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그리스도인의 자유/고전10:23-3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31

종교개혁 당시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아주 중요한 세 편의 논문을 썼습니다. 그 책은 『교회의 바벨론 감금』,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입니다. 루터는 이 책을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가지고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주이고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본문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이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이 제한을 받아야 할 이유,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보편적 규칙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제한(고전10:23-24)

고린도전서의 문맥을 살펴보면 고린도전서 8-10장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권리사용문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매개체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논리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결론 부분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8-10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8-9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 자유는 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약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 마땅한 대가를 받고 생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대가를 받지 아니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중요한 이유를 고린도전서 9:19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두 번째 원칙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문제는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상숭배하는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10장에서 말하는 이방인들의 우상숭배하는 일에 참여하는 문제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는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되지만 이방인과의 관계를 피해서도 안 됩니다. 이방인과의 관계를 피하려면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고전5:9-10).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와는 다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사를 드린 다음에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떤 제한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3-24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여기에 “가하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합법적이다”(εξεστιν, lawful), 또는 “권리가 있다”, “허용적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우리 번역대로 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그러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마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라는 말씀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주체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너희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 너희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주장하는데,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든 것이 허용되고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논리가 잘못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논리를 가지고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는데,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 그리고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허용되거나 합법적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율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덕을 세우지도 못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문제에 있어서 고린도전서 10:24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할 이유(고전10:25-30)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왜 이렇게 제한을 받아야 할까요?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문제에 대하여 제한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먼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5을 보십시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린도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시장에 나온 고기 가운데 많은 부분이 희생제사를 위해 잡은 고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신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전과 아프로디테 신전 등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많은 양의 고기를 준비하여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예를 들면 소를 10마리를 잡는다든지, 또는 돼지 50마리를 잡는지 하는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게다가 제사장들은 그들의 몫으로 받은 희생제물을 받았는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것 외에 나머지는 시장에 팔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희생제물을 시장에서 흔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서 이러한 고기를 사지 않으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장에서 사고자 하는 고기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양심을 위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양심에 따라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기를 살 때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NIV성경은 이 부분의 의미를 살려서 “양심에 의문을 품지 말고”(without raising questions of conscienc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을 사서 먹으면 죄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지 말고 시장에 나온 것이라면 사서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 24:1의 말씀을 인용하여 고린도전서 10:26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여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그 자체로서 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리낌 없이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적인 부분을 예를 들어서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10:27을 보십시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인 불신자 친척과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5:9-10에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과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의 초대를 받아서 거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온 음식을 양심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 조건이 고린도전서 10:2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 경우는 어떤 불신자가 그리스도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상을 섬기는 일이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을 잘못된 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하는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말함으로 그리스도인을 난처하게 하거나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기 위하여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는 말을 주의해 보십시오. 차려진 음식 가운데 어떤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한 사람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말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때에 신자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따라 그의 양심에 시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양심은 먹는 사람의 양심이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의 양심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양심이 지켜보는 사람들의 양심이라는 것을 고린도전서 10:29-30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처신하는 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경우에는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먹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자유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앞의 고린도전서 10:23-24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또한 “모든 것이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합법적이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법 위에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0:30에서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해석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만일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이 말씀의 핵심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고전10:31-33)

그러면 먹지 않을 상황과 감사함으로 먹어야 할 상황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자유롭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자유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용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은 무엇일까요? 이 본문에서 보편적인 규칙 두 가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선적으로 보편적인 규칙을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0:31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요한복음 2:11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규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나타나 있는 보편적인 규칙은 고린도전서 10:32-33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여기에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신자이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신자의 자유를 사용하는 보편적인 규칙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또한 그 일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그 일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이 악한 행동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유를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되 그들의 악한 행동을 수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복음의 영광이 드러나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고전10:23)이나 “모든 일”(고전10:33)이라고 폭넓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든 일”은 단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많이 범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주관적으로 이해하여서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방식으로 행하는 방종이나 불의한 삶까지도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합법적인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는 한 가지 지식만 주장하면 그것은 교만에 빠지게 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8:1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를 시작하면서 명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많은 성도들은 부당한 일은 할 수 없지만 성경의 법에 일치하는 정당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합법적인가, 아니면 불법적인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이상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합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동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0:23-24의 명제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리고 바울은 최종적인 결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시금석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웟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라는 중국 선교사가 쓴 책에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에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던 곳에 어느 해에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농부는 자기 논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 논에 가득 고여 있던 물이 밤사이에 그 옆의 논 주인이 빼어 갔습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인 농부는 물을 다시 자기 밭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 논의 주인이 부당하게 가져간 자기의 논의 물을 다시 자기 논에 가져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자기 논에 가보니 전과 같이 옆의 논 주인이 물을 다 빼어갔습니다. 화가 난 그리스도인 농부는 그 물을 자기 논으로 전에와 같이 다시 가져갔습니다. 그의 행동은 분명 합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정당한 일을 하였는데 왜 평안함이 없습니까?”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처럼 옆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에 논에 가서는 옆의 논 주인이 물을 빼내어 가기 전에 먼저 자기 논의 물을 옆의 논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평화가 왔고 기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합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합법적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한 그리스도인이 외제 승용차를 사려고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자기 교회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제 승용차를 사지 않고 국산 승용차를 샀습니다. 그 분의 사회적인 지위나 수입으로 볼 때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이 그 승용차를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당하게 번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자유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신자의 합당한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정당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배려가 없다면 그것은 교만하고 융통성 없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자유를 우리 방식대로 사용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해 보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자유가 제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처음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에 있는 두 가지 명제를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는 이 책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서는 그리스도 안에 살며 사랑을 통하여서는 이웃 안에 산다.”(10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아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아니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하며, 덕을 세울 수 있다면 언제든지 제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유를 행사할 때 신비한 기쁨도 있으며, 덕도 세우며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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