 교회의 구조적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귀기울여야 할 충고다.  

Ⅴ. 결론

목회(ministry)는 봉사(diakonia)라는 말이 있다. 모든 성도들은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동시에 목회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다. Peck, 84.
게다가 교회의 선교 사명이 봉사와 함께 교제(koinonia), 복음 선포(kerygma)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면, 이 일을 수행하는 주체는 모든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성직자-교회 중심의 패러다임으로는 한국 교회가 새로워질 수 없다. 오히려 계속해서 성직자의 특권의식과 교회성장주의만 확산될 것이다. 평신도들이 일어나야 한다. 한국 교회는 평신도의 역할과 소명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직자뿐 아니라 평신도도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평신도의 섬김 대상은 성직자가 아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다 같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겨야 한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무게의 중심축을 성직자 독점상태에서 성직자-평신도 중심으로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직분에 대한 성속의 이분법적 인식을 불식시키고, 설교와 성례전 중심의 예배를 평신도 중심의 예배로 전환하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목자와 양,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 동등한 사역자의 관계로 개선해야 한다. 또한 그 반대도 성립한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날 때, 성속의 이분법적 인식이 불식되고, 평신도 중심의 예배가 가능해지고, 상호 동등한 사역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평신도도 좋은 성직자와 신학자가 될 수 있다. 성직자와 신학자도 좋은 평신도가 될 수 있다. 평신도 신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감회가 새롭다: “좋은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는 기독교인’(thinking Christian)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많은 전문 신학자들 이상으로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다! 전문 신학자는 그들 자신의 믿음을 생각하기보다는 타인들의 믿음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문 신학자들은 전문적인 지식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문 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전문 신학자가 된 것이다.” John B. Cobb, Jr.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 이경호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15, 18-9.

교회는 마치 교향악단과 같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동시에 다 중요하다. 지휘자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듯이, 성직자도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쉽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주자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없이는 교향악단의 존재는 무의미하듯이, 성도들의 주체적인 참여 없는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룬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이원구조가 극복돼야 한다. 그럴 때 섬기는 지도자, 본이 되는 지도자,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는 있으나, 명령하는 성직자, 상층 계급의 성직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하는 성직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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