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설교

[스크랩]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롬8:18-2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3. 18:33

9월의 마지막 주일,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루 아침에 가을이 성큼 다가 왔습니다. 늦 더위가 어떻고, 기후 변화가 어떻다 하고 난리쳐도 약속된 가을은 여전히 우리 앞에 다가 왔습니다. 세상이 어떻고 경제가 아무리 요동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된 그 나라는 우리 앞에 다가 올 것을 믿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대사람들이 유월절에 부르는 특별한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의 제목은 ‘아니마임’입니다. 아니마임이라는 말은 ‘나는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 아니마임이라는 노래가 들려지면 모든 유대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지곤 합니다. 이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가스실로 끌려들어가서 죽게되는, 그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가사는 간단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나를 돕기 위해서 반드시 오시리라는 사실을...’
2절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메시야는 너무 늦게 오신다.’ 한 유대인 외과의사가 바로 이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유리조각이 있어서, 그 깨진 유리조각을 가지고 아침마다 그는 면도를 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특별히 수염이 많은데 그는 그 수용소에서도 날마다 깨끗하게 면도를 했습니다.

파랗게 면도자국이 있는 이 단정한 의사를 나치 헌병들은 가스실로 끌고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정했고 당당했고 꼿꼿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쟁은 끝이나서 자유를 얻게 되고 이 외과의사는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는 노래를 고쳐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나를 찾아와 우리를 도우시라는 것을...’

그 1절은 같습니다. 그러나 2절에가서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한다’ 라고 외과의사는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게 뭡니까? 먼저 종말론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그 구원이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의 구원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많은 시련 속에서 계속적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세계관, 구원받은 인생관, 구원받은 가치관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또 그런가하면 세상을 포기하지도 않고 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화려한 것을 보아도 끌리지 않는 구원받은 가치관, 구원받은 세계관, 구원받은 인생관으로 사는 것, 이것이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은 피조물의 탄식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렵습니다. 많은 고생이 있습니다. 부조리가 있고 모순이 있고 아픔과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강조합니다.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허무한 것 같습니다. 허무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무의미하게 쓰러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것 만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고 명상해보면 세상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절대로 허무한 것도 아니고 허무로 끝나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무상한 세상을 살면서도 허무지향적이 아니라 영광지향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23절에 보면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하였습니다. ‘몸의 구속’, 이것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영의 구원이 있는가하면 몸의 구속, 이 구원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인 구원을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게 될 영광, 이것을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무상입니까? 다 헛된 것입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절대로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현재도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구원지향적 역사관, 영광지향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밝은 미래를 지향해서 사는 오늘, 이것을 가리켜서 소망으로 얻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소망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그런고로 이 구원받은 백성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비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순교하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순교가 주는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순교 다음에 오는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야말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오늘을 갑니다. 이것이 소망으로 얻은 구원의 힘입니다. 역설적입니다.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늘 이런 말을 합니다. ‘Already but not yet.’ ‘이미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다. 구원 얻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완성될 것이 앞에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오늘 그 구원을 누리며 감격하며 간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23절의 말씀을 보면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 특유의 구사법입니다. 첫 열매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부활의 확증을 근거로 해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들 마져도 속으로 탄식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함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가 된 우리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 15절에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양자라고 하는 것에 묘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시는대로 이 집에 살다가 저 집으로 양자되어 갑니다. 신분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러면 이쪽집의 전에 있던 신분이나 모든 책임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집니다. 지금 양자로 입적된 그 영광을 누리며 그 특권 그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 중에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네로 황제같은 사람도 원래 왕족이 아닙니다. 양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의 신분을 얻고 그 신분에 마땅한 인격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양자는 됐습니다. 그런데 양자다운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거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끔 생각하고 웃습니다. 정말 우스운 얘기입니다. 어느 천민집의 딸 하나가 아주 예뻤답니다. 그래서 한 동네 양반집 아들이 죽어라하고 이 여자를 사모해서 결국은 이건 결혼할 수 없는 사이지만 그 양반집 아들이 너무 좋아 하니까 할 수 없이 천민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 그런데 이 천민의 집에서는 바야흐로 큰일입니다. 양반집의 법도를 모르니까요. 딸이 시집가서 처신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으니 그 어머니 앞에서 걱정을 합니다. “난 가서 어떻게 살야야 돼요?”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가르쳐주기를 “야, 양반이라는 게 별거냐. ‘님’자만 붙이면 된다. 말끝마다 님, 그냥 아버님 어머님, 그저 이렇게 님자만 붙이면 된다. 간단하다.” “아, 그렇구만요.”

시집간 후 어느 여름날 시아버지가 문지방을 떡 베고 낮잠을 잡니다. 이 며느리가 점심을 차려가지고 들어갑니다. 한데 시아버지 머리를 비켜놔야 들어가겠는데 문지방을 베고 주무시지 않습니까. 그때 며느리가 하는 말입니다. “시아버님...” 거기까진 잘했습니다. “발님 들어갑니다. 대가리님 치우세요.” 그 대갈님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어쩌다가 천민이 양반집 며느리가 됐지마는 그 가정의 법도를 익혀 살아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시련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 며느리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양자된 것,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었습니다.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 자녀됨의 신분에 도달하도록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체질, 습관, 다 고쳐나가야겠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의 학교’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라는 걸 당하는데 고난 속에서 우리는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이 있다, 이렇게 말한 분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1학년은 생각하기를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고통을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합니다. 불가부득으로, 억지로억지로 참고참고 나가는 그런 사람이 1학년입니다. 2학년은 ‘나는 참고 견디리라’합니다. 3학년은 ‘나는 고난을 견딜수 있다. 약속을 믿고 고난을 견딜 수 있다’ 합니다. 가능성까지 생각을 한답니다. 그러나 4학년이 되면 ‘나는 이 고난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수준입니까? ‘이 고난은 내게 필요한 것이다.’ 고난이 주는 의미를 생각합니다. ‘적어도 내게는 꼭 필요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고질병을 가리켜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제거해달라고. 그러나 이제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다.’ 꼭 내게 있어야 할 시련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게 바로 고난학교의 우등생입니다. 우리도 내게 주어지는 고난이 나를 갖추어가는과정이라 생각하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데이비드 프라이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시가 있습니다. 읽을 때 마다 늘 감동이 오는 싯귀입니다. ‘병들지 않으면 드리지 못하는 기도가 있다.’ 그가 병들었을 때 이것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건강할 때 드리는 기도가 있고 병들었을 때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특별한 기도입니다.

또 ‘병들지 않고는 부르지 못하는 찬송이 있다’ 했습니다. 건강할 때 부르는 찬송이 있지요. 그러나 병들었을 때 부르는 찬송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때만 부를 수 있고 은혜받을 수 있는 그런 찬송이 있습니다. 또한 ‘병들지 않고는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기적을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순진한 마음으로 기적을 믿습니다. 그건 그때만 있는 믿음입니다. 또 ‘병들지 않고는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했습니다.

성경을 늘 봅니다마는 병들었을 때 읽는 성경은 다릅니다. 저는 심방을 하면서 병원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환자를 봅니다. 그것도 병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성경을 읽는 환자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때 읽는 그 성경, 그때 깨닫는 성경, 읽을 때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그 성경은 특별한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가 아니고는 가까이할 수 없는 성경이있다. 병들었을 때 아니고는 우러러보지 못하는 영안이 있다. 오, 나는 병드는 일이 없이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여러분, 프라이어의 이런 간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소망으로 구원얻은 사람은 현실 속에서 장차 우리에게나타날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서 기다립니다. 또한 참고 견딥니다. 이 인내란 소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현실은 어떠하든지 소망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구원 지향적입니다. 구원을 현실 속에서 항상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신학서적을 읽는 중에 칼뱅의 임종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세상을 떠날 때 성경을 외웠습니다. 바로 이 본문말씀을 외웠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다가올 내일을 보았습니다. 지금 좀 고난이 있지마는 앞에 있는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을 바라봅니다. 환하게 비라봅니다. 이걸 외우고 외우고 외우다가 27번을 외우고 마지막에는 마저 외우지 못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소망으로 얻은 구원, 확실하게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 눈앞에 영광의 세계가 환하게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입니다. ‘달려갈 길을 다가고 믿음을 지켰다. 지금 내 앞에는 영광의 세계가 있다. 생명의 면류관을 들고 주님께서 서 계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그 영광이 우리 눈앞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기뻐합니다. 이 약속된 소망을 바라보면서 현재에도 기뻐합니다. 이 기다림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오늘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설교하지 않으면, 이 소망의 구원을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그냥 폭 거꾸러질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들이여 꿈을 가져라! 뭐 이렇게 외칠 현실이 아닙니다. 꿈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 근거가 눈꼽 만큼이라도 있어야지요. 정말 미안하고 부끄럽고 죽을 지경입니다. 대통령을 봐도 국회위원을 봐도 종교 지도자를 봐도, 나라를 봐도 교단을 봐도 교회를 봐도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의 소망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소망을 갖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또 내일도 영광중에 큰 기쁨으로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4,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의 구원으로 살고,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으로 오늘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