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영화

[스크랩] 바른 교회가 되는 길/고전16:13-24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21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많은 문제를 거론하고 그 치유책을 언급한 후에, 16장에 와서 결론적으로 바른 교회가 되는 길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바른 교회가 되려면 믿음으로 강건해야 합니다.
13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금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무질서하고 혼란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가 큰 시험에 빠져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13절에서 세 가지로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1)‘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왜 교회가 시험에 듭니까?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러한 경고를 받고도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치는 큰 시험에 빠졌던 것입니다.

아무리 운전에 능숙한 자라도 고속도로에서 존다면 큰 사고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날 논산 부근 집회 장소까지 9시에 도착하기 위해서 새벽예배를 마치고 오전 5시 30분에 출발하였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음성 부근인가 지나는데 졸음이 옵니다. 지금 대부분 차가 120킬로로 달리므로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데, 만약 그 때에 단 1초라도 졸면 큰 사고가 발생할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휴게소에 들려서 잠깐 쉰 다음에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차량, 최고의 운전수라도 졸면서 운전하면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목회자와 지도자들, 좋은 건물을 가진 교회라도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지금까지 성장 발전해 온 것은 깨어서 기도에 힘쓴 탓인 줄 믿으시고 계속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2)‘믿음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왜 교회가 시험에 듭니까?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에 많은 건물들이 홍수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기초공사가 단단히 된 건물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디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가 시험에 들었습니까?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등, 인간을 중심으로 파들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됩니다. 교회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어느 교회 목사는 자기가 세웠다고 하면서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도 호통을 칩니다. 어느 교회 장로는 자기 공장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가 마음에 안 들면 직원 갈아치우듯 쉽게 내 보냅니다. 그런 교회는 결코 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세웠든지, 내가 재정의 반을 담당하든지, 자기가 거의 담당하다 시피해서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자 분들이 다시 못 마땅합니다. 고전14:34에서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더니 이 구절에서는 ‘남자답게’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철저히 남성우월주의자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당시에 상황이 여자들은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사회적인 풍토이기 때문에 교회 덕을 세우기 그런 태도들 보이는 것이 좋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기 전의 사회가 이런 악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계급에 의해 높은 대접을 받든지 천한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지금부터 100년 전에는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었습니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말할 수 없이 천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칠천반(七賤班)이라 해서 일곱 직업을 가진 사람들, 즉 포졸이나 광대, 무당이나 고리장, 기생이나 갓바치, 백정은 가장 천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 때 백정들은 얼마나 천대를 받았는지, 시집을 갈 때도 가마를 못 타고 널빤지를 탔고 사람들 앞을 지나갈 적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개처럼 땅을 향해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에 맞거나 곤장을 맞아야 했고 죽을 때에는 상여도 타지 못하고 거적으로 말아 묻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사회는 얼마나 평등하게 되었습니까? 아니, 이제는 정육점이나 우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고 높은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여자 분들은 물론이고 과거 천대 받던 직업을 가진 분들은 예수님에게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우리나라가 이처럼 모순이 많은 사회였다면 이천년 전에 유대나 헬라 사회는 오죽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 분들에게 지나친 표현을 쓴 것처럼 보여도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표현 보면 강건을 강조하기 위해서 ‘남자답게’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 50가지」가 나옵니다. 그 중에 재미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남자의 얼굴은 20대는 설계도, 30대는 기초공사, 40대는 마무리, 50대는 준공이지만, 여자의 얼굴은 20대에 완공, 30대에 균열, 40대에 붕괴, 50대에 폐가가 된다. 남자들은 모이면 여자얘기를 꺼내고 여자들은 자식얘기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사랑의 대상에, 여자는 사랑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고, 여자는 아는 것도 모르는 체 한다.”

“여자는 끝까지 ‘사랑해’라고 말한 사람을 잊지 못하고, 남자는 마지막으로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말한 여자를 잊지 못한다. 남자가 유명해지면 명함에 쓸 것이 많아지고, 여자가 유명해지면 핸드백 속에 남자의 명함이 많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차이가 많습니다. 대부분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부드럽습니다. 남자는 크게 보고 여자는 섬세하게 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자는 명분이 강하고 여자는 실리에 밝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큰일은 남자와 의논하는 것이 좋고 실리를 따질 일은 여자와 의논하는 지혜롭습니다. 특히 남자는 의지적이고 마음이 큰 반면, 여자는 감정적이고 마음이 좁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남자처럼 강건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통을 좀 크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속이 좁고 옹졸하면 못씁니다. 속이 좁은 사람은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고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마음이 넓고 강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말을 듣더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갑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서로 분쟁을 일삼고, 은사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자주 시험에 드는 사람은 마음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속이 비좁은 사람은 큰 믿음을 가질 수가 없고, 또 절대 큰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속이 비좁은 사람하고 같이 지내면 매사가 피곤합니다.

이해할 줄을 모르고 관용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연약한 성도를 붙들어 주고, 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대로,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작은 만큼 역사하시고, 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크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이왕 예수님을 믿는 바에는 큰 믿음, 큰 그릇이 되셔서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른 교회가 되려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카페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병든 교회요, 점점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비록 교회당은 초라하고 교인 수는 부족해도 아카페적인 사랑이 가득한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일어난 모든 문제, 성도들 간에 발생한 모든 문제는 곧 남을 위한 사랑 대신에 자기 이기주의가 판을 침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가정이 왜 좋습니까?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교인 간에 서로 아끼고 위해 주는 이타주의 사랑으로 가득차면 누구든지 그런 교회 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의 자세로 섬기려고 하는 교회에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기계에 기름이 메마르면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고장이 납니다. 그러나 기름을 채우고 발라 주면 아주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사랑 없이 하면 서로 다투고 싸우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물론, 모든 신자들은 사랑이 무엇보다도 좋고 귀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사랑하려고 하는 데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교회가 사랑이 없다면서 교회가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기 주머니에서 단 돈 몇 만원을 내어 불우한 교우들을 위해서 구제하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를 사랑 충만한 교회로 만들기 원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 간판을 ‘사랑의 교회’라고 붙여도, 서로 사랑하자고 외쳐도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면 사랑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물질을 주는 교회가 사랑의 물질로 채움 받습니다. 목회자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그 중의 하나가 도와달라는 곳이 너무 많은 데 있습니다. 사방에서 청구서와 전화가 옵니다.

그 것을 교회에 일일이 청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는 내 주머니에서 나갑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친구 목사들을 매월 돕습니다. 그러면 놀랍지요. 하나님이 번번이 그 이상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자, 주는 교회가 받습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가진 돈이 반 크라운 1.2실링 6펜스 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엄마가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습니다. ‘이 돈이 1실링짜리 동전 2개와 6펜스 동전 하나라면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텐데.’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고 권면하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이 위선자야, 이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반 크라운을 움켜쥐고 있다니.’라는 소리가 울려왔습니다.

가책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꺼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은 그의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기를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 가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우체부 편으로 반 소프린 1.10실링 텝 금화 하나가 우송되어 왔습니다. 테일러는 즉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모든 충성과 봉사를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음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의 일을 행할 때마다 진정한 사랑의 자세로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바른 교회가 되려면 선한 일꾼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15-18절까지 보면 바울이 칭찬할 만한 일꾼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선한 일꾼으로 소개하면서 이들의 믿음의 충성과 봉사를 알아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들은 어떠한 일꾼입니까?

(1)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였습니다.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로,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첫 번째로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온 자로 바울에게는 너무나 귀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를 더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가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는 일에서부터 병든 자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돕는 일에 헌신적이었고, 그의 집안 모든 식 구들이 다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그러한 신앙은 누구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은 자로서 자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그 교회의 첫 열매 신자라면 곧 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교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성도들을 그렇게 섬긴다는 것은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교회들마다 오래된 신자들이 텃세하면서 주인 노릇 하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므로, 교회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습니다. 개척교회 처음 설립 멤버들이 목회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데바나는 교회에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목회자의 심정을 가지고 눈물을 쏟은 자였으며,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귀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 앞장서서 충성하던 교인들이 시험에 잘 듭니까? 교회에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직 선거 때에 자기보다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되고 자기는 안 되면 쉽게 섭섭한 마음이 들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체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봉사를 하되 오직 성도들을 섬기는 정신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2)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준 자들 이었습니다.
17절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중간 역할을 잘 해 주어서 서로에게 만족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와서 고린도 교인들의 허물과 약점을 털어 놓은 것 이 아닙니다. 비록 교인들의 허물이 태산같이 많았지만, 그들은 좋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또한 교회에 돌아가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에 대해서 좋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영어로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합니다. 흔히 중간에 있는 사람이 역할을 잘못 함으로써 상한 감정이 더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온 것을 내가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스데바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교회로 인해 시험에 든 신자들을 찾아가서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에 대한 오해나 불편한 마음이 풀리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에게 찾아가서도 아무리 문제가 많고 허물이 많은 신자라도 좋게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시험 들어 있는 성도의 가정에 구역장이 심방을 왔다 가고 나면 더 깊은 시험에 빠진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꾼입니까?

또한 교회 중직이 목회자에게 다녀가고 난 후에 목회자가 성도에 대해서 더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화를 조성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마다 서로 부족한 점들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사람들은 많은 데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언제나 목회자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였습니다.
18절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문제들로 인하여 사도 바울의 마음이 괴롭고 안타까웠는데,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만남으로써 마음에 시원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주의 종의 마음에 걱정과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숙한 신앙으로 주의 종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분자들 가운데서도 맡겨진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에 본이 되지 못해서 성도들과 목회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직분자들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써 성도들과 목회자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즈음 광고 중에 ‘산소같은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바나와 두 사람은 고린도교회의 산소와 같은 일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와 같은 일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는 그런 일꾼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한 일꾼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시험 들게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치게 되면 교회는 선한 일꾼, 알곡 같은 일꾼들은 점점 줄어들므로 가라지만 가득한 교회가 되어갈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부분에 가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어떤 분들입니까?

바울과 똑같이 천막을 제작하는 직업을 가진 자로서 같이 동업하면서 같이 선교여행을 다니는 동역자들 이었습니다. 사실 동업하다 보면 많은 결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같이 선교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롬16:4에 보면 이들 부부는 자기 목숨을 위해서는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는 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을 위해서 아주 헌신적으로 협력하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헌신적인 분이 될 수 있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바울이 이들의 충성과 헌신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을 알아주는 교회, 이런 분들이 앞장서서 충성할 수 있는 교회에는 많은 선한 신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반드시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이 알아주기 위해 충성하지 말고 하나님이 각자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믿음으로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참 박해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열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며칠 동안을 굶긴 후 얼음 구멍 열두 개를 뚫게 하였습니다. 한 구멍에 한 사람씩 벌거벗겨서 넣은 다음 두 팔을 벌리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는 따뜻한 방을 준비해 놓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누구든지 지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나아오라. 그리하면 살 것이요. 저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 하나 그리스도를 저버릴 수 없다고 사력을 다해 견디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만 물위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을 지키던 군인 하나가 하늘을 우러러보니 열 두 천사가 열 두 개의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가 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군인은 재빨리 군복을 벗고 그 얼음 구덩이로 들어가며 “이 사람이 버린 예수를 내가 믿겠다.”라고 하며 순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충성자를 혹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십니다.

사랑하시는 홍익의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제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앞으로 각자 하나님이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충성 봉사하되 깨어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굳건히 서서 큰마음으로 하십시오. 더 나가서는 사랑으로 섬기는 자세로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는 자,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들이 다 되심으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과 상급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