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교회 생활의 원리/고전14:20-40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26

지금 한국사회는 목표도 없이 떠다니는 빙산과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엇 하나 시원하게 열리는 곳이 없어 보입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 때문에 서민들은 허덕이며 삽니다. 그럼에도 정치가들은 민생문제는 외면한 채, 허구헌날 당리당략에만 매여 있고 ‘다음 정권을 누가 쥐느냐?’에만 열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나 대통령의 무능함은 갈수록 더해지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주력했던 정책은 남북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북문제만 풀리면 경제문제, 안보문제, 민족의 활로가 열린다는 일념으로 북한의 많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남북이 서로 협력만 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 문제가 해결됨으로 아시아에서 우뚝 서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희망 가운데 시작된 햇빛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북한을 움직여 금강산도 열고, 개성도 열었던 것이며, 이산가족의 상봉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남북 간에 철도도 연결하여 이제 운행시기만 남아 있는 등, 무엇인가 민족의 문제가 열리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하는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와 국내여론이 정부가 무작정 퍼주기 정책에 일관함으로, 거의 무너지던 북한을 재기하게 만들었고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여론의 압박으로 정부는 약속했던 비료와 식량지원을 6자회담복귀와 연계시켜서 모든 지원을 중단하자, 북한도 이산가족의 상봉, 20% 진행된 면회소 공사도 일방적으로 중단하고 있으며, 개성공단에 파견된 북한의 정부요원들도 철수를 했습니다.

너무나 한심한 것은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입니다. 남한의 햇빛정책에 따라 10여년 이상이나 적극적으로 물자를 도와주었음에도 유리걸식하면서 도탄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외면한 채 전쟁준비나 무기생산에만 광분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너무나 통탄한 일입니다. 더욱이나 세계 앞에 무력시위 하듯이 미사일을 발사 실험을 강행하는 모습은 광신 집단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듭니다.

그에 따라 가뜩이나 지도력을 의심 받고 있던 노대통령과 지금의 정부는 국내와 국제 사회에서 더욱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는 입장이요, 다시금 안보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르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정치와 경제, 교육과 안보(安保) 등, 사방이 꽉 막힌 느낌입니다. 그런데다가 여기 저기 터지는 일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들뿐입니다.

지난 8일 발표된 ‘2006년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는 한국을 인신매매국으로 규정했습니다. 왜 우리나라가 이런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까? 미국 연방수사국(FBI) 비롯해 10개 기관이 합동 단속반을 편성, LA와 샌프란시스코 일대 한인 유흥업소를 동시 급습한 결과 두 개의 브로커 40여명의 한국 조직원, 그리고 143명의 성매매 여성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LA경찰국 수석공보관 제이슨 리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만 한 달에 70-80명의 매춘 여성이 체포되고, 그 중 90% 이상이 한국 여성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서민들의 딸들이 이렇게 팔려나가 몸을 팔고 있다는 소식은, 세계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소위 상류층이라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습니다.

미국대학수능시험 준비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서울 강남 어느 어학원에서 받는 두 달 수강료가 무려 6백만 원이라고 합니다. 이 학원 뿐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나라 꼴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는 대로 우리나라 교육이 입시위주 일 뿐, 전혀 철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병든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원칙이나 원리가 없습니다. 가장 원칙을 지켜야 할 법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한국교회 책임이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1,000만 이상이 된다는 한국 교인들이 이 사회를 바르게 이끌지 못하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도 원리나 원칙이 없이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목회철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계가 혼란에 빠지고 대형교회들이 한국교회를 잘못 오도(誤導)함으로 한국 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원리를 따라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원리를 무시한 채 너무 자기 고집대로만 교회 생활을 하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 생활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원리는 지혜롭게 교회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는 자의 삶은 언제나 좌충우돌식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많아도 그 돈을 바르고 의롭게 쓸 줄 아는 지혜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권력이 있어도 그 권력을 바르게 쓰는 지혜가 없으면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지식이 많아도 그 지식을 올바로 쓰는 지혜가 없으면 죄짓게 됩니다. 모든 일에 지혜가 있어야 하되, 특별히 교회 생활 하는 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한 배경은 고린도 교인 중에 자기가 옳다 여기면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자기 생각대로 하는 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데 누가 막을 수 있는가?’라면서 예배 시간에도 공개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더 나가서는 서로 자기 방언을 자랑하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주 뛰어날지 모르지만, 성도들과의 관계는 별로 안 좋습니다. 외골수 신자입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요,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만약, 가정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이나 화장실을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다른 식구들이 불편합니까? 식구들과 의좋게 살려고 하면 공동생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교회 생활을 하는 데에는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신앙이 잘못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지적한 말씀을 보십시오.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자기가 방언 은사를 받았을 때 계속 방언으로만 말을 한다면 그 방언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 은사를 받았어도 지혜롭게 방언이 필요할 때 방언으로 기도할 것이며,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할 때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은사 문제 뿐 아니라 우리는 범사에 모든 교회 생활에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봉사를 하는 데도 지혜가 있어야 하고, 헌금을 바칠 때도 지혜가 있어야 하고, 대표 기도를 하는 데도 지혜가 있어야 하고, 예배를 드릴 때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헌금을 바치고 싶은데 남편이 믿음이 없어서 핍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달 십일조봉투에다가 ‘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러나 저의 이름은 주보에다 내지 말아 주세요.’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은 주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직분을 따라 봉사하기 위해서 토요일에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 놓습니다.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정성껏 다 준비해 놓고 자신은 주일날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 역시 신앙생활의 지혜에 속합니다. 열심히 하면서도 지혜가 없으면 욕을 먹고, 열심을 나타낸다는 노릇이 교회에 가시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느 성도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남침례교단의 유명한 빌 핸드릭스라는 교수님이 계신데, 교단 전체에서 존경을 받는 대단한 학자이십니다. 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으로 모시기 위해서 그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핸드릭스 박사께서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장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교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는 그런 지도력이 저에게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람을 한 분 추천하겠습니다. 제 제자 가운데에 폴랏트 박사라는 분이 계신데 이분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고 하면서 자기의 제자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추천을 참고해서 폴랏트 박사가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답니다. 학장이 된 다음에 폴랏트 박사를 가르쳤던 스승인 핸드릭스 박사는 자기의 제자 밑에서 교수 일을 하면서 신실하게 자기의 제자를 섬기면서 그 학교의 발전에 혁혁하게 기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지혜로운 삶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자신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것을 망각하는 데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어두움이 초래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모든 성도들은 악을 행하는 데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되고, 주의 일을 행하는 데는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둘째 원리는 덕을 세우는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하면 안 됩니다. 또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내가 아무리 하기가 싫어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고 피해를 주게 된다면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인내하면서 해야 합니다. 고전 12장에서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는 일도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몸이라는 기관들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이 연신 입에다 음식을 넣어줄 뿐, 자기는 아무 것도 취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많은 힘을 가져다줍니다. 눈은 무엇을 살피고 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봅니다.

다리는 걸어가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걸어갑니다. 그런데 눈이 피곤하다고 해서 걸어가면서 눈을 감는다면 온 몸이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입이 먹기 싫다고 벌리지 않는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의 원리는 곧 교회 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전부 내게 유익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이 나보다 다른 형제자매를 먼저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각자 신앙생활에 힘쓴다면, 너도 살고 나도 살므로 교회는 정말 천국으로 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 너무 말씀을 모르고, 교회 생활의 원리를 모르는 분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 늘 앉던 자리로 갑니다. 그런데 와보니 다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분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답답한 신자는 자기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앉았던 분은 너무나 민망하여 다른 자리로 가면서 다시는 그런 교회는 나오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느 분은 긴 의자 입구에 앉아서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불편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식 있는 자들, 부요한 자들, 은사 받은 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나약하고 추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까? 교회의 덕을 생각하지 않고 각자 자기 자랑에 빠져서 자기를 과시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33절 말씀을 통해서 익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교인들이 너도 나도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가 받은 은사를 내세우고 과시하다 보니까 교회가 혼란에 빠지고 질서가 무너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분열의 모습이 나타남으로 교회가 난장판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어지럽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특히 은사 받은 분들은 삼가 조심을 하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가진 자들이나 많이 배운 자들, 혹은 지위가 높은 분들은 있는 체하거나 가진 것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교회 안에서는 전체적으로 덕이 되는 일은 힘쓰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셋째 원리는 질서대로 교회 생활해야 합니다.
40절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방언 말하기를 금지시키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만 적당하게 할 것이며, 질서대로 하라고 강조합니다. 방언 은사는 분명히 성령께서 주신 은사인데 그것을 강제로 금지시키거나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할 때는 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바울 당시 예배는 짜임새 있는 순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감동되는 대로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간증하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26절 말씀대로 계시 받은 대로 신앙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퀘커파에서는 설교 전에 두 세 사람이 간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배의 문제는, 너나없이 은혜 받았다 예언하고 방언하고 계시를 말하므로 너무나 무질서해지고 어느 때는 한없이 예배시간이 길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7-30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특히 여자 성도들에게는 아주 안 좋은 구절이 있습니다. 34-35절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오늘날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 말씀대로 여자 성도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게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도 여자 총리나 여자 헌법재판소장이 나오는 시대요, 교회에서도 여자 목사, 장로들을 세우는 시대에서 그런 말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말씀 드린 대로 그 당시는 여성들이 함부로 공개석상에서 발언하는 것을 허락지 않던 시대인데, 여성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너무나 자유를 주장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다 보니 덕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예배 시간에 여성들이 감정이 풍부하므로 자주 계시 받았다고 간증하는 경우가 많고 무슨 의논하는 과정에서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지나친 발언을 함으로 불신자들이나 처음 믿는 자들에게 덕이 안 됨으로 이런 권고를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떤 뛰어난 은사를 가졌고, 또한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와 탁월한 실력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교회 생활에 있어서는 당회나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를 따를 줄 알아야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만약에 사회적으로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은 분이 교회를 나와 보니 장로님들 중에 학벌도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장로님들을 무시하거나 그 지도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면 교회 질서는 무너질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결국 기독교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한 장로님들이요, 중직일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분들인 줄 알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런 겸손한 자들을 높이 들어 쓰시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다른 교회 제직수련회에 가서 강의할 때마다 목회자는 운전수와 같다고 말합니다. 운전대를 맡긴 이상, 운전방법과 가는 코스는 그에게 맡기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옆에서 일일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잔소리하면 주눅이 들어서 실수를 함으로 사고가 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제가 운전하고 다닐 때 집사람하고 다니면 제일 편합니다.

사실 저는 딴 것은 몰라도 길은 잘 알지만, 집사람은 딴 것은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길눈은 영 어둡습니다. 어느 때는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돌아서 가도 잘 가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므로 더 책임감을 느끼고 운전을 잘 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만약 옆에 앉아서 왜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 왜 이쪽으로 가야 하는데 저쪽으로 가느냐고 잔소리 한다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습니까?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운전대를 맡겼다면 운전 방법이나 가는 코스는 그에게 맡기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나 중직들은 제 목회방법을 크게 반대하지 않고 따라 주심으로 30년 목회를 은혜 가운데 마쳐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후임자가 오더라도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운전자마다 운전방법과 가는 코스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마다 다 받은 은사나 운영방법이 다릅니다. 젊은 후임자가 와서 다소 거칠게 운전하고 미숙하게 운영하더라도 지나치게 잔소리하거나 간섭하면 점점 주눅이 들어서 큰 목회자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자인 줄 알고 온 당회원들과 중직들, 그리고 교인들이 겸손한 자세로 적극 협력할 때에 교회가 질서가 잡히고 든든히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후임자를 구할 때에 조만식 장로님과 그 당회는 누구를 택한 줄 압니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는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일본 명치대학 출신이고 사회적인 신분도 사회의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장로님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 학생으로 제자였고 나이도 15세밑 이었습니다. 출신도 평안도가 아니고 경상도였습니다. 모든 면에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음에도 교회와 한국교계를 위해서 친히 마산까지 찾아가서 모셔왔으며 주 목사님이 순교당할 때까지 깍듯이 모셨던 것입니다. 과연 조만식 장로님은 큰 그릇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추앙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겸손한 조만식 장로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도 은혜 가운데 성장 발전해 오면서 많은 일을 감당한 것처럼 앞으로 우리 온 당회원들이나 중직들, 교우들이 더욱 교회 생활의 원리인 지혜와 덕과 질서를 따름으로 더욱 든든히 서서 한층 더 성장 발전하고 한 층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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