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영화

[스크랩] 우상숭배와 우상제물/고전8:1-1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35

올해 태풍 루사로 인해 온 나라가 망가졌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석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기차간, 뱃길, 비행기, 고속도로는 미어저 나갈 것입니다.
명절이면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것인 줄 모릅니다.
힘겹고 어려운 타향살이에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있어도 막힌 고향 길, 혹은 당장의 삶에 쫓겨 갈 엄두도 못내는 사람, 무슨 사연이든 명절이면 더욱 서러운 사람들도 우리 이웃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막힌 물고가 이제 서서히 터여지는 분위기를 봅니다.
동서양을 횡단하는 철도(실크로드) 건설(시베리아 횡단철도) 계획으로 비무장지대에 남북한 동시에 철도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 고향을 둔 많은 실향민들이 소망에 가득차 있습니다.

평소엔 그럭저럭 지나다 명절 때가 되면 시린 가슴이 다시 저며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우리 한국만큼 고향에의 향수만큼 강한 정서를 가진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금의 환향에의 꿈은 한국인에겐 너무나 절실한 소망인 것을, 기어이 성공하여 고향의 노부모, 친척들을 기쁘게 해드리라. 모두들 이를 악물고 뜁니다.
잘 살아 보겠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고향 사람들에게 내 성공한 모습을 자랑삼아 보여 주리라는 아름다운 꿈이 있어서입니다.
고향 가는 분들에게 축복을, 그리고 못 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내 고향 저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말씀의 깊은 골짝기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많은 가정이 명절이 되면 또 하나의 큰 부담을 갖고 가게 됩니다.
조상숭배 때문입니다. 제사문제 때문에 큰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문제를 한 풀어 보기를 원합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선교의 가장 높은 장벽은 그 나라 그 민족 특유의 민족주의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미신’이라고 합니다.
선교는 언제나 피선교 민족의 토착언어와 토착문화의 옷을 입혀서 복음을 전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상대적인 요소와 절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서로 타협하며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상대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굽힐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토착화와 혼합주의의 구별이 분명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에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십분 이해하고 문화적 장벽을 용이하게 넘어서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창기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벽이 둘 있는데 그 첫째가 조상숭배요,
둘째가 술과 담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론상으로는 간단한 듯 보이나 목회일선에서 경험하는 대로 너무나 높고 두터운 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라는 핑계가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버리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리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얻고 중생한 다음에 신앙적인 용기에 의해서 이를 실천한다면 또 별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통은 먼저 미신을 버리고 술․담배를 끊고 그리고 입교하는 풍속입니다.
예수는 믿어도 좋겠으나 조상에 대한 불효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반발은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보려는 편견을 저들은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제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 가운데는 제사를 지낸 본 사람들도 있으며 지금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짐승 놈은 놈으로 취급합니다.
제사를 지내야만 효도를 하고 그래야만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며 인간 구실을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
상세하게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고 간략하게 정리를 해 봅니다.
공자 이전에 중국에서는 하(夏)나라 때와 상(商)나라 때 정식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부모에게 제사지낸 것이 아니고, 뛰어난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다시 말해서 자기 할아버지가 위대한 황제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라 어떤 황제가 위대했기 때문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 후 세습제가 시작되고 부터 훌륭한 임금들에게만 제사지냈던 것을 이제 자기 아버지가 훌륭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자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조상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자기의 위치가 더 든든해지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왕실에서 황제들만 제사를 지냈는데 그 후에 제후(황제 밑에 조그마한 소 국가의 제후)들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다음에 재상들도 제사를 지내다가 춘추 전국시대에 이르러 모든 질서가 무너지면서 평민들이 “왕들의 조상만 훌륭하냐? 우리 조상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왕의 허락도 없이 평민도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중국에서 이론적인 뒷받침으로 제사를 강조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인 송나라 때에서 부터이다.
송나라 때 유교학자인 주희(혹은 주자라고 함. 주후1130-1200년 유교와 불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유교 철학을 만들어 냄. 그래서 그의 철학을 우리 나라에서는 성리학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에서 처음으로 조상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것이 하나의 철학으로까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때는 제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신라나 고구려 때에 모든 왕이 아니고 특수한 왕에게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 고려시대에 걸쳐서는 불교가 성행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일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불교국가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절에 가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무속과 불교가 섞여서 후대에 생겨난 특이한 현상이고 본래 불교국에서는 제사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성행할 때까지는 제사가 별로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중국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태조는 나라의 종교를 고려의 불교로부터 성리학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태조는 고려와 새 왕조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고려의 불교를 물리치고 성리학을 도입한 새로운 형태의 유교를 조선의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주자가 강조한 조상의 제사를 이 태조가 장려하기 시작했는데, 세종 때에는 상당히 제사가 퍼져 심지어는 서민들도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산 부모는 인격체이기 때문에 예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부모는 인격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한다는 것은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산 부모는 인격체이나 죽은 부모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한다는 것은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산 부모는 인격체이나 죽은 부모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한다는 것 그 자체가 토속 문화와 혼합적인 것이다.
산 부모와 죽은 부모는 동일시할 수 없다.
기독교가 중요시하는 것은 인격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믿는다.
그런데 죽은 부모는 인격이 아니다.
살아있을 때 인격으로 존경하고 공경을 표하지만 죽은 다음에는 기억에 불과한 것이다.
절도 인격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부모에게 절하는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죽은 부모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라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장로교 헌법에 보면 양심의 자유가 있지만 이 제사 문제는 성경에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상숭배라고 지적되어 있습니다.
제사제도는 조상숭배를 통하여 복을 받으려는 기복신앙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형태를 가진 우상숭배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조상의 혼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누구의 혼도 종교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신앙 위에서 효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성경적 신앙입니다.
어떤 성자나 위인도 물론 자신의 조상도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하물며 죽은 자의 혼을 예배함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효도와 예배는 다르며 추모와 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죽은 자의 혼백이 배회한다던가 다시 찾아와서 제사의 공양을 받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이며 또 무근한 미신이다.
영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죽는 순간 그 영은 그 시체에서 떠나며 자의로 다시 찾아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같은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혼백만 생각한 나머지 원시적 신앙 안에서 추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적 효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신앙적인 효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상재물 먹는 문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식을 먹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또한 제사음식을 만들어서 되는가 하는 고민들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오늘날처럼 도살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고 기는 이방 신전에서 도살하여 일단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쳤다가, 시중에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그 고기를 신성하게 여겨, 그 고기를 먹는 순간, 우상의 효험이 자 기의 몸 속에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만일 거듭난 그리스 도인들이 그 고기를 먹는다면 어떻게 되는가에 있었습니다.
그 고기에 어떤 사단의 힘이 작용하여 고기를 먹는 신자를 해치지는 않을까?
이 문제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이나, 혹 은 타종교 예식에 사용되었던 음식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통 고민되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먼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1-3절).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놓고 성도간에 무조건 비판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문을 엽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1-2).
본문을 읽으면서 "지식"이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가지 고 있는 의견"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즉,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는 말씀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진 의견만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다룰 때, 내가 가지 고 있는 어떤 의견이 있다면 일단은 접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교훈하고 있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들 사이에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① 하나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자, 믿음이 강한 사람 이 그를 정죄해 버리는 문제입니다.
② 다른 하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자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를 보고 신앙이 흔들거리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 종류의 문제 모두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믿음이 강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1-3에서 이 문제를 잘 설명해 줍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 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그것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기 전에, 우선 이 문제로 성도간에 서로 정죄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어떤 성도가 제사 음식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의 믿음의 형편도 살펴보지 않고 "당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으니, 큰 죄를 지었소" 라는 식의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먼저 그의 신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부터 살피고, 그가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 하반절에 보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 습니다. 맞습니다.
인생살이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내 의견이 이렇다고 내세우려는 자세보다는 나도 의견을 가지고 있으니, 상대방도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태도로 서로 존중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4-8절).
본문 4-6절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네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⑴ 모든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십 니다.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 는 줄 아 노라"(4).
어떤 사람은 하늘과 땅에 위대한 신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애동안, 타락 한 천사들인 일체의 다른 귀신들을 하나님과 같은 신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의 온갖 우상들은 한 때 천상에서 존귀한 존재였으나, 타락하여 흉측하게 변한 사단과 타락한 천사들의 작품임을 알아야 합니다.
⑵ 우리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⑶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⑷ 우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을 마치 살아 있는 신으로 알고서 그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게 되면 마음에 걸리고 약한 양심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먹든 먹지 않든 상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나빠지는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더 나아 질 것도 없습니다.
그 음식이 우상의 제단에 놓였던 것이든 일반 음식상에 놓였던 것이든 어디까지나 음식은 음식입니다.
거기에 무슨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무슨 마귀의 사악한 힘이 내재되는 것도 아닙니다.
음식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먹거리입니다.
오직 세상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귀신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장 높은 위치의 존재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조차도 우리의 받은바 이 구원의 도를 사모하고,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이 있습니다.
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말씀은 "비단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자유가 있다하더라도 우리보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그 일로 인하여 죄를 짓게 하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함을 잘못 사용하면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죄 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리의 우상의 제물을 담대히 먹는 모습을 보고서, 그 음식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하는 행위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성입니다.

둘째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리의 자유함을 보고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할 수 있다는 위험성입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10절입니다. "가령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은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러분이 신전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칩시다.
그때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여전히 속으로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담해져서 결국 그것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자유스런 행위가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형제가 여러분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그런 행동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 형제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도 죄를 짓는 셈이 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면 그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기 시작한다면, 끝내는 멸망당한다고 성경 11절에서 말씀하고 있고, 12절에는 죄를 짖게 되고, 13절에는 그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명백한 교훈을 13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고기란 우상의 제단 앞 에 올려졌던 고기를 뜻합니다.

물론, 우상 앞에 올려졌던 고기라고 해서 다른 고기와 다를 바는 없습니다.
그 고기에 무슨 사단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린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 고기를 먹으면 무슨 신령하고 신비한 힘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상 앞에 올리기 전이나, 올리고 난 후나 고기는 전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그 고기를 먹든 안 먹든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고기로 먹을 자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치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 앞에 올려진 제물은 먹지 않겠다며,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극명하게 보이고자 했던 신앙적 열심과 거룩함과 신앙의 정절을 목숨 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이제 막 우상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섬기던 시절의 그 어떠한 행위와 제약으로부터 철저히 해방되어 살고파 하며, 만일 우상의 제물을 조금이라도 손대었다가는 아직 자기의 신앙이 약하기 때문에 다시 옛날로 돌아갈까봐 노심초사 조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신앙의 양심상 자유로우니까 담대히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바울처럼 내 형제로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 난 그런 고기를 일평생 먹지 않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이제 우상의 올무에서 벗어나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려고 시도한 성도가 우리의 자유한 행동을 보고, 실망하여 우상숭배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 다면 그 영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우리는 자유 하지만, 그 자유를 나를 위해 쓰지 말아아 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성경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핵심적인 교훈은 명백합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는 덕을 세우기보다는 도리어 믿음의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무슨 특별한 효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가 그 사람의 신앙을 세워주기도 하고, 혹은 그 사람의 신앙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기독교가 보편화되어서인지 의례 껏 집안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제사 음식이나, 우상의 제물을 권하지 않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여러분의 이웃이 우상의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믿어서 그런 건 안 먹어요"하고 무조건 배척하시겠습니까? 이럴 때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전도"입니다.
전도한다는 차원에서 반갑게, 그리고 기쁘게 받으십시오.
함께 먹어야 할 형편이라면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조용히 처리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불신자가 그래도 우리를 생각해서 자기 딴에는 귀한 것이라고 우리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양심상 저는 그 음식을 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오나 주님, 이웃을 생각하여 이렇게 그가 저에게 가져다준 사랑만큼은 잊지를 않습니다.
주님! 그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그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하여 주님께로 그를 인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가정이 복음화 되지 못하여, 여전히 이름 모를 신들 앞에 제물을 올려야 하는 가정이 있다면 마땅히 성도는 그분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격려해 주고, 하루속히 온 가정이 하나님의 품안에 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를 수 있도록 협력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현재 악한 영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심판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거든 사단은 믿음을 가진 자 조차도 타락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도가 무엇보다도 가져야 할 마음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입니다.
음식이, 혹은 세상의 관습이나, 미신이 결단코 성도의 삶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강한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고민하지 마시고, 이 음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성도의 심령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면 내 일생동안 먹지 않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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