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인에게 나귀와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나귀는 마굿간에 매어져 보리나 건초를 충분히 공급받아, 대체로 나귀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언제나 장난치면서 뛰어다니고, 온갖 재미난 방법으로 주인한테 몸을 비비대거나 어리광을 부려서 온통 귀염을 받습니다, 주인 무릎 위에 오르는 것도 허락 받고 있었습니다.
나귀에겐 정말이지 일이 잔뜩 있었습니다. 나귀는 하루종일 장작을 운반하고, 밤에는 방앗간에서 한바탕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귀가 자기 자신이 운명을 한탄하고 슬퍼함에 따라, 강아지가 저렇듯 안락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한층 나귀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주인에 대해 강아지와 같이 한다면,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느 날 나귀는 밧줄을 끊고 홀에 뛰어들어 아주 기묘한 꼴로 걷어차고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꼬리를 휘두르고, 저 귀염둥이 강아지의 장난치는 꼴을 흉내내어, 마침 주인이 식사하고 있던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그것을 두 조각으로 부수고 사기 그릇을 모두 깨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만두려 하지 않고 마침내 주인한테 덤벼들어 주인을 때렸습니다. 하인들은 주인의 위험이 보통 예사가 아님을 보고, 이제는 손을 써야 할 때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귀의 애무로부터 주인을 해방시키고 나서, 몽둥이와 말뚝으로 이 어리석은 동물을 마구 후려갈기는 바람에 나귀는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귀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외쳤습니다.
"왜 나는 나의 타고난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장난과 찡그린 얼굴 따위의 강아지에 불과한 그런 짐승의 흉내를 내려 했을까!"
나귀처럼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은사의 분수대로 살아야 합니다. 스펄젼은 말하길 "콩을 먹고 사는 비둘기가 고기를 먹는 독수리를 부러워하는 일이 없고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떼가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는 양식이 다르고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매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때부터 세상사람들과 먹는 양식이 달라지고 사는 세계가 달라집니다. 저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행복의 시작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은사(약5:15), 신유의 은사(마10:1, 고전12:9)), 예언의 은사(고전14:3-5), 영분별(고전2:12,13), 방언(막16:17),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언어통변… 이러한 모든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이 은사들을 지, 정, 의의 세 성격별로 구분한다면 지혜, 지식, 영분별의 은사는 지적인 은사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유와 능력의 은사는 의지적인 은사입니다. 강한 의지적인 사람들이 이런 은사를 받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이 이런 은사를 잘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은사 혹은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를 받아도 감정이 좀 예민하지 못한 사람은 방언이 안 터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또 이 모든 은사를 다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슨 은사든지 은사를 받으면 확신이 없는 사람이 확신을 가지게 되고 무능하던 사람이 능력을 받아서 교회와 자신의 신앙 생활에 참으로 유익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7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를 반대하거나 무익하다고 하고 은사 받은 사람을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한심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만이 제일이거나 은사만 받으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인격형성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고 체험하신 바대로 우리 교회나 저 자신이 다 은사를 받고 늘 성령충만, 은사충만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은사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대개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저 사람은 예언한대" "저 사람은 방언하고 방언통변도 한대"하면서 "그 사람이 무슨 은사를 받았나?"하는 것으로 그 사람 전체를 저울질합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또 자기가 그것으로 다된 줄 압니다.
어떤 집사가 부흥회 때 방언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 목사님은 방언을 못하니까 예배시간 이 다 되어서 강단으로 뛰어 올라가서는 기도하시는 자기 목사님 머리에 손을 얹고 흔들면서 "주여 믿습니다! 우리 목사님 방언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이렇게 은사를 받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말씀의 인격화 혹은 말씀의 생활화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은사를 받았어도 뼈가 없는 사람과 같고 뿌리가 없는 식물과 같아서 언제 쓰러지고 말라 버릴지 모르는 것입니다.
1.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성경에서 대조적인 두 인물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다 사사시대 사람으로 삼손과 사무엘 입니다. 삼손도 사무엘도 다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큰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삼손은 얼마나 성신충만한 은사를 받았던지 기운이 세어 사자의 입을 찢어 죽이고 말 턱뼈 하나만으로 블레셋 군사 천명을 쉽게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다가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사사로 기름 받음을 받고 성신을 받은 사무엘은 삼손처럼 기운이 세서 사자새끼 하나 찢어 죽였다는 말이 없고 또 그 손으로 블레셋 군사 하나 때려 눕혔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무슨 희한한 은사를 받은 사람 같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씀의 인격자로서 영원히 쓰임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희한한 기적의 사람 삼손은 그 나라를 구원하지 못했으나 사자새끼 한 마리 죽이지 못한 사무엘은 그 나라를 구원하고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만이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인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삼손과 같이 은사는 일시적인 것이요 그것에만 치우치게 되면 일시로 쓰임 받다가 버림받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 속에 인격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건전한 교인이 됩니다.
발람과 이사야는 다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다가 버림을 받았고 이사야는 영원히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발람은 이사야처럼 말씀대로 산 인격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왕들 중에 사울왕과 다윗왕이 대조적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다 기름부음을 받고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은 영원히 쓰임을 받는 하나 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발람은 이사야처럼 말씀대로 산 인격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왕들 중에 사울왕과 다윗왕이 대조적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다 기름부음을 받고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은 영원히 쓰임을 받는 하나 님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 목동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생활화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영원히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도 말씀이 내 생활 속에 나타나고 인격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일시로 쓰임을 받다가 버림을 받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일시적인 사람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고용하는 데 있어서 무슨 급한 일이 있을 때만 그 사람의 속마음도 알아보지 못하고 숙달된 기술도 없지만 그 대신에 특별한 보장이나 약속 없이 쓰다가 내보내는 임시 고용인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쓰임 받다가 버림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내 생활 속에 나타내는 말씀의 인격자가 되어서 영원히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나가시다가 끝 부분에 가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다른 은사들은 다 일시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인격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예언도 믿음도 폐하여 없어지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격적인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값진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도 예수 믿은 지 한 달도 안 되었어 도, 간절히 기도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쓰디쓴 경험을 해야 하고 희생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와 직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2:8에 보면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교사라고 했고 그 다음 끝으로 가서 능력이나 신유나 방언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사도나 선지자로 교사는 인격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큰 은사보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준비 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립니까?"하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설교준비는 최소한도 10년내지 20년 걸립니다" 하더랍니다.
설교를 얼마나 웅변적으로 잘하느냐 보다 설교하는 그 자세가 설교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멧시지를 전달하는 그 인격 전체가 설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설교자 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선 최소한도 10년내지 20년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를 발음까지도, 제스쳐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렇게 부흥되지 않고 그 설교는 감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설교는 녹음기처럼 똑같이 할 수 있으나 오랜 세월동안 설교자가 될 수 있는 연단을 받지 못하고 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인격화한 말씀보다 능력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생활로 실천해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생활하게 만들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설교할 때 몇 마디 설교할 때 몇 마디 설교라고 다른 사람에게 기도의 영을 불어넣어 줍니다. 또 헌금을 잘 바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줍니다. 또 죽을병에 걸렸다가 고침 받은 사람이 대개 신유의 은사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말씀대로 사는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은사도 받고 말씀대로 살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2.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방언, 예언, 신유 등과 같은 은사를 외적인 것이라고 하면 사랑과 같은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식물에서 외부로 나타난 것은 잎사귀들이고, 내적인 것은 뿌리입니다. 그런데 줄기나 잎사귀도 중요하지만 뿌리가 더 중요한 것과 같이 외부로 나타나는 은사만 있고 말씀의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하면 언젠가 그 신앙은 시들어 버리게 되고 그 인격은 파멸되고 맙니다.
뿌리가 없이 그 식물이 계속 살 수 없는 것 같이 은사만 받고 말씀의 인격이 형성되지 않으면 영원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갓 예수 믿고 용케 은사를 받아서 방언이나 예언을 한다고 오랫동안 말씀대로 살아온 권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주의 종을 무시하고 교만해지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박태선 장로 같은 사람이 이단이 되고 사탄의 종이 된 것은 불 받고 병 고치는 은사 받았다고 모든 목사는 다 삯군이고 다 자기에게 와야 된다고 호통치다가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사와 불이 최고가 아닙니다. 먼저 말씀이 내 인격 속에 스며들어야 됩니다. 말씀의 뿌리가 있어야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15 이하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하고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지자와 그렇지 않은 선지자는 그 생활의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진실하게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도 없고 열매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참된 선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못된 열매맺는 못된 나무는 언젠가는 찍혀 불 속에 던져지고 맙니다. 또 이어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혀 죄를 안 짓고 완전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입으로만 말씀을 전했지 자기 생활로 그 뜻을 행하고 나타내는 진실한 노력이 없는 사람은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17:22-23)하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 고치고 선지자 노릇한 것이 악령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은사를 도리어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만 사용했지 말씀대로 진실하게 살고 십자가 지는 노력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은사는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고 행해도 말씀대로 진실히 살고자 하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리라"(마 17:24-25)고 했습니다.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고 입으로 전하기만 하고 진실하게 생활에 실천하지 못하면 무슨 은사와 기적을 행해도 일시적인 것뿐이지 언젠가는 심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은사도 좋고 중요하여 충만히 받아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진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생활하려면 말씀을 중심으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성령께 의지하여 성령의 도움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고 충동과 본능대로 행동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진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정직하게 회개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자나 본능의 충동대로 욕심나는 대로 행동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구약 시대에 능력과 말씀을 나타내 보였으나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받으시면서 인간을 구원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육신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을 굳게 하려고 주십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롬1:11)
둘째, 안위를 얻게 하려고(롬1:12)
셋째,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려고(롬5:15,16)
넷째, 각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다섯째,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기 위하여(막16:17-20)
여섯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행1:6-8)
일곱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롬15:18,19, 29)
여덟째,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기 위하여(고전1:7)
아홉째,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도록(고전12:28-31)
열 번째, 큰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히2:3,4)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은사를 자기 유익이나 명예를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은사를 주신 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겸손한 자세와 순종하는 마음으로 내가 맡은 일을 충성되게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는 덕, 사회에는 유익, 자신에게는 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귀에겐 정말이지 일이 잔뜩 있었습니다. 나귀는 하루종일 장작을 운반하고, 밤에는 방앗간에서 한바탕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귀가 자기 자신이 운명을 한탄하고 슬퍼함에 따라, 강아지가 저렇듯 안락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한층 나귀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주인에 대해 강아지와 같이 한다면,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느 날 나귀는 밧줄을 끊고 홀에 뛰어들어 아주 기묘한 꼴로 걷어차고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꼬리를 휘두르고, 저 귀염둥이 강아지의 장난치는 꼴을 흉내내어, 마침 주인이 식사하고 있던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그것을 두 조각으로 부수고 사기 그릇을 모두 깨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만두려 하지 않고 마침내 주인한테 덤벼들어 주인을 때렸습니다. 하인들은 주인의 위험이 보통 예사가 아님을 보고, 이제는 손을 써야 할 때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귀의 애무로부터 주인을 해방시키고 나서, 몽둥이와 말뚝으로 이 어리석은 동물을 마구 후려갈기는 바람에 나귀는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귀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외쳤습니다.
"왜 나는 나의 타고난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장난과 찡그린 얼굴 따위의 강아지에 불과한 그런 짐승의 흉내를 내려 했을까!"
나귀처럼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은사의 분수대로 살아야 합니다. 스펄젼은 말하길 "콩을 먹고 사는 비둘기가 고기를 먹는 독수리를 부러워하는 일이 없고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떼가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는 양식이 다르고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매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때부터 세상사람들과 먹는 양식이 달라지고 사는 세계가 달라집니다. 저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행복의 시작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은사(약5:15), 신유의 은사(마10:1, 고전12:9)), 예언의 은사(고전14:3-5), 영분별(고전2:12,13), 방언(막16:17),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언어통변… 이러한 모든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이 은사들을 지, 정, 의의 세 성격별로 구분한다면 지혜, 지식, 영분별의 은사는 지적인 은사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유와 능력의 은사는 의지적인 은사입니다. 강한 의지적인 사람들이 이런 은사를 받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이 이런 은사를 잘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은사 혹은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를 받아도 감정이 좀 예민하지 못한 사람은 방언이 안 터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또 이 모든 은사를 다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슨 은사든지 은사를 받으면 확신이 없는 사람이 확신을 가지게 되고 무능하던 사람이 능력을 받아서 교회와 자신의 신앙 생활에 참으로 유익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7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를 반대하거나 무익하다고 하고 은사 받은 사람을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한심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만이 제일이거나 은사만 받으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인격형성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고 체험하신 바대로 우리 교회나 저 자신이 다 은사를 받고 늘 성령충만, 은사충만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은사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대개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저 사람은 예언한대" "저 사람은 방언하고 방언통변도 한대"하면서 "그 사람이 무슨 은사를 받았나?"하는 것으로 그 사람 전체를 저울질합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또 자기가 그것으로 다된 줄 압니다.
어떤 집사가 부흥회 때 방언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 목사님은 방언을 못하니까 예배시간 이 다 되어서 강단으로 뛰어 올라가서는 기도하시는 자기 목사님 머리에 손을 얹고 흔들면서 "주여 믿습니다! 우리 목사님 방언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이렇게 은사를 받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말씀의 인격화 혹은 말씀의 생활화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은사를 받았어도 뼈가 없는 사람과 같고 뿌리가 없는 식물과 같아서 언제 쓰러지고 말라 버릴지 모르는 것입니다.
1.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성경에서 대조적인 두 인물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다 사사시대 사람으로 삼손과 사무엘 입니다. 삼손도 사무엘도 다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큰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삼손은 얼마나 성신충만한 은사를 받았던지 기운이 세어 사자의 입을 찢어 죽이고 말 턱뼈 하나만으로 블레셋 군사 천명을 쉽게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다가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사사로 기름 받음을 받고 성신을 받은 사무엘은 삼손처럼 기운이 세서 사자새끼 하나 찢어 죽였다는 말이 없고 또 그 손으로 블레셋 군사 하나 때려 눕혔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무슨 희한한 은사를 받은 사람 같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씀의 인격자로서 영원히 쓰임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희한한 기적의 사람 삼손은 그 나라를 구원하지 못했으나 사자새끼 한 마리 죽이지 못한 사무엘은 그 나라를 구원하고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만이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인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삼손과 같이 은사는 일시적인 것이요 그것에만 치우치게 되면 일시로 쓰임 받다가 버림받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 속에 인격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건전한 교인이 됩니다.
발람과 이사야는 다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다가 버림을 받았고 이사야는 영원히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발람은 이사야처럼 말씀대로 산 인격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왕들 중에 사울왕과 다윗왕이 대조적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다 기름부음을 받고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은 영원히 쓰임을 받는 하나 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발람은 이사야처럼 말씀대로 산 인격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왕들 중에 사울왕과 다윗왕이 대조적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다 기름부음을 받고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일시적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은 영원히 쓰임을 받는 하나 님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 목동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생활화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영원히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도 말씀이 내 생활 속에 나타나고 인격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일시로 쓰임을 받다가 버림을 받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일시적인 사람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고용하는 데 있어서 무슨 급한 일이 있을 때만 그 사람의 속마음도 알아보지 못하고 숙달된 기술도 없지만 그 대신에 특별한 보장이나 약속 없이 쓰다가 내보내는 임시 고용인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쓰임 받다가 버림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내 생활 속에 나타내는 말씀의 인격자가 되어서 영원히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나가시다가 끝 부분에 가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다른 은사들은 다 일시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인격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예언도 믿음도 폐하여 없어지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격적인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값진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도 예수 믿은 지 한 달도 안 되었어 도, 간절히 기도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쓰디쓴 경험을 해야 하고 희생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와 직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2:8에 보면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교사라고 했고 그 다음 끝으로 가서 능력이나 신유나 방언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사도나 선지자로 교사는 인격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큰 은사보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준비 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립니까?"하고 물으니까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설교준비는 최소한도 10년내지 20년 걸립니다" 하더랍니다.
설교를 얼마나 웅변적으로 잘하느냐 보다 설교하는 그 자세가 설교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멧시지를 전달하는 그 인격 전체가 설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설교자 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선 최소한도 10년내지 20년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를 발음까지도, 제스쳐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렇게 부흥되지 않고 그 설교는 감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설교는 녹음기처럼 똑같이 할 수 있으나 오랜 세월동안 설교자가 될 수 있는 연단을 받지 못하고 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고 인격화한 말씀보다 능력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생활로 실천해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생활하게 만들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설교할 때 몇 마디 설교할 때 몇 마디 설교라고 다른 사람에게 기도의 영을 불어넣어 줍니다. 또 헌금을 잘 바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줍니다. 또 죽을병에 걸렸다가 고침 받은 사람이 대개 신유의 은사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말씀대로 사는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은사도 받고 말씀대로 살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2.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방언, 예언, 신유 등과 같은 은사를 외적인 것이라고 하면 사랑과 같은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식물에서 외부로 나타난 것은 잎사귀들이고, 내적인 것은 뿌리입니다. 그런데 줄기나 잎사귀도 중요하지만 뿌리가 더 중요한 것과 같이 외부로 나타나는 은사만 있고 말씀의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하면 언젠가 그 신앙은 시들어 버리게 되고 그 인격은 파멸되고 맙니다.
뿌리가 없이 그 식물이 계속 살 수 없는 것 같이 은사만 받고 말씀의 인격이 형성되지 않으면 영원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갓 예수 믿고 용케 은사를 받아서 방언이나 예언을 한다고 오랫동안 말씀대로 살아온 권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주의 종을 무시하고 교만해지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박태선 장로 같은 사람이 이단이 되고 사탄의 종이 된 것은 불 받고 병 고치는 은사 받았다고 모든 목사는 다 삯군이고 다 자기에게 와야 된다고 호통치다가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사와 불이 최고가 아닙니다. 먼저 말씀이 내 인격 속에 스며들어야 됩니다. 말씀의 뿌리가 있어야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15 이하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하고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지자와 그렇지 않은 선지자는 그 생활의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진실하게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도 없고 열매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참된 선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못된 열매맺는 못된 나무는 언젠가는 찍혀 불 속에 던져지고 맙니다. 또 이어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혀 죄를 안 짓고 완전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입으로만 말씀을 전했지 자기 생활로 그 뜻을 행하고 나타내는 진실한 노력이 없는 사람은 참된 신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17:22-23)하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 고치고 선지자 노릇한 것이 악령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은사를 도리어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만 사용했지 말씀대로 진실하게 살고 십자가 지는 노력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은사는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고 행해도 말씀대로 진실히 살고자 하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리라"(마 17:24-25)고 했습니다.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고 입으로 전하기만 하고 진실하게 생활에 실천하지 못하면 무슨 은사와 기적을 행해도 일시적인 것뿐이지 언젠가는 심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은사도 좋고 중요하여 충만히 받아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진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생활하려면 말씀을 중심으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성령께 의지하여 성령의 도움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고 충동과 본능대로 행동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진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정직하게 회개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자나 본능의 충동대로 욕심나는 대로 행동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구약 시대에 능력과 말씀을 나타내 보였으나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받으시면서 인간을 구원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의 육신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을 굳게 하려고 주십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롬1:11)
둘째, 안위를 얻게 하려고(롬1:12)
셋째,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려고(롬5:15,16)
넷째, 각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다섯째,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기 위하여(막16:17-20)
여섯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행1:6-8)
일곱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롬15:18,19, 29)
여덟째,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기 위하여(고전1:7)
아홉째,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도록(고전12:28-31)
열 번째, 큰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히2:3,4)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은사를 자기 유익이나 명예를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은사를 주신 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겸손한 자세와 순종하는 마음으로 내가 맡은 일을 충성되게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는 덕, 사회에는 유익, 자신에게는 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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