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설교

[스크랩] 날 사랑하심(2) /롬8:31-39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3. 18:31

오늘은 설교를 함께 나누기 전에 함께 찬양을 한 곡 드리겠습니다.
아주 오래된 복음성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진하게 남아 있는 찬양입니다.

<왜 날 사랑하나?>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갈보리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이 찬양의 가사처럼 왜 날 사랑하실까요?
가만히 생각하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 만한 이유가 어디 한 군데도 없는데 왜 날 사랑하실까요?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지난 주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4가지 중에 2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①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②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나머지 2가지의 사랑을 나누겠습니다.


3. 누구도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울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7가지의 세상적인 대적들을 소개하면서 그것들도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어지는 38-39절도 감동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서는 무려 9가지의 이 땅에서의 내용들을 소개하면서 이외의 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35,39절에서 연거푸 나오는 ‘끊을 수 없다’라는 단어에 우리는 주목해야합니다.
헬라어 원어 본문에 보면 ‘끊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cwrizw’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의 의미가 ‘이혼을 시킨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등을 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코리조’라는 단어의 의미를 원어적인 의미로 적용하여 해석하면 바울의 고백 내용이 더욱 실감이 납니다.

결혼을 하신 분은 알겠지만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여 이불에서 등을 돌리고 잘 때 어떠하셨습니까?
아마도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기는 하겠지만 시베리아 벌판의 찬 기운이 도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부부들에게 비슷할 것입니다.
부부는 무촌이지만 이혼을 하는 순간 원수가 됩니다.

지금 본문에 사용된 끊는다는 단어의 의미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피조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부부간의 외도라든지, 아니면 심각한 폭력이라든지 분명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무려 16가지의 요인들을 동원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사이를 이혼시키려고 하지만 결론이 무엇입니까?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가볍게 욥기서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이겼다고 그러더라. 욥은 그 고난 뒤에 갑절의 은혜를 받았다더라”

이렇게 아주 단순하게 이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욥이 당한 고난을 나에게 적용시켜 보셨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키운 7남 3녀의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모든 재산들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내마저도 자신을 저주하며 떠나가 버렸습니다.
정말로 기가 막힌 일은 자신의 몸에 심한 악창이 나 벽돌로 자신의 종기를 긁으며 살아가야 고통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욥에게 임한 고난이 아니라 나에게 임한 것이라고 적용해보셨습니까?

이러한 엄청난 고난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욥에게 시험을 허락한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욥에게 시험을 주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을 해석할 수 있습니까?
단지 하나님께서 욥이 이러한 엄청나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욥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판단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셨는데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정말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정부가 국민들을 시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까?
욥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은 테스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고 뭐고 할 것이 없이 분명히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정말로 믿기지 않는 엄청난 고백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욥 1:20-22절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고백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을 로마서 8:35절의 말씀에 대입하여 이렇게 고백하면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누가 욥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사랑하는 성결인 여러분!
지난 주 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는 우리교회의 교우들을 일일이 심방했습니다.
411호실에 입원해 계신 안 권사님을 심방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아십니까?

안 권사님을 병문안을 하면서 바로 안권사님이 욥과 같은 인물이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젊어서 연탄가스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육체가 쇠잔하여 평생을 고생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식물인간과도 같은 삶을 산지도 벌써 오래입니다.
큰 아들은 얼마 전에 다리를 다쳐서 지금 활동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번에 당신은 대상포진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오래 누워 있는 과정이라 등에는 욕창이 나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심방을 갈 때마다 퇴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심방을 가서 위로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주님 사랑의 고백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가정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릴 때 그 불편한 몸으로 찬송을 부르시고 ‘한 번 더’를 부탁하시는 권사님을 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안인환권사님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이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은 안권사님에게, 욥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고 담대히 승리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6-37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 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본문 36절은 시편 44:22절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시 44:2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 구절은 칼빈의 해석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 36절의 시대적인 묘사를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가장 악독한 왕으로 인정하고 있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시대의 핍박을 받았던 것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시리아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습니다.
특별히 그는 유대의 종교에 대한 민감하고도 강력한 핍박을 했는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희랍의 정신을 유대 땅에 심고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 유대인의 종교를 말살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읽다가 발견되면 처형시켰습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의 성전을 더럽히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더럽다고 생각하는 돼지 떼를 성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들을 죽이고 그 피를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제단에 뿌렸습니다.
성전은 온통 돼지 피로 더럽혀졌습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할례를 받는 모든 유대인 아이들을 살해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할례를 집전한 제사장도 죽이고, 할례를 받은 아이의 아버지도 죽였습니다.
죽은 아이의 시체는 그 아이 어머니의 목에 메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 때 순교한 7형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7형제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렇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첫째는 차바퀴에 매달아 돌려 죽였습니다.
둘째는 쇠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셋째는 불에 달군 가마에 볶아 죽였습니다.
넷째는 쇠 갈구리로 가슴통을 꿰어 죽였습니다.
다섯째는 돌방아로 으깨어 죽였습니다.
여섯째는 몸통을 잘라 죽였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끓는 가마에 끓여 죽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 7형제의 순교는 그들의 앞에서 형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하는 고통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 형제들이 서로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고통을 한 번만 경험하면 우리는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거야. 알겠지?, 자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 엄청난 은혜를 생각하며 그러나 또한 이러한 암울한 핍박의 시대를 묘사하며 바울은 로마서 8:36절을 대입시킨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러한 영적인 고난, 시험, 심지어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무엇입니까?

롬 8:37절의 시작 접속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러나’입니다.
헬라어 ‘allav’는 강한 역전을 표현하는 접속사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단어를 번역할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으로 해석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까?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정력을 소비하며 탈진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일어날 힘조차 없을 때가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합니다.

흔히 부르는 찬양의 가사가 그래서 마음에 와 닿습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가 정말로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 좌절하지 않습니까?
37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참 은혜가 되는 말씀이 귀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를 하시면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다 도적이고 강도이지만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렇게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설정하신 주님께서 요한복음 10:9-10절에서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우리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속성이십니다.

우리가 왜 넉넉히 이깁니까?
더 풍성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찬양은 우리를 눈물짓게 하는 것입니다.

304장 3절의 가사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후 2세기경 요한 크리소스톰이 황제 앞에 붙들려 나와 그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황후의 부정을 지적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황제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너를 추방시킬 것이다.”

그러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태연히 미소를 띠우며 말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결단코 나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결단코 나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노하여 호통 치며 다시 말했습니다.
“그래 좋다. 그러면 너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버리겠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그것도 쉽게 안 될 것입니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폐하께선 그것에 손도 대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노발대발하여 소리쳤습니다.
“내가 네 놈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더욱 태연한 자세로 대답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40년 동안 이미 죽어 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었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더더욱 내 생명을 만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이제 체험하는 듯 말했습니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저 놈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크리소스톰에 대한 일화입니다.

이 이야기가 원래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각색이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크리소스톰의 신앙고백의 줄기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의 사랑을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바라기는 이 놀라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