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설날과 우상제물/고전8:1-13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03

오늘은 지난해 추석이나 성탄절, 신정처럼 공교롭게도 주일이자, 설날입니다. 금년 들어서 고린도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오늘은 8장을 미리 앞당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설날이 되면 신자들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제사 문제이고 또한 제사 음식이나 고사 음식을 먹어야 되느냐, 아니냐?’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불신자들이 이 날을 맞으면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일은 조상 제사입니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누는데 그 복을 받는 방법도 조상에게 제사를 정성껏 지냄으로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도 수천 만 명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부모가 생존해 계시는 동안 정성껏 잘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이지, 죽은 조상이 귀신이 되어서 떠돌아다니다가 제사 때 오셔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상들이 제사에 소홀히 하는 후손에게 노하셔서 재앙을 주기도 하고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기분이 좋으셔서 복을 주기도 한다고 믿어서 제사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고, 사람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마는 것이라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만약 죽은 조상이 영계(靈界)를 떠다니시다가 배고파서 명절이나 제사 때 찾아오신다고 믿는다면 삼시 세 때를 음식을 차려야지 일년에 한두 번 제사 지내는 것도 너무 모순된 생각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추도예배를 드립니다. 조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자나 죽은 자의 영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부모님과 그 유훈을 기억하며 서로 우애함을 다짐하는 시간이 바로 추도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식도 다만 찾아온 형제들이나 손님들을 위해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우상숭배입니다. 제사나 고사를 지낸 후에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제사를 지낸 음식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먹어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그러한 문제가 교회 안에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고린도에서는 도살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고기는 이방 신전(神殿)에서 도살하여 일단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쳤다가, 시중에 유통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 고기를 신성하게 여겨, 그 고기를 먹는 순간, 우상의 효험이 자기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만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기를 먹는다면 어떻게 되는가에 있었습니다. 그 고기에 어떤 사단의 힘이 작용하여 고기를 먹는 신자를 해치지는 않을까?

이러한 문제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사상이나 고사, 혹은 굿에 사용되었던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고민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는 방법을 무엇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1. 신앙적인 지식보다 덕을 나타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얄팍한 신앙적 지식으로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강하게 비판함으로 상처를 주지 말고 그들을 사랑함으로 덕을 나타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지식’이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견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본다면 우상 제물에 대한 제 각각의 견해를 말합니다.

특히 그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율법적인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 반면,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우상이 무슨 신이냐? 다만 돌이나 나무로 깍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앞에 놓았던 고기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줄 믿고 먹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간에 서로 주장하고 비판함으로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아직도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너무 강한 비판을 함으로 신앙의 상처를 입히게 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이 우상제물을 신전에서 마음대로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일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가장 강조하게 된 것은 교리도 중요하고 신앙적인 견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혀셔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4:3에서도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강조하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믿음이 연약한 신자라도 하나님이 저들을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제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라는 문제 때문에 지나치게 자기주장을 하거나 남을 비판함으로 믿음이 약한 신자들이 상처를 받게 된다면 하나님이 부르시고 받으신 자들을 병들게 하는 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어떤 성도가 제사 음식을 먹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소위 믿음이 강하다는 신자가 믿음이 약한 신자의 형편도 살펴보지 않고 “아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우상제물을 먹다니, 내가 어느 부흥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제사나 고사를 지낸 음식을 분석해 보니까, 영양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는 이미 귀신이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음식을 먹었으니 벌을 받을까 두렵소.”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약한 신자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신앙지식으로 이처럼 다른 이의 신앙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음력 정초 때에 보면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도 몰래 점을 치거나 사주관상을 보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자기 교회 권사님이 목사님께 중매를 요청하더랍니다.

“우리 아들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연수 중에 있습니다. 좋은 신부 감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면서 “신부 감으로 나이가 24살이나 25살 정도가 좋고 이화여대를 나온 피아니스트면 제일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수소문 끝에 그런 처녀를 소개해 주었고 약혼식 날짜까지 정했답니다. 그런데 약혼식 전날에 그 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약혼식을 취소해야겠습니다. 어디 가서 사주를 보았더니 궁합이 안 맞는답니다. 우리 아들은 17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자를 얻어야 잘 산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대단히 야단을 쳤을 줄 압니다. 소위 권사란 분도 이 모양 이 꼴인데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집사님은 자기가 전도한 신자가 점을 보러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화가 나서 혹독하게 야단치기를 “세례 받은 사람이 아직도 미신을 못 버리다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당신을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는데, 너무나 낙심이 되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느낌입니다.”라고 함으로 믿음의 큰 상처를 입힙니다.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세히 가르치면서 타이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란 후에는 그런 어린 아이의 일, 세상적인 일을 저절로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 할 일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신앙의 수준에 따라 잘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믿음의 견해 때문에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무서운 교만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1절 말씀 하반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교리도 다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 줄 알고 언제나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덕을 나타냄으로 마침내 장성한 신앙, 믿음이 강한 자들로 양육하는 것이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 할 일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신앙적 양심의 기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4-7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는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 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때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도무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제물을 먹어도 좋으냐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우상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줄 알고 먹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판단기준은 각자 믿음의 양심에 따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행23:1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신앙문제에 부딪혔을 때 성경에도 분명하지 않으면 각자 믿음의 양심에 따라 기도 중에 결정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 제물이 우상에게 절한 것이므로 먹으면 죄가 된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양심에 꺼리면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양심에 꺼리면서 먹으면 7절 말씀대로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 나가서는 더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4절대로 모든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신 줄 믿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는 무슨 특별한 귀신의 힘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말고 먹으십시오.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염리동 경성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조희완 목사님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제사상에 차렸던 음식을 일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께름칙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식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눈총과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사 음식이건 고사 음식이건 마음대로 먹는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무슨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거든 성경 말씀으로 해결하십시오. 성경에 분명치 않거든 믿음의 양심에 따라 기도 중에 결정하시고 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8-13절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말씀은 비단 우상의 제물이라고 해도 우리 양심에 꺼리지 않는다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자유가 있다하더라도 우리보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그 일로 인하여 죄를 짓게 하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우리의 자유함을 잘못 사용하면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리가 우상의 제물을 담대히 먹는 모습을 보고서, 그 음식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하는 행위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성입니다. 둘째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리의 자유함을 보고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할 수 있다는 위험성입니다.

10절대로 가령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은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러분이 우상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칩시다. 그때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여전히 양심으로는 가책을 받으면서도 대담해져서 결국 그것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1절 말씀대로 여러분의 자유스런 행위가 믿음이 약한 형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살리신 형제에게 양심의 상처를 입히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상 제물보다는 술 담배 이야기를 하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사실, 술 담배 한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술 담배를 안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온 지 오래되지 못한 분들도 술 담배를 끊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교회 나온 지 오래된 집사님이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래된 신자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면 마침 위선자를 보는 것 같아서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동안 열심히 술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던 초신자가 오래 믿은 신자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고 담대함이 생겨져서 마음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12절 말씀대로 형제에게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양심을 상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호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고기란 우상의 제단 앞에 올려졌던 고기를 뜻합니다. 물론, 우상 앞에 올려졌던 고기라고 해서 무슨 귀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린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 고기를 먹으면 무슨 신령하고 신비한 힘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상 앞에 올리기 전이나, 올리고 난 후나 고기는 전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그 고기를 먹든 안 먹든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고기로 먹을 자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치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 앞에 올려진 제물은 먹지 않겠다며,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극명하게 보이고자 했던 신앙적인 정절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이제 막 우상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우상을 섬기던 시절의 그 어떠한 행위와 제약으로부터 철저히 해방되어 살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우상숭배를 많이 하던 분들이 교회 나온 후에 모두 끊고 살면서, 만일 우상의 제물을 조금이라도 손대었다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까 해서 노심초사 조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허랑방탕하던 생활을 청산하면서 술 담배도 끊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난 신앙의 양심상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우상의 제물도 먹고 술 담배도 먹어도 된다고 행동함으로 우상 제물과 술 담배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실족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진노하실 일이 아닙니까? 아니 됩니다. 바울에게서 13절에서 고백한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자기 신앙 양심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형제가 상처가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든지 자기 신앙의 정도나 자기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보다 언제나 교회의 덕과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은퇴하신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자기가 50대 장로였을 때 교회가 큰 시험에 빠져서 목사님파와 장로님파가 싸움을 벌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교회 안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지면서 한편에서는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려는 목사님을 자기가 앞장서서 끌어 내리려 하고 목사님 편에 선 젊은 집사님들은 그것을 막노라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서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해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언뜻 보니까, 당시 고등부 회장이었던 자기 아들이, 무슨 일 때문에 본당에 들어왔다가 강대상에서 앞장서서 싸움하고 있는 자기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더랍니다. 순간적으로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더랍니다. 결국 그 목사님은 후에 교회를 떠남으로 교회가 안정되었으나, 자기 아들은 그때부터 자기를 피하는 눈치더니 결국 대학생이 된 후 교회를 영원히 떠났다고 합니다.

그 은퇴 장로님은 “당시는 자기 딴에는 교회를 위해 바른 일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 어린 신자들과 아들에게는 큰 신앙의 상처를 남긴 결과가 되었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여러분의 신앙적인 주장과 행동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신앙의 상처나 실족을 주지 말고 언제나 덕을 세우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