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고전3:16-17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53
미국에 에드워드(Edward) 장군이 별 다섯개로 진급했을 때. 그를 위해 친구들이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진급을 축하합니다. 당신을 위해 다음 주 수요일 오후 7시30분에 힐튼 호텔에서 축하연을 준비했습니다.” ( 에드워드(Edward)장군을 위해)

이 편지를 받은 에드워드(Edward)장군이 즉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수요일 7시30분에는 예수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입니다. 미안합니다” W. Edward.

결국 친구들은 힐튼호텔 파티를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약속했던 수요일 오후 8시에 힐튼 호텔에 대화재가 발생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에드워드(Edward) 장군 한 사람이 수요예배를 참석함으로 미국에 수 백명의 장군들이 대화재의 사고를 면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Edward) 장군은 오래전부터 수요예배에 참석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장군은 그 약속을 지켰고 하나님은 에드워드(Edward)를 지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공적 예배는 세례교인이라면 모두가 하나님과 약속한 시간입니다. 우리교회도 에드워드 장군 같은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학생이 있어서 소개하겠습니다.

황영옥집사님 아들 중학교 3학년인 남재광 학생입니다. 지난 봄에 세례를 받은 후 세례교인은 공예배에 참석할 의무가 있다고 하는 것을 배운 후에 주일찬양예배와 수요예배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목사 아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 기특해서 상이라고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러분! 수요 예배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약속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는 성전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따라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약속을 구약이라고 하고 예수님 이후의 약속을 새로운 약속이라 해서 신약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는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쉽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존의 문화를 뒤집어놓기 때문에 거역을 하게 됩니다.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위기를 느껴 어떻게하든지 전파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순교자들은 왜 자신들의 생명을 포기했습니까? 그것은 주님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요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 오후 찬양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약속’을 아마르אָרם 라고 했습니다. ‘아마르’는 ‘말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약속은 곧 말씀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내가 하나하나 지켜나갈 때 그분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모두는 우리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지킬 때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약속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명기28:1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약속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175세 죽을 때까지 100년 동안 그의 삶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100년 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살았습니다. 모리아 산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약속의 제단입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복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유럽교회는 지난 400년 동안 교회를 짓는데 그 긴 세월을 다 보냈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나 지금에 와서 유럽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텅빈 교회건물 뿐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놓지 못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인 1942년에 수요예배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요예배시간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1960년도에 와서 주일 예배도 성도들의 자리가 비시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외면했습니다. 깔뱅이 1,550년에 스위스 제네바에 왔을 때 제네바 인구는 약 15,0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00년후에 스위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스위스 교회는 건물 색상이 모두가 흰색 아니면 회색입니다. 멀리서 봐도 저기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알프스산과 이어진 레만 호수에 몽블랑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를 막 건너면 교회가 보입니다. 이곳을 여행하던 한 목사님이 교회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교회의 반은 붉은 색이고, 반은 흰색입니다. 이상해서 그곳 목사님에게 물어보았더니 목사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교회의 운영이 어려워서 절반을 술집으로 월세를 주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몇 명이 예배드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교회의 현실입니다. 마을 마다 교회는 있으나 그 교회 안에 교인이 없습니다. 칼뱅의 후예들은 400년 동안 제네바에 거대한 교회 짓는데 돈과 기술을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는데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한국교회가 이런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수요예배를 외면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 오후 찬양예배가 이제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나가는 데는 다소 무관심하고 있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성도들의 편의위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즉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자신을 하나님과의 약속의 사람으로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신명기10:8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매고 다녔습니다. 맨다고 하는 것은 옮겨 다닌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궤는 성전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큰 성전이라고 지었어도 그 안에 언약궤가 없으면 그것은 성전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선두에서 메고 가는 것이 언약궤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연약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로 채워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나가야 합니다. 내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을 때 하나님과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무엇으로 하나님과 약속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약속 자체가 없는데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공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지킬 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속에 채운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내속에 모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내속에 모실 때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느 마을에 점잖은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일 교회에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행은 여전했습니다. 하루는 랍비가 그 신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에 대한 소문이 나쁘게 들리니 성질을 고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 신사가 대답하기를 “나는 주일날이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주일예배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웁니다”이 말을 듣고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매일같이 동물원에 다닌다고 해서 동물이 되는 것이 아지요”

우리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될 때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히브리어로 ‘카할(qahal)’이라고 합니다.

‘카할(qahal)’은 ‘부른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 ‘무엇을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약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식을 위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만나기 위해 임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21:1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어 성전을 정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사람들의 욕망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꽉차있는 한 성전일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오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성전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성전을 엎으신 것을 보면, 성전을 더럽히면 성전을 엎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강조하는 말씀이 뭔가 하면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 각자 각자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 더럽혀지면 너희 자신들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뒤엎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거룩하다는 것과 더럽혀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더럽혀졌다는 것은 없어야 할 것들이 있고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가 법궤입니다.

성전을 지으면 법궤가 제일 먼저 들어갑니다. 법궤가 들어가야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지켜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 즉 내 삶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성전입니다.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말씀으로 내안에 채우지 않으면 오히려 더욱 어려워집니다. 예수 믿은 후 당신 안에 말씀을 채우지 않으면 예수 믿기 전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됩니다. 말씀으로 충만한 삶이 되십시오. 성전으로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성전에는 금촛대가 있습니다.

금 촛대는 성전에 불을 밝힙니다. 금 촛대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조명입니다. 조명은 연극배우가 등장할 때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내안에 금 촛대가 있어야 합니다. 내안에 성령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빛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빛은 내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 합니다. 내안에 성령의 빛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이웃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빛이 우리에게 조명해주지 않으면 말씀에 대한 감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안에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금 촛대는 조용히 성전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어야 합니다. 빛 된 삶이란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8:9말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아무리 아름다운 포장을 해도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명함을 꺼내놓아도 내안에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으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육적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 금 촛대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성전 안에 있는 것은 분향단 입니다.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기도가 아니라 기도들입니다.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왜 기도들인가? 기도가 그리스도의 체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생각나면 한 번씩 하는 기도가 아니라 언제나 기도하는 기도의 체질이 기도들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기도의 분위기속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으신 후에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체질 속에 살아갈 때 그 기도가 기도들이 되어 하나님의 분향단에 그윽한 향기가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육신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성전이 더렵혀졌다는 것은 말씀순종이 없다는 것이요,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성령의 충만한 감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차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더럽힌다고 하는 것은 결국 거룩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행하는 것, 모든 죄가 해당됩니다. 레위기20장25절에 보면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18장 28절 말씀에 보면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에스겔5장11-12절 말씀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 너희 가운데에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에 흩어 버리고 또 그 뒤를 따라 가며 칼을 빼리라”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생활 속에서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엎으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시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저는 자와 소경된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성전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성전 밖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 중 성전에서 기적과 이적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은 길에서 산에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의 사건은 언제나 생활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될 때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기적사건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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