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들어 보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웃지 않는 사람은 무엇에 문제가 있다구요?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우리 교회 성도들의 인간성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아 보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얼마나 좋은 인간성을 가졌는지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요즘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데 어느 바보가 취직을 위해 회사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보 앞에 면접 번호를 받고 대기하던 사람이 면접실에 들어갔습니다.
면접관이 ‘자네, 축구를 좋아하는가?’ ‘예, 무척 좋아합니다.’ ‘그럼, 자네가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을 말해 보게’ ‘옛날에는 차범근 선수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박지성 선수입니다’
면접관이 다음 질문을 합니다. ‘산업혁명은 몇 세기에 일어났는지 아는가?’ ‘예, 18세기부터입니다.’ ‘자네, UFO가 있다고 믿는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면접을 잘 마치고 나왔습니다. 밖에서 면접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바보가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면접관이 무슨 질문을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바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바보는 문제와 답을 달달 외우고는 면접실에 들어갔습니다.
면접관이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뭐?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가?’ ‘예, 18세기부터입니다.’ 면접관이 ‘어, 이 사람 바보아냐?’ 그때 바보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인간성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항상 웃음과 화목이 가득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 공부 중에 크로스웨이라는 성경 공부가 있습니다. 그 성경 공부 교제 중에 나오는 그림을 하나 보며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눈은 우리의 눈입니다.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계신 것은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 낮아지심으로 죽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빌립이 ‘주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우리가 그 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있고 또 그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 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그리고 그 분의 성품은 곧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분의 섬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심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창문이 되십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먼저 믿고 따르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고 어떤 은혜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비판하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교회는 사람보고 나오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나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도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 받고,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믿는 우리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입니다. 바울은 먼저 믿는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표현합니다.
이와 같은 역할을 잘한 교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중에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는 음란한 문화와 폭력의 문화, 쾌락의 문화가 가득찬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서로 화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어렵게 살았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발견하면 온 힘을 다해 헌신적으로 섬기며 기뻐했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도리어 감사하며 행복해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삶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안디옥 지역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와 보라!’ 고 선언하면서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가 형제인 베드로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와 보라’고 자신있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또 한 사람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사는 창녀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창녀라는 부끄러움도 잊은채 마을로 뛰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다고 전하며 ‘와 보라!’고 외칩니다.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소개 받은 베드로도, 수가성의 창녀였던 여인에게 예수님을 소개 받고 예수님께 나온 수가성의 사람들도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기 전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안드레와 수가성 여인의 변화입니다. 감격하며 기뻐하는 그들의 얼굴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에게서 감동과 감격,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면 ‘와 보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으며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안드레와 수가성의 여인의 모습에서 예전과 다른 변화된 면을 발견하고, 그들의 말에 신뢰가 되었기에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소개한 디모데는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 지역 사람이고 어렸을 때부터 유대교 안에서 자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언제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는지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을 선교하는 중에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를 방문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며 대단한 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복음을 거부하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었고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것으로 생각되어 성밖에 버렸습니다. 당시에 그 사건을 청년 디모데가 목격했습니다. 디모데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버려진 바울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바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몸을 가누는 바울이 그 몸을 가지고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가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증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보고 디모데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며 십자가에 죽이고 스데반까지 죽이는데 앞장섰으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바울이 이제는 변화되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수가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루스드라를 다시 방문하고 자신을 선교의 동역자로 부를 때 기꺼이 동행하여 바울과 함께 복음의 사역자가 됩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그 힘든 선교 사역을 하면서 바울이 온갖 어려움을 당할 때 항상 바울의 곁에서 힘이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하면서 복음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바울을 대신해서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향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빌립보서 2장 19절에 보면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를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중에 16-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위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 디모데를 보낸다는 말은 디모데를 보면 나를 본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너희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부러운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바울로, 바울에게서 디모데로 이어지는 본받음의 고리입니다. 이 선한 본받음의 고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랑이고,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순환의 고리입니다.
이런 선한 본받음의 고리를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아들 이삭에게로, 이삭에게서 그의 아들 야곱에게로, 야곱에게서 그의 아들 요셉에게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믿음의 연결 고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소개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소개하심은 우리가 산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본받아 선한 믿음의 고리를 이어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과 교회 생활을 하면서 좋은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것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무엇 보다도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고 또 교회 안에서 더 귀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축복된 자리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데이비드 스튜어드라는 Parents as Teachers 라고 하는 논문에서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부모의 자녀 교육은 가르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부모화하는데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특별한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Parenting입니다. 부모라는 parent 명사에 ing를 붙여 동사화 한 것입니다. 이는 온전한 부모화 됨이 자녀를 온전히 교육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부모가 부모답게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아무리 자녀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도 그것은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 어떤 노력보다도 부모가 제대로 되면 자녀는 자연스럽게 제대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에 그 자녀입니다. 부모의 믿음이 바른 믿음의 길을 가며 본을 보이면 자녀들은 그 길을 닮아 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면 참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일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중의 하나가 히틀러가 육백만의 유대인을 죽인 사건입니다. 육백만명을 죽였습니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숫자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부모의 불화와 갈등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과 불륜관계를 가지며 타락한 결과입니다. 히틀러는 부모의 온전치 못한 결혼 생활과 어머니의 불륜의 모습을 보면서 결혼을 혐오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습니다. 그가 어머니와 불륜 관계를 가졌던 유대인을 경멸하게 된 것이 바로 유대인 육백만을 학살하는 잔인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님에서 바울로, 바울에서 디모데에게로 이어지는 영적인 계보의 모습을 또한 봅니다. 육으로 낳은 자녀만이 아니라 영으로 낳은 자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바울과 디모데처럼 영적인 어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룩하게 쓰임 받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훗날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00’라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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