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스크랩] 성경의 권위와 올바른 해석을 위한 제언

작은샘 큰물줄기 2017. 8. 17. 14:04
성경의 권위와 올바른 해석을 위한 제언

 

 
안명준 박사 (평택대학교신학전문대학원)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I. 성경의 권위와 연구
II. 해석의 중요성
III. 21세기의 올바른 해석자를 위한 제안

I. 성경의 권위와 연구

최근 한국을 방문한 강해 설교의 대가이신 데니스 레인 목사는 교계의 한 신문 인터뷰에서 영국교회를 위기로 몰아 넣었던 요소로서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게 된 점을 첫 번째로 꼽았다. 더불어 교회의 신학도 성경으로부터 떠난 점을 말하였다. 오늘날 위기에 있는 한국교회도 바로 데니스 레인이 영국 교회에 대하여 진단한 것으로 부터 중요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이 개신교의 후손들에게 내려준 값진 유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sola scriptura(오직성경)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오직 성경이라는 신학적 슬로건을 통하여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개신교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르게 세웠다.
한국교회는 목회자나 어떤 사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 보다 더 높지 않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를 높였으며, 성경의 권위보다 성직자의 권위를 더 높였다. 그 결과 교회의 부패를 가져 오게되었다.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오직 말씀의 권위를 바르게 강단에서 실천할 때 한국교회의 위기의 극복이 시작될 것이다. 성경에 대한 권위의 회복은 잘못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주고, 크리스챤들의 삶을 바르게 인도해 주며, 바른 한국교회의 신학을 위한 기초이다. 또 성경의 권위에 대한 올바른 회복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바른 길을 인도하는 표준이 된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가 회복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교회를 개혁하고 성도들의 삶을 바르게 이끌었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에서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자신이 어떤 주장도 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을 넘어가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실수는 바로 잘못된 로마 카톨릭교회의 모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딤후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한다. 쓰러져 가는 한국교회가 바로 말씀에 대한 올바른 권위의 회복과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를 추구할 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Renaissance는 파괴와 창조라는 중심 주제를 동시적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냈다. 이 주제는 Erasmus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Martin Luther나 Ulrich Zwingli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개신교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모던니즘(Modernism, 현대주의) 시대를 보내고 타자성(otherness)과 상이성(difference)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 현대 후기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도 그 주제는 이름을 새롭게 바꾸어 위력을 발휘 하고있다. 해체(deconstruction)라는 이론을 통하여 모든 기존의 개념과 사상에 큰 변화를 주고 있다. 종교개혁과 포스트모던니즘이 전통에 대한 도전과 파괴라는 속성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포스트모던니즘의 주장자들은 표준과 절대가 없는 상대적이며 불확성의 상태를 인정하는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성경의 권위(auctoritas Scripturae)라는 확실하고 안정된 표준을 갖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점이 크게 다르다. 따라서 우리들도 성경이 말하는 권위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변화를 극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크리스챤으로서 미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석적인 측면을 가지고 말하려고 한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세속사까지 엄청난 영향을 준 신앙운동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종교개혁의 주체들이었던 Martin Luther나 Ulrich Zwingli 그리고 John Calvin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새롭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던 그들의 해석적인 행위에서 나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대에 우리 역시 성경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려야 하고 성경을 현대의 시점에서 올바르게 해석하는 제 2의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있어야함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것은 르네쌍스 운동이 인문주의자들을 통하여 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당시 잘못된 로마카톨릭 교회을 바로잡고 새로운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 것처럼 포스트모던니즘 역시 오늘날 기존의 기독교 신학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주어서 과격한 포스트모던 신학을 만들고 있으며, 미래의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독교의 운동(unknown new Christianity movement of the future in Postmodernism)의 형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 신학도들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제2의 루터나 칼빈과 같은 미래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선구자들이 되기 위한 준비를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올바른 성경의 해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때 성경의 해석이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권위와 힘은 해석이라는 그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 해석을 주는 여러 가지 학문적인 방법들과 신학적인 방법들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런 방법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성경해석의 꽃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의 역할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라는 것은 루터와 쯔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들 이후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해석자와 성령의 관계를 칼빈의 입장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이런 맥락으로부터 바람직한 21세기의 해석자상을 제안하려고 한다.

II. 해석의 중요성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해석적 기능을 갖고 그 기능을 사용하도록 창조되었다. 창조된 아담이 인류 최초로 한일은 바로 해석행위였다. 창세기 2장 19절에서 23절까지는 아담의 해석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 . .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기서 아담은 언어를 사용하여 이름을 짓는 해석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해석적인 기능을 타고났으며 그의 삶의 현장에서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무이며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삶의 현장을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매우 중요한 사역임을 깨닫게 된다. Nicholas Wolterstorff는 해석이란 우리의 삶에 스며있어서 피할 수 없고 해석 없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은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줄 알고 더 나아가 크리스챤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올바른 해석적 유산을 남겨할 책임이 있다. Martin Buber는 기독교가 세상에 준 것은 해석학이라고 말했는데 우리에게 해석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다.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성경 해석은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의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종교 개혁자였던 Luther가 시도했던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발견되었는가를 스스로 질문해 본다면 우리는 그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성경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aul Althaus는 루터의 성경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신학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주석이다. 그는 스콜라적인 의미에서 조직신학자가 아니오 중세 체제나 현대 신학의 의미에서 교의학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기존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1521년 보름 회의(the Diet of Worms)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를 받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sola Scriptura를 강조하였다. 이 표어는 성경은 자증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해석자다 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루터에 있어서 sola Scriptura의 강조는 개신교의 대표적인 성경 해석원리인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가 되었다. 이 방법은 1519년의 작품들에 나타나고 후에 계속하여 그의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루터에 있어서 성경이 그 자체가 해석자라는 원리는 그가 성경의 권위와 명료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왔다. 루터는 1519년 7월에 에크(Eck)와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isputation)에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나는 거미가 물에 침투하는 것처럼 그 신학박사 (에크)가 성경을 관통하는 것에 유감스럽다. 사실상 그는 마귀가 십자가로부터 도망가듯 성경으로부터 도망간다. 그러므로 교부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나는 성경의 권위를 선택하고 나를 판단할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했다.

1517년에 루터의 95개 조항을 지원했던 에라스무스는 7년 뒤 1524년에 그의 책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On the Freedom of the Will)에서 예정론과 인간자유에 관해 루터와 논쟁을 일으켰다. 루터는 1525년 그의 책 의지의 노예 (The Bondage of the Will)에서 에라스무스의 잘못된 성경 해석관을 지적한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은 어두운 책이기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책의 사람들에 의해서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에 루터는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성경의 명료성은 루터를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에게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를 제공해 주었다. 루터는 자신의 교리서들 (Catechisms) 가운데서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원리의 몇 가지의 패턴을 보여주었다. 루터에 있어서 성경의 해석은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요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칼빈은 역시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올바른 신학 형성과 직접적인 관계를 말한다. 칼빈은 1559년 8월 1일 제네바에서 자신의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에서 자신의 책의 목적이 신학도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건전한 신학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 G. Ebeling과 J. Pelikan의 지적대로 신학사란 성경 해석의 역사라고 말한 점을 고려해 볼 때 건설적인 신학활동을 위한 해석학의 역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프리토리아 대학의 C.J. Wethmar 교수가 제 2차 세계개혁신학회의에서 말한 것처람 "신학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적 학문으로 그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영원한 기초와 근원으로서 성경을 역사적이며, 조직적이며,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본점이다.
칼빈은 자신의 해석이 교회의 공적인 유익을 증진시키기(publicum Ecclesiae bonum induxisset) 위한 것임을 밝힌다. 자신의 해석적인 작업을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헌하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서 주석에서 자신의 해석방법은 간결성과 단순성의 원리(brevitas et facilitas)를 사용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성경을 쉽게 성경의 본문을 이해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학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예를들면 세계 일차대전후 신정통주의 신학자 Karl Barth는 Der R merbrief를 출판함으로써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것으로 평가된다. Gadamer는 바르트의 Der R merbrief 를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한 최초의 혁명적인 폭팔로(the first revolutionary eruption)또 일종의 해석학적 선언서로(a kind of hermeneutical manifesto) 본다.
해석 혹은 주석 (exegesis)이란 말은 고대 아테네 신전에 살고 있던 신전 해석자들이 신탁, 종교적이나 의식적 법들, 그리고 하늘의 징조를 해석하면서 생긴 말이다. 오늘날도 새로운 샤만 르네쌍스를 추구하는 세상의 많은 종교 철학자들이 샤만을 통하여 인간문제의 해결을 정당하게 받아드리는 포스트모던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샤만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신 문화적 재생의 시대에서 샤만들이 인간에게 주는 현대 인간문제에 대한 해석은 큰 권위를 갖게될 것 같다. 이런 시점에서 참된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학도들은 역사와 크리스챤의 공동체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큰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요셉과 다니엘의 경우에서 해석의 역할을 그 시대의 중요한 인물들과 국가의 역사를 주도했다. 요셉은 어떻게 바로왕의 꿈을 해석했는가? 다니엘은 어떻게 세계의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해석했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신학교는 이런 질문에 대답을 주어야 한다. 신학생이 신학교에 들어온 목적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으려 온 것도 아니요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다. 참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주는 성경의 해석자로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해석자를 찾고 있다.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겸허하게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을 해석적인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도 오늘날 말씀 앞에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칼빈은 자신의 나라에서 쫓겨나서 파란만장한 삶을 제너바에서 하나님의 해석자로서, 성경의 해석자로서, 제네바의 해석자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해석자로서 살았다. 해석자로 칼빈의 삶의 원천은 역시 그 중심에 성경이 있었다. 성경이 그 삶의 모든 표준이었다. 신학의 방법은 물론이거니와 해석 방법론까지, 삶의 해석까지 성경에서 그 원리를 찾았다.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그는 성령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신학자였다. 그의 성경 해석은 성령의 분명한 역할 속에서 이루어 졌었다. 우리는 해석학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방법을 모두 습득하고 사용해야 하지만 해석자에 대한 성령의 주권적인 역할은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칼빈을 통하여 다시 배우자.

III. 21세기의 바람직한 해석자를 위한 제안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정황 속에서 해석행위가 왜 중요한지 특히 성경 해석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어떻게 실행되는지를 칼빈을 통하여 보았다. 이제 21세기에 바람직한 해석자를 위하여 몇가지로 제안한다.
1. 21세기의 바람직한 해석자는 성경과 자신이 사는 시대에 대하여 항상 열린 마음을 갖고 자신의 사고를 시대에 맞게 말씀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변화성(transformation)이란 개혁신학의 강력한 힘이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 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로마 카톨릭교회는 전통에 묶여서 정지된 신학이기에 기존의 자신들의 전통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으며, 개인의 성경 해석을 금하지만, 개혁신학은 성경에 의하여, 성경을 향하여 항상 새롭게 온전하게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에 변화를 추진하기 위한 원동력은 성경이라는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아울러 시대에 맞게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려는 해석자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보여준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점이었으며, 자신들은 이것을 사역의 소명으로 보았다. 따라서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행위는 교회를 개혁하는 출발점이 되며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참된 도구가 된다.
2. 21세기의 바람직한 해석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철저한 해석훈련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영적훈련과 학문적인 훈련이 있다.
해석을 위한 지식인으로서 최대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원어에 대한 능숙한 사용은 물론 세상의 학문적인 방법들을 습득해야 한다. 정보에 익숙한 문화인으로서 그 정보를 분석하고 사용하여 자신의 해석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루하루 지식과 정보가 발전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정보와 지식을 처리하는 능력을 배워야 21세기의 바람직한 해석자로서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런 학문적인 습득과 영적인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참된 해석자는 성경에 근거하여 미래의 역사를 예리하게 미리 진단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해석자는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예언자적 역할은 소위 말하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말씀의 해석자는 성경신학에 근거하여 미래의 세상의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4. 하나님의 영이 해석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룩성 이다. 해석자는 성스러운 사람이다. 해석자 자신이 본질적으로 성스러워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주체가 되는 성령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해석자란 말씀에 대한 신성한 사역을 감당하는 자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란 일시적인 황홀 속에 지껄이는 신비한 계시도 아니며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를 심리학적으로 조사하는 일도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한 자신의 거룩한 삶을 통한 신성한 봉사의 사역이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할 것을 말한다. 바울의 말을 종합하여 말한다면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성결한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참된 해석자로 거듭나게 된다.
5. 성령의 해석자는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현대의 급진적인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자에게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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