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16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7:53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절제되어야 함을 알아보았다. 고린도서가 쓰였던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 여자는 외출 시 머리를 덮는 유대인들의 관습이 지속되었다.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고린도교회에서도 초기에는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예배에 참여했다. 그런데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 고린도인들의 ‘열광주의’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너울을 벗어 던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여자들 역시 다른 그리스도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배 때 머리를 덮어야 한다고 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된 것은 여자들이 머리에 썼던 베일을 벗어던진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 남자들이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반면, 여자들은 그들이 썼던 베일을 벗고 기도하고 예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덧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위치를 얻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여자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공적 예배시에 베일을 벗고 기도하고 예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런 식의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왜 여자들만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식의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런 남녀평등을 주장하게 된 이면에는 남자들이 힘으로써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여자들도 과거와 같이 남자의 힘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등을 주장하자는 것일 것이다.

지금까지 힘의 논리로 여자들을 무시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힘에 반발하여 평등을 주장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힘의 논리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 웹사이트에는 만화로 보는 정책 중에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남녀평등’을 주제로 한 플래시가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처음 장면을 보면 직장에서 여자가 남자를 위해 커피를 타다 준다. 그리고 퇴근한 이후 집에 돌아와서는 남자는 TV 앞에 앉아있고 여자는 설거지를 한다. 남자들은 차도 매우 위험하게 운전한다. 그러다가 장면이 바뀌면서 ‘세상에는 남자만 삽니까?’라는 말이 나오면서 전혀 반대 입장이 소개된다. 여자는 TV 앞 의자에 앉아 있고 남자는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직장에서 여자 상사가 손으로 탁 소리를 내자 바로 남자가 여자 상사를 위해 커피를 대령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남녀평등을 이런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또 하나의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여성가족부 사이트에 가면 남자들 쪽에서 왜 남자만 군대 가야 하는가 하는 등의 원망 섞인 글이 많이 나온다.

평등이라면 남자도 머리를 길게 해 주어야 한다느니, 여성전용 주차장을 폐지해야 한다느니 하는 식의 의견들도 나온다. 그리고 여자 쪽에서 남자는 군대를 가지만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고 하자, 남자 쪽에서는 요즘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인데 왜 여자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이런 식의 사고를 가지고서는 결코 본문을 이해할 수 없다. 언뜻 보면 본문은 여자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으며, 반대로 남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생각하고는 어깨가 으쓱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세상의 법칙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오늘날 세상이 갖고 있는 남녀평등이라는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추구할 뿐이다. 본문이 남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거나, 여자에 비해 남자가 더 우월하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세상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하나님은 각각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그런 하나님은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두셨다. 바울은 ‘머리’라는 말을 4, 7절에서는 문자적으로 쓰지만 여기서는 전의어(轉意語)로 사용하고 있다. ‘머리’가 전의어로 쓰일 때 구약에서는 한 공동체의 우두머리(지도자)를 의미했다(cf. 삿 10:18). 헬라어에서는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부분을 뜻하거나 ‘기원’을 뜻하기도 한다. 8절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은 여기서는 주로 기원(起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남자가 머리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계급적으로 위에 있고 여자는 아래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머리를 주장하는 위치로 생각하지 말라. 3절에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장하는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희생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사셨다.

그 결과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남자는 희생의 자리에서 여자의 구원을 돕는 역할을 한다. 이 말은 남자가 여자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구원을 위한 도구로써 남자를 두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것은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관심을 자신의 지위에 둘 것이 아니라 구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서로의 역할을 중시한다. 영화나 연극을 하면 역할이 있다. 운동을 해도 역할이 있다. 영화에서 중간에 역할이 갑자기 바뀌는 경우는 없다. 축구 시합을 하다가 수비수가 골을 넣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하여 갑자기 자기 자리를 벗어나 공격수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 역할에서 충실할 때 한 작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녀에게 각기 다른 역할을 주셨다. 남자와 여자가 체력에 동등할 수가 없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하게 말씀한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이렇게 볼 때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는 것은 머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머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섬겨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충직스럽게 여자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무엇을 써야만 했다. 결국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것은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남자가 여자보다 더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물론 여자 역시 남자보다 잘난 구석은 없다. 남자가 잘나서 머리가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죄에 빠져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함을 서로의 역할을 통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자의 역할에 더 큰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머리라는 것이 지위가 높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역할이라는 점에서 볼 때 얼마나 그 책임이 큰가!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버리셨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자꾸 성경을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남자는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 기본을 놓치면 이미 남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는 뒤로 미룬 채 단지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만 치우친다면 남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동일한 원리는 그대로 다른 서신서들에도 나오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2-25)

오늘날 이혼이 많아지고 있다. 왜 그런가? 물론 사회학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회학보다 성경이 적용된다. 성경적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할을 서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남자의 역할을 통해 자신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자임을 알고 섬겨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남존여비(男尊女卑), 혹은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개념을 유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바로 죄성이 있는 인간이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이지 이 세상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다. 남자를 머리로 알고 섬겨야 한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섬겨야 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함부로 이혼을 생각하거나, 남자와 여자가 각각 상대를 비방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자들이 목사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자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즉 여자가 남자보다 못났기 때문에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말이다. 목사란 여러 가지로 힘이 든다. 세상의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단지 육신적인 힘듦을 넘어선다. 그러면 그런 힘들고 섬기는 것은 남자가 함으로써 구원에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섬기는 역할을 함으로써 복음을 드러내면 될 것이다. 그런데 힘든 일을 남자에게 맞기면 될 텐데 굳이 여자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드보라가 사사의 직무를 맡았던 것처럼 정말 남자가 남자 구실을 못하고 섬기지 않는다고 할 때 여자가 나서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려운 것을 짊어지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목사가 하는 일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목사만 떵떵거리고 명령하는데, 왜 여자라고 못하라는 법이 있느냐는 사고를 가진 채 목사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자나 여자 모두가 자기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1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고린도교회 역시 자신을 본받는 자 되라고 했다. 지난 주일에고 언급했듯이 자유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힘을 내세워 상대를 누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섬기는데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사업에 바쁜 나머지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을 제치고 사업을 보여줄 수 있다. 부인도 섬김을 보여주기보다는 나태함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대하여 물러서지 말아야 하고,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일은 부르심을 받은 각자의 역할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일에 충실해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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