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쏟아진 폭우로 강원도에는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는 것으로 뉴스가 장식되더니 강원도 곳곳의 물난리 소식이 전하여 지는 것 을 보았습니다.
영동고속도로가 막힌 이유는 고속도로를 뚫기 위하여 강원도의 그 높은 산들을 깎아서 길을 만들었는데 어느 곳은 터널을 뚫었어야 할 곳을 산을 밀어내고 길을 낸 곳도 있다고 합니다.
산을 깎을 때도 산사태를 대비하여서 일정한 경사 각도를 지켜야 하는데 "비용절감", "공사기간단축"등의 이유로 가파르게 깎아내고 길을 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재해를 들여다보면 뭔가 처음부터 잘못된 부분 부실한 부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실한 것'은 결국 일이 터지고 나서야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기초"가 중요하다고들 하고 우리도 기초가 중요한 줄 알고 있지만 우리 삶에 있어서 아직은 일이 터지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부실한 곳", 한꺼번에 붕괴되어 버릴 곳들은 또한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내 인생의 기초 우리 가정의 기초 우리 교회의 기초 우리 사회의 기초는 지금 어떠합니까?
겉보기엔 견고하여 보이는데 여전히 부실한 기초 저 영동고속도로를 하루가 넘게 꽉 막아버린 산사태처럼 힘없이 다 무너져버릴 인생은 아니었을까 짚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너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으라."고 (디모데 전서 6:19)을 강조합니다.
디모데후서 2:19에서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 위에 네 믿음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폭풍우 비바람을 견뎌낼 수 있는 기초가 튼튼한 터전은 무엇인가 ?
과연 바울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좋은 터', '견고한 터'에 관하여 말하였을까요?
오늘 본문에 답이 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1 "이 터는 곳 예수그리스도라" 여러분 분명 이 세상에는 결코 부실하여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이질 않는 기초'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기초는 무엇입니까 ?
여러분의 가정을 우리의 교회를 우리 사는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초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 그분께서 내 삶의 기초가 되어 주실 때 우리는 결코 부실한 인생이 되지 않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 개인에게 갈등과 혼동이 찾아와도 내가 결코 붕괴 될 수 없는 것은 ㄷ예수께서 내 삶의 기초이시기 때문이고 우리 가정에 아픔과 좌절 그리고 위기가 찾아와도 다시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정의 기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실한 것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내 인생을 바로 세우고자 하면 견고한 인생이 출발될 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견고한 기초 위에 삶의 집을 짓고자 할 때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군축재료"입니다.
본문 v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금, 은, 보석은 비싼 재료이고 나무, 풀, 짚은 싼 재료입니다.
사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그리스도라는 같은 터전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갚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교회를 다니고 같은 시간에 말씀 듣고 살아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스타일은 천차만별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재료"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터 위 에 집을 짓기를 시작합니다.
구원은 철저히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구원받은 성도답게 자기절제와 선행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살았는가 하는 것으로 인생건축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법입니다.
구원을 받는 데는 내 노력이 하나도 필요 없지만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는 나의 노력과 최선의 수고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아주 잘 하시여 반에서 1, 2등을 번갈아 하던 두학생이 있었다고 합시다.
이 두 친구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졸업하면서 나란히 최고명문대학에 입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10~20년 후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수준의 지위와 명예와 수입을 올리고 있게끔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2006년 7월 이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예배하고 있지만 10년 후에 20년 후에 모두 다 이 자리에 모여 보면
같은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 하였어도 세월이 지난 후엔 신앙도 수준이 다르고 경제수준도 다르고 건강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달라져 있게 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각자 다른 삶으로 만들었을까? 구원 받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 이지만 그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자기 신앙의 걸음을 값어치 있게 살았느냐 아니면 무성의한 신앙만 유지하고 살았느냐로 그 인생은 너무나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성경 묵상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인생이 된다면 그는 인생의 건축을 나무, 풀, 짚으로 짓고 있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카터는 매우 신앙이 좋은 분으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바다트 운동에 앞장서고 세계평화와 인권문제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좌우명이 '너는 최선을 다했는가.'라고 합니다.
해군사관생도 시절 당대 유명한 미 해군 제독과 면담하는 중 자신이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갑자기 제독이 성적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카터는 성적에도 자신이 있어서 자신의 점수와 등수를 말하였습니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위권이었기에 자랑스럽게 말한 성적을 듣고 제독은 '그것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야 물론 최선을 다하였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하는 카터생도에게 제독은 큰 소리를 쳤습니다.
'왜 자네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 말이 충격으로 받아지고 그 후로 그는 인생 좌우명에 "최선을 다하였는가?"를 두었습니다.
카터가 성경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예루살렘성전에 예배하러 들어가면서 헌금함에 두렙돈을 바친 가난한 관우이고 다른 한사람은 옥합을 깨고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린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 두 여인의 공통점은 "그들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는 접입니다.
'최선을 다한 헌금'
'최고의 것을 드리기를 기뻐한 마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터전 위에 최선의 것을 드리는 헌신을 (땀을 흘리는 인생 날이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튼튼한 기초위에 최선의 노력으로 지어지는 우리의 인생건축은 무엇보다 시험의 날 시련의 날에 견딜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은 7장에서도 모래위에 집지은자와 반석위에 집지은자가 결국"부실하였음""기초가 든든하였음"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지은 집, 잘 살아온 인생은 시련을 통하여 판가름이 납니다.
본문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이 말은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집과 나무나 돌, 짚으로 지은 집은 "불"을 붙여보면 금방 차이점을 알수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정죄 당함'을 면제 받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정죄의 심판, 멸망의 심판은 없습니다. 하지만 금은 받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급을 위한 심판"입니다.
믿는 이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상급"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만일에 우리가 부실한 건축을 하듯 대충 신앙생활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짚과 풀과 나무로 지은 집이 다 타 없어져도 "터"는 남습니다.
그 터는 앞서 본 것과 같이 예수님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기초위의 부실주택이었으니 다 타고 무너져도 그가 받을 구원이 취소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 타 버린 빈터에 서서 달랑 '구원받은 믿음' 만 가지고 서서 상급을 위한 심판을 받게 될 때는 얼마나 그 현실이 부끄럽고 죄송스럽겠는가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성실과 최선의 믿음의 주택을 건설하고 시련과 연단 속에 건실함으로 인정받는 신앙이 되새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날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하지만 나는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널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내 생명을 내어 주었다. 너는 구원이후의 삶이 어떠하였느냐 최선은 다 하였느냐 부실한 인생 날은 살아오진 않았느냐"하고 물으실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고 면목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1945년 2월 일제 치하에서 28살 젊은 나이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살이하다가 죽임을 당한 "윤동주"시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 임종묵상 하였던 그의 시는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사귀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죽기 전 그는 간의 감옥생활은 고향집에서 보내온 "신약성서"를 매일매일 읽고 묵상하는 생활이었다고 전하여 옵니다.(큐슈 후쿠오카 형무소 기록보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는 '최선을 다하는 인생 날이 될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지비 카터가 인생의 목표가 '대통령'이었다면 그는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인생 날은 작은 시련에도 다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부실신앙"소릴 듣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예배에, 말씀묵상에, 기도생활에, 봉사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개인의 기초 가정의 기초 교회와 사회의 기초가 견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는 것으로 뉴스가 장식되더니 강원도 곳곳의 물난리 소식이 전하여 지는 것 을 보았습니다.
영동고속도로가 막힌 이유는 고속도로를 뚫기 위하여 강원도의 그 높은 산들을 깎아서 길을 만들었는데 어느 곳은 터널을 뚫었어야 할 곳을 산을 밀어내고 길을 낸 곳도 있다고 합니다.
산을 깎을 때도 산사태를 대비하여서 일정한 경사 각도를 지켜야 하는데 "비용절감", "공사기간단축"등의 이유로 가파르게 깎아내고 길을 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재해를 들여다보면 뭔가 처음부터 잘못된 부분 부실한 부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실한 것'은 결국 일이 터지고 나서야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기초"가 중요하다고들 하고 우리도 기초가 중요한 줄 알고 있지만 우리 삶에 있어서 아직은 일이 터지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부실한 곳", 한꺼번에 붕괴되어 버릴 곳들은 또한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내 인생의 기초 우리 가정의 기초 우리 교회의 기초 우리 사회의 기초는 지금 어떠합니까?
겉보기엔 견고하여 보이는데 여전히 부실한 기초 저 영동고속도로를 하루가 넘게 꽉 막아버린 산사태처럼 힘없이 다 무너져버릴 인생은 아니었을까 짚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너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으라."고 (디모데 전서 6:19)을 강조합니다.
디모데후서 2:19에서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 위에 네 믿음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폭풍우 비바람을 견뎌낼 수 있는 기초가 튼튼한 터전은 무엇인가 ?
과연 바울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좋은 터', '견고한 터'에 관하여 말하였을까요?
오늘 본문에 답이 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1 "이 터는 곳 예수그리스도라" 여러분 분명 이 세상에는 결코 부실하여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이질 않는 기초'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기초는 무엇입니까 ?
여러분의 가정을 우리의 교회를 우리 사는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초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 그분께서 내 삶의 기초가 되어 주실 때 우리는 결코 부실한 인생이 되지 않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 개인에게 갈등과 혼동이 찾아와도 내가 결코 붕괴 될 수 없는 것은 ㄷ예수께서 내 삶의 기초이시기 때문이고 우리 가정에 아픔과 좌절 그리고 위기가 찾아와도 다시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정의 기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실한 것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내 인생을 바로 세우고자 하면 견고한 인생이 출발될 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견고한 기초 위에 삶의 집을 짓고자 할 때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군축재료"입니다.
본문 v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금, 은, 보석은 비싼 재료이고 나무, 풀, 짚은 싼 재료입니다.
사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그리스도라는 같은 터전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갚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교회를 다니고 같은 시간에 말씀 듣고 살아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스타일은 천차만별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재료"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터 위 에 집을 짓기를 시작합니다.
구원은 철저히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구원받은 성도답게 자기절제와 선행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살았는가 하는 것으로 인생건축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법입니다.
구원을 받는 데는 내 노력이 하나도 필요 없지만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는 나의 노력과 최선의 수고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아주 잘 하시여 반에서 1, 2등을 번갈아 하던 두학생이 있었다고 합시다.
이 두 친구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졸업하면서 나란히 최고명문대학에 입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10~20년 후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수준의 지위와 명예와 수입을 올리고 있게끔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2006년 7월 이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예배하고 있지만 10년 후에 20년 후에 모두 다 이 자리에 모여 보면
같은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 하였어도 세월이 지난 후엔 신앙도 수준이 다르고 경제수준도 다르고 건강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달라져 있게 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각자 다른 삶으로 만들었을까? 구원 받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 이지만 그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자기 신앙의 걸음을 값어치 있게 살았느냐 아니면 무성의한 신앙만 유지하고 살았느냐로 그 인생은 너무나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성경 묵상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인생이 된다면 그는 인생의 건축을 나무, 풀, 짚으로 짓고 있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카터는 매우 신앙이 좋은 분으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바다트 운동에 앞장서고 세계평화와 인권문제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좌우명이 '너는 최선을 다했는가.'라고 합니다.
해군사관생도 시절 당대 유명한 미 해군 제독과 면담하는 중 자신이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갑자기 제독이 성적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카터는 성적에도 자신이 있어서 자신의 점수와 등수를 말하였습니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위권이었기에 자랑스럽게 말한 성적을 듣고 제독은 '그것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야 물론 최선을 다하였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하는 카터생도에게 제독은 큰 소리를 쳤습니다.
'왜 자네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 말이 충격으로 받아지고 그 후로 그는 인생 좌우명에 "최선을 다하였는가?"를 두었습니다.
카터가 성경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예루살렘성전에 예배하러 들어가면서 헌금함에 두렙돈을 바친 가난한 관우이고 다른 한사람은 옥합을 깨고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린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 두 여인의 공통점은 "그들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는 접입니다.
'최선을 다한 헌금'
'최고의 것을 드리기를 기뻐한 마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터전 위에 최선의 것을 드리는 헌신을 (땀을 흘리는 인생 날이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튼튼한 기초위에 최선의 노력으로 지어지는 우리의 인생건축은 무엇보다 시험의 날 시련의 날에 견딜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은 7장에서도 모래위에 집지은자와 반석위에 집지은자가 결국"부실하였음""기초가 든든하였음"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지은 집, 잘 살아온 인생은 시련을 통하여 판가름이 납니다.
본문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이 말은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집과 나무나 돌, 짚으로 지은 집은 "불"을 붙여보면 금방 차이점을 알수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정죄 당함'을 면제 받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정죄의 심판, 멸망의 심판은 없습니다. 하지만 금은 받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급을 위한 심판"입니다.
믿는 이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상급"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만일에 우리가 부실한 건축을 하듯 대충 신앙생활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짚과 풀과 나무로 지은 집이 다 타 없어져도 "터"는 남습니다.
그 터는 앞서 본 것과 같이 예수님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기초위의 부실주택이었으니 다 타고 무너져도 그가 받을 구원이 취소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 타 버린 빈터에 서서 달랑 '구원받은 믿음' 만 가지고 서서 상급을 위한 심판을 받게 될 때는 얼마나 그 현실이 부끄럽고 죄송스럽겠는가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성실과 최선의 믿음의 주택을 건설하고 시련과 연단 속에 건실함으로 인정받는 신앙이 되새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날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하지만 나는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널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내 생명을 내어 주었다. 너는 구원이후의 삶이 어떠하였느냐 최선은 다 하였느냐 부실한 인생 날은 살아오진 않았느냐"하고 물으실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고 면목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1945년 2월 일제 치하에서 28살 젊은 나이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살이하다가 죽임을 당한 "윤동주"시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 임종묵상 하였던 그의 시는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사귀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죽기 전 그는 간의 감옥생활은 고향집에서 보내온 "신약성서"를 매일매일 읽고 묵상하는 생활이었다고 전하여 옵니다.(큐슈 후쿠오카 형무소 기록보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는 '최선을 다하는 인생 날이 될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지비 카터가 인생의 목표가 '대통령'이었다면 그는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인생 날은 작은 시련에도 다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부실신앙"소릴 듣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예배에, 말씀묵상에, 기도생활에, 봉사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개인의 기초 가정의 기초 교회와 사회의 기초가 견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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