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시사

[스크랩]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레는 프리메이슨!!!(퍼옴)

작은샘 큰물줄기 2019. 2. 24. 06:59

 

감리교 창시자들은 프리메이슨이었다


나는 우리 카페에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아주 충격적인 사실들을 폭로하여 왔다.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이라는 사실과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동생인 촬스 웨슬리의 아들이었던 사무엘 웨슬리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사실을 밝혔으며, 그 외에도 놀라운 사실들을 공개하였다. 이어 오늘은 또 다시 충격적인 정보를 공개하기로 하겠다. 그것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촬스 웨슬리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사실을 논하고자 한다.




1.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가문

우선 감리교의 기원을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상식대로 감리교는 존 웨슬리와 그의 동생인 촬스 웨슬리가 세웠다. 당시 존 웨슬리의 증조부는 바돌로매오 웨슬리(Bartholomew Wesley)였으며, 할아버지는, 존 웨슬리(John Wesley)였다. 할아버지의 이름이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와 같기 때문에 혼동이 없어야 할 것이다. 증조부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인 사무엘 아네슬리(Samuel Annesley)도 청교도 목사였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아버지는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로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 사제였다. 여기서 성공회를 바르게 인식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성공회는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종교로 로마 카톨릭과 유사한교리를 가지고 있다. 감리교(메서디스트)를 창시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6.17~1791.3.2)는 아버지(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수산나) 사이에서 19명의 자녀들 중에 열다섯번째로 태어났다. 자녀들 중에 9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10명의 자녀들만 성장했다. 그 중에 7자매들은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와 형 사무엘 2세, 그리고 동생 촬스 웨슬리 삼형제만 괜찮은 삶을 살았다. 감리교에서는 사회와 교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그들은 모두 프리메이슨들이었다.

존 웨슬리는 1720년 6월 24일 옥스포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Oxford University Christ Church)에 들어 가서 장학금(40파운드)을 받고 공부했다.

거기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등을 배웠으며, 라틴어시와 고전문학과 신학서적 등도 두루 섭렵했다. 당시에는 신학교가 따로 없었다. 그는 1725년 9월 19일 집사 사제(준회원)의 안수를 성공회 감독으로 부터 받았다.

그후 존 웨슬리는1726년 3월 17일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Lincoln College)의 교수로 선발되었으며, 1728년 9월 28일 존 웨슬리는 영국성공회 정회원 사제(elder, 신부)로 안수를 받은 후에 엡웟 교외에서 2년 동안 목회를 생활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 할 것은 ‘신성클럽'(Holy Club)과 존 웨슬리의 동생인 촬스 웨슬리이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와 그의 동생인 촬스 웨슬리는 제외하고는 감리교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신성 클럽(Holy Club)은 존 웨슬리의 친 동생인 촬스 웨슬리가 만들었다.

1729년 옥스퍼드 대학생이었던 찰스 웨슬리가 신성 클럽'(Holy Club)을 창립했다. 존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에서 신부로 안수(1728년 9월 28일)를 받은 후에 11월에 옥스포드로 돌아와서 신성클럽의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의 프리메이슨들은 신성클럽 운동을, ‘홀리클럽’ 운동을 홀리시티 운동으로 말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성시화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동생 촬스 웨슬리는(Charles Wesley)는 최초의 감리교도라고 말할 수 있다. 1729년 5월 5일에 쓴 편지에도 최초의 감리교도를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로버트 커크햄(Robert Kirkham),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등 세 명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형제는 성신클럽을 통해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면서 헬라어 원문 성경을 공부하고, 주 1회 교도소를 방문하여 자선 활동등을 했다.




3. 감리교 창시자들 프리메이슨과 접촉 및 관계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와 촬스 웨슬리 형제는 1735년 미국의 조지아(Georgia)주로 해외 선교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 존 웨슬리의 나이는 32세였다.

1735년에 존 웨슬리 형제는,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과 접촉하게 된다. 이 사람은 유명한 프리메이슨으로 군(軍)의 자선과 사업계에 성공적인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던 인사였으며, 1732년 미국의 조지아(Georgia)주의 식민지를 창설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두 형제가 프리메이슨이었던 이 장군을 만나게 된 것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장군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은 두 형제에게 조지아주의 식민지에 목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두 형제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두 형제는 거기에 동의하고, 존 웨슬리는 이주민들의 신부(목사?)로 활동하게 되었고, 동생 촬스 웨슬리는,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의 개인 비서가 되어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후 1738년 2월 1일 두 형제는 다시 영국으로 귀국하여 교회사적으로 잘 알려진 모라비안(Moravian)의 지도자인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자주 만나 신앙 상담을 했다. 이런 관계로, 피터 뵐러(Peter Boehler)와 존 웨슬리 두 사람은 1738년 5월 1일에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조직하게 되었다.

감리교 역사에 따르면, 동생 촬스 웨슬리가 1738년 5월 21일에 회심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에 회심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존 웨슬리는 1784년 2월 28일에 감리교회 독립 조직 선언문(Deed of Declaration)을 작성하고, 그해 9월 1-2일에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영국의 성공회에서 사제(신부)로 안수를 받은 바 있는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존 웨슬리 자신이 직접 안수하여, 감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임명했다.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하던 감리교의 지도자들도 존 웨슬리와 촬스 웨슬리처럼 프리메이슨들과 교류 협력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증거로는 미국의 감리교 재단을 설립했던 감리교와 감독이었던 제임스 C, 베이커(

James C. Baker)가 프리메이슨 33도라는 사실이며, 조선 말기에 덴마크의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미국의 감리교에서 파송한 조선에 파송이 되었던 감리교 선교사 크리스 젠슨(Kris Jensen)이 프리메이슨 한양랏지의 정회원이었다는 사실 등을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미 밝힌대로 감리교 선교사 크리스 젠슨(Kris Jensen)의 한국명 이름은 전선으로, 1897년 3월 14일 덴마크(정말국)에서 출생하였으며, 1956년 11월 20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는 개성에서 활동을 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감리교단에서는 크리스 젠슨을 선교사로 평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묘까지 관리를 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영향력으로, 장로교의 교회사를 보면, 성경의 무오성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감리교 계통의 아빙돈 주석 사건으로 교단들이 분열하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감리교 선교사들은 우리나라 선교 초기부터 은밀하게 한편으로는 성경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의 핵심을 부정해 버리는 공격적인 사상을 주입시켰다.

이 어찌 역사를 왜곡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카페에서 이미 촬스 웨슬리의 아들인 사무엘 웨슬리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제시 한바 있다. 이런 근거들에 따라 감리교는 프리메이슨들이 세운 교단이지, 결코 우리 기독교의 한파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감리교의 정통성을 위해 존 웨슬리와 그 동생 촬스 웨슬리 그리고 촬스 웨슬리의 아들인 사무엘 웨슬리를 칭송해 왔던 감리교도들을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할 것인가?




4. 미국의 조지아 주의 프리메이슨 랏지

귀족 출신이며, 프리메이이었던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은, 1734년 2월 21일에 조지아(Georgia) 주의 프리메이슨 랏지를 조지아(Georgia)주(州)의 남동부 서배너강 하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항구 도시인 서배너(Savannah)에서 조직하였다. 조지아(Georgia)주 프리메이슨 랏지는 1735년 12월 2일에 영국의 그랜드랏지(대지부)의 보증을 받아 조직이 되었다. 이런 사실이 영국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대지부)의 기록부 번호 139번으로 나타나 있다.




5.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의 약력

미국의 조지아(Georgia) 주에 가면,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정보를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인터넷 백과 사전으로 유명한 위키 피디아 백과 사전의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그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파란색 부분의 글들을 읽어 보라! 이 장군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책들도 많고, 미국 사회에 매우 잘 알려진 유명한 프리메이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출처 : 성경스터디
글쓴이 : 빛과소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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