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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방언, 그 성경적 해답(퍼옴)

작은샘 큰물줄기 2019. 2. 24. 08:27

방언, 그 성경적 해답

방 언 : 성경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
사도행전 2:12

      1. 당신의 교회의 누군가가 예배 중에 혹은 주일학교 수업 중에 "맘마나 키타, 시스나야 시 - 맘마나 키타, 시스냐야 시 - 아나키나 티아사, 나야 아나키야 타나 시르나야 시" 라는 말을 읊조리기 시작한다면 그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위 말은 그러한 모임 장소에서 녹음해온 것입니다. 즉 현대 교회 전역에 그리고 세계 모든 곳에 퍼져 있는 교파주의 침례교를 포함한 많은 종파의 충실되고 선한 사람들에 의해 계속 반복하여지는 그러한 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2. 또는, 다음과 같이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 츠추 라 타 라토리 다 츠추 리 켄다 올리 탄다 보크 타르 주 라 판카 쿨리 카츠치 다 우리라 타?" 이 말들은 J 파울이라는 전도사가 "예수께서 계속 인도하신다"라는 곡조에 맞춰 부른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당신이 작은 기도모임에서 들었던 것 또는 그 비공개적인 예배에서 경험했던 고백 등과는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3. 현재의 당신은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현혹되어 있거나 잘못 인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혐오스러워 하거나 분노를 느끼거나 또는 동정심을 가질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다른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이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밀어내려고 하는 경험에 대한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또 어떤 사람들은 대개 방언을 구하는 전통적 오순절주의에서 보고 들어왔던 것에 거부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성경의 침례와 방언을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인 자들이 더 교양있고 높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 중에서 많았기 때문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들 "세련된"자들의 많은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로 엄청난 표적들과 이적들에 대한 증거들(대개는 재생되어 사용되는)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교회와 영적 삶을 비교하게 될 때 이들 중 어느 것도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말해질 때 그것은 매우 타당해 보이는 것 같고 확실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확신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잘못 행동할 리가 없다고 단정 내리게 됩니다.

Ⅰ. 우리는 우선 묻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1. 이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운동은 몇 가지 이름 하에 일어났다. '성령 부흥' 또는 '성령 운동' 또는 '새오순절주의(뉴펜터코스탈리즘)'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오순절교 종파에서 따온 말들이 아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주요 종파간에 속칭 방언으로 말하는 의식이 전파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이 시대의 이 운동을 소리쳐 요구하는 "부활운동(리뉴얼 리바이벌)" 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것은 특히 오순절에서 경험되었던 것들과 같은, 성령의 신약 은사들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A. 이 부활(RENEWAL) 또는 부흥(REVIVAL)은 소위 말하여, 실제적으로 그렇게 새로운(NEW)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830초기 런던에 있던 장로교는 에드워드 어빙이라는 목사가 이끌었었는데, 그는 성령의 성령적 은사를 찾고자 했다. 당시의 운동을 '성령 부흥' 또는 '새오순절주의'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어빙파'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어빙은 그 후 카톨릭으로 되돌아가 카톨릭 새 사도 교회를 세웠음 - 역자주)
  B. 그리고 나서 1800년대 후반이 되어, 성령운동과 오순절주의 운동이 출현했다. "그의 특성은 성령으로의 침례, 외적으로 나타나 주목받을 수 있는 침례를 갈망한다. 그것을 방언으로 말하게 되는 은사로 증거하게 되는데 이 방언으로 대개 성스러운 치료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  1880년 이후로는 25개 이상의 오순절주의와 Holiness 모임들이 조직되었다.(기독교계의 교회들과 분파들 - J. L. 네브 p361). 이 통계 조사가 실시된 이후로도 더 많은 단체들이 조직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C. 방언 운동은 1900년 새해 전날, 캔자스 토페카에 있는 벧엘 성경 대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날 모임에서 아그네스 오즈먼이라는 한 학생은 학교의 감독자에게 그녀의 머리에 그의 손을 올려놓고 기도할 것을 부탁했다. 성령의 침례를 받도록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학교 감독자)가 그렇게 했을 때, 즉시 오즈먼 양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유창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휴스톤, 택사스를 거쳐 캔자스 토페카로부터 로스엔젤레스에 이르기까지 방언운동이 퍼졌다. 그 때가 1906년 4월 9일 그곳에서의 그 시발점이 있었던 때이다. 이 결과 오랫동안 오순절주의의 요지였던 "LA 아즈사 미션"이 생기게 되었다.
  C. 이러한 신중한 시작으로 하여 그 당시의 매우 다양한 오순절주의 단체들이 퍼져갔다. 이 단체들은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가히 현상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 운동은 감리교도인 T. B. 바렛트 라는 자에 의해 노르웨이로 전해졌다. 스웨덴에서 그 추종자가 생겼다. 영국에서는 1차 세계대전 전에 이 문제에 관한 회의가 선더랜드에서 열렸다. 폴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는 1921년에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가졌다. 독일에서는 미국에서 온 두 여성이 도착함으로 이 운동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E. 대체로 오순절주의적 관점은 1950년대 후반까지는 오순절 주의 교회에 한정되어 있었다. 1960년대 초기에는 많은 종파들의 전통적 교회에 있던 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을 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방언하고 있다는 증언을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새로운 침범자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모아졌던 사건은 1960년 4월 3일 캘리포니아 반 누이즈에 있는 성 마가의 성공회(Episcopal Church-에피스코우펄 처치)에 2,600명이 모인 가운데 발생했다. 이 유력한 교회의 교구 사제인 신부 데니스 베네트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고 이 사실을 알리자마자 사퇴할 것을 강요받았다. (방언-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날드 W. 버딕, p8)
  F. 이 이후에도,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력한 인사들은 방언을 빠른 속도로 퍼뜨리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복음 사역 사람들의 국제적 교제와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한 청년 운동들 같은 것들로 이어졌다. 그들의 수는 매우 많아 젊은이들 간에서 이 운동은 "예수 부활"로 재생되었다. 이들은 성령 안에 침례를 받는 경험과 방언의 경험으로 그 자격을 확인 받았다.
  2. 이 새오순절주의는 이 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모든 종파의 사람들과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규모의 "성령의 회합"에서는 리드믹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손뼉을 치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혹은 가정에서의 작은 기도 모임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모든 모임에서는 열심히 찾고자 하는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아들이고 방언을 하기를" 갈망한다.
  3.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운동에 실제로 그들이 주장하는 데로 신약 은사들의 부활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니다"라는 대답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만일 "아니다. 그것은 은사의 부활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을 해줄 준비가 되어있나?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 사실성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그들의 경험에 의해 깊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알지 못하는 방언의 은사라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하다. 정신적 경험은 그들에게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하거나 냉정하고 논리적 사실들을 나타냄으로 해서 좀처럼 뒤집어질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혹은 성경에서 찾아낸 가르침으로조차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경험이란 것을 가지고 있고, 그 경험을 즐긴다. 그리고 그들에겐 너무 냉정하고 생명감이 없게 보이는 참된 성경 말씀의 진리에 순응하지 않고 그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는다.

Ⅱ. 성령의 침례 - 그 문제의 중심으로 가보자.

  1. 모든 방언 운동의 핵심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령의 침례"라는 문구. 둘은 복잡한 외적인 경험과 이 경험으로 인한 즐거워짐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경험은 성령의 침례와 알지 못하는 방언에 대한 성경적 설명의 해석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경험을 기독교로의 중생 다음으로 중요시 여긴다. 여기에 대한 이들 두 가지 영역에 대해 얼마나 많은 혼동이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2. 전통적 오순절주의는 이 두 가지 사실들을 지지한다. 그 하나는, 그들은 다음과 같은 구원의 경험을 주장한다. 성령 안에서 두 번째로 침례받는 경험이다. 둘은, 이 침례의 외적인 증거는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들 오순절주의자는 또한 말하기를 모든 믿는 자는 이 침례와 방언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 현대의 운동이 전통적 오순절 주의자들로 구성되어있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래서 이들을 '새오순절주의(뉴펜타코스탈리즘)'이라고 부른다.
  A. 이 운동에서는 또한 "성령(카리스마)" 이란 단어가 사용된다. 성령(카리스마)라는 말은 "은혜의 선물"이란 뜻의 그리스어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인 구원의 선물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6장 23절에서 쓰여진 말이다.
  B, '글로서랠리아'란 말은 선물 그 자체를 말한다. 이 단어는 "두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영어적 합성어이다. : 글로사(혀)와 랠리아(말). 따라서 그것은 혀-말 또는 방언으로 말하기라는 의미이다." (버딕 - p13)
  C. 성령 운동을 이끄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전통적 오순절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이 선물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만일 그들이 이 선물을 받는 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지고 계신 그 어떤 것을 잃고 있는 것이라 한다. 그들이 주관하는 출판물에서 이에 대한 인용글을 보기로 한다.
  "이 역사적 기독교의 종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밝혀진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성경에는 명확하게 방언에 대해 말씀되어져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성경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은 항상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부분이다. ....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다. 우리가 항상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던 교리의 실행과 경험인 것이다." (성령의 혼동 - 파울 R. 반 고더. - p15). 이 말은 성경에 방언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믿음과 경험의 일부분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끌어내는 일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게 한다.
  4. 성경에 방언이 함께 따르는 성령의 침례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오직 네 군데뿐이다. : 세 곳은 역사적인 것이고 하나는 교리적인 것이다. (1) 오순절날 일어났던 일에 대한 설명, 사도행전 2:1-13 (2) 구원받고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하는 고넬료의 집에 대한 이야기. 사도행전 10:44-47 (3) 바울이 자신들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12명의 사람들을 만난 일. 그러나 아무도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사도행전 19:1-7. (4) 마지막으로, 바울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는 고린도전서 이야기. 그러한 은사들의 오용을 바로잡고 방언의 선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성령운동이 내세우는 주장의 전체적인 바탕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세워졌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로 한다.
  5. 오순절 날에 있었던 성령의 침례와 방언, 사도행전 2:1-13
    A. 이 경험을 느꼈던 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모든 또는 거의 대부분의 동안을 주님을 쫓으며 교육받은 신도들이었다. ; 그분의 죽음, 부활, 승천의 사건들. 이러한 일들은 그분께서 몸소 권한을 위임하셨던 그분의 교회를 이루는 교육받은 신도들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위로자로서의 성령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셨던 이 약속의 실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 15:26-27)
    B. 여러분은 이들이 성령의 침례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방언의 은사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성령이 오신 후 "능력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증거자"가 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행전 1:8)
    C. 우리가 만일 우리를 안내해줄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우리는 오순절 날의 사건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전에 말씀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눅 24:49),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분의 오시는 이유를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으리니"(요 14:16)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하셨다. "그분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분(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분은 그들은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요, 내(예수님)것을 취하여 그것을 너희에게 알리리라"(요 16:13-15).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그들에게 땅끝까지 자신을 증거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이 제자들은 "함께 동행하여 도울 수 있는 자"인 그들의 위로자로서 또는 Paraklete로서 성령을 찾도록 그리고 그분을 증거할 수 있도록 그분의 능력을 받아들일 것을 가르침을 받았다.
  6. 이 오순절의 경험이 성령을 그들의 위안자로서 알 게하고 그분의 증거자가 되도록 권능을 부여받게 했다면 왜 그들은 성령의 침례와 성령의 내적인 충만함과 방언을 받았는가?
    A.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침례하실 것이라는 침례자 요한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마 3:11-12)
    B. 그들에겐 평안이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이미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이미 알았다. 이것은 그가 구원받은 순간 모든 믿는 자들에게 깨우쳐진다. 그들은 그분께서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것에 대한 성경 해석을 이끌었을 때 그리고 그 대체자를 선택하는 일을 이끌었을 때 교회문제 있어서는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자신들의 위로자로서 계실 그분의 나타나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사역하실 때에 함께 동행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증거할 때에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C.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귀를 기울이도록 이 사건을 이용하셨다. (행 2:12) 바울은 고린도인들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방언이 믿는 자들에게가 아닌 안 믿는 자들에 주는 표적인가........" (고전 14:22). 베드로가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언자 요엘에 의해 말씀되어진 것이다."(행 2:16-17). 요엘은 성령의 부으심을 말하였지만 방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울은 은사 그 자체, 방언에 대해 말했다.
    D. 또 한가지의 사실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대화에 있어서 바울은 말하길, 그것은 다함께 도움이 되거나 유용한 목적을 위해 주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고전 12:7) 성령의 이러한 나타나심은 믿는 자의 자기중심적 경험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유용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수님을 증거하여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방법들을 이용하셨다. (히 2:3-4)
    E. 삼천 명의 영혼들이 오순절 날 구원을 얻었을 때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 때 두 번째 경험으로 이것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혹은 방언에 관한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는 것은 또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들이 이 경험을 찾고자했다는 것에 대한 말은 없다! 그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유효하게 이용되어진 것 이상으로 성령의 침례와 방언에 열심이었다는 말은 없다. 이 새로이 구원받은 자들은 사도들의 교리, 교제,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를 계속하는데 열심을 보였다. 그들은 집집마다 복음을 나누어주어 사람들을 예수그리스도로 이끄는데 열심을 보였다. (행 2:42-27) 성경의 기록된 것에 따르면 그들은 결코 이 경험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그분을 증거하도록 사람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시기 위해 의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F. 이 역사적인 사건은 오늘날의 믿는 자들이나 교회가 그와 비슷한 경험을 추구하도록 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하시는 일과 성령의 오시는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증거하게 하도록 그분의 진리를 충실히 가르치도록 그리고 교회의 봉사를 이끌어가도록 권능을 부여해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7. 방언의 지지자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 우리가 그 다음으로 떠올리는 것은 이러한 것이 과연 진정한 언어인지 혹은 그저 영적인 잡담인지 하는 것이다.
    A. 4번 문구에서 "텅(tongue:혀-글로사)"라는 말은 언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신체의 부위를 나타내는데 공통으로 사용되었다. (눅 1:64) 이 절에서는 "다른"(heterais) 이란 말이 이들 믿는 자들이 그들이 모국어 이상의 언어를 말했다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 사실은 더욱이 그들이 7절들과 8절들을 말하는 것을 들었던 자들에 의해 쓰여진 놀랄만한 기록들로 확증되었다.
    B.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성령은 조심스럽게 이 진리를 명확히 하셨다. 언어에 대한 말은 "다이얼렉토(dialekto)"라는 말에서 우리말(영어)의 다이어렉트(dialect)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두 단어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적당하다고 여기셨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 제자들이 다른 언어로 말했었지 단지 영적인 잡담(잡소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히 하셨다.
    C.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서로 다른 나라 지역 16 개 지방에서 왔을 때 8-11절에서 그러한 언어들이 지시되어졌다. 그리고 성령은 이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실수가 없도록 돌보신다. 이러한 증거로부터 의심할 여지없이 사도행전 2:1-13절에 나와 있는 방언은 실제적 사용중인 언어였다는 것이다. 성령은 제자들은 통해 그 순간 이 언어들이 말해지도록 했던 것이다. 제자들 각각은 그들이 이전에 배운 적이 없던 다른 지역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실지적 언어였으며 실지적 의미를 나타내는 메시지를 갖고 있어서 그것을 듣는 자들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D. 주님은 이것을 또 다른 목적, 전도의 목적으로 이용하셨다. 만일 당신이 지도를 본다면 이 나라들이 그 당시 동에서 서로 알려졌던 세상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부활하신 구세주와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구원시키시는 권능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장래의 전도자들에게 그들이 사는 곳에서 예수님을 나타낼 더 큰 기회를 제공했다.
    E. 이 절을 통해 방언을 말했던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전에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었고 모국어가 아닌 타국어 언어를 말할 수 있게 한 기적적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고넬료의 집에서의 방언에 대한 설명. (행 10:44-47; 11:15-18)
    A. 이것은 그 기적이 오순절 날의 그것과는 반대라는 점에서 다르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그 뜻한 바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확실히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 방언은 이교도였던 새 신자들에 의해 유대인인 단련된 믿는 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해 말해졌었다. 이 유대인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주셨다는 것에 놀랐다. 방언은 이 의심많은 유대인들에게, 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베드로와 그 함께 있던 자들에게 고넬료의 집에 있던 이방인들이 이제 믿는 자들이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안에서 침례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을 확신시킨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방언이었다. (행 10:47) 이와 같은 확신을 줄 수 있는 근거로 인해 예루살렘의 비평가들을 침묵시킨 것이다. (행 11:1-2, 15-18) (고넬료의 방언은 제자들이 알 수 있는 방언이었을 것이다.- 역자주)
    B. 사도행전 11장 17절에서의 말씀을 보면,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방언이 사도행전 2장의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누가는 "이다" 또는 "같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 은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의 경험을 오순절 날에 있었던 유대인들 것과 비교해 차등을 두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C. 사도행전 2장에서의 기록을 보아 그들이 사용중인 언어로 말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 둘이 같다면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넬료의 집에서의 이들은 유대인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들의 증언은 하나님을 찬미했고 놀란 유대인들은 이 증언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속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9. 방언의 세 번째 예는 사도행전 19장 1-7절에 있다. 그리고 방언이 말해진 두 시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다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제자들이라고 주장하는 12사람을 만났다. 확실히 이 사람들은 아볼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것을 약간 알고 있었다.(행 18:24-25)
    A. 이 사람들이 주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했을 때 바울은 조심스럽게 시험하여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내 생각으로는 이들은 단지 선생들이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요한의 침례는 타당한 믿는 자의 침례였을 것이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에 대하여 뭔가를 알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는지 어떤지 들어본 적이 없다." (롬 8:9 참고)
    B. 성령(카리스마)에 대한 가르침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 제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 성령의 침례와 방언이라는 두 번째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원받은 후 언젠가는 그러한 경험을 갖게 되므로 그들은 2절과 "since(-이후로)"라는 말의 킹제임스 표현을 강하게 강조했다. 주변적으로 읽으면 그 말은 "when(-때)"로 보이게 된다.
    C. 이 일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방언이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하는 표적으로서의 역할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된다. 더욱이 방언은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과 고넬료의 집의 경우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바울로 하여금 확신하도록 소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했던 것은 바로 바울이 그들을 침례하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던 후였다. 이로써 바울이 그들이 진실로 구원을 받았고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이 소식은 에베소 도시에서 그의 앞에 놓여진 어려운 일과 함께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D. 이 방언들은 실제적 언어였나 아니면 그저 영적인 잡담이었나? 방언이 언어였다고 분명하게 표현된 것은 없다. ; 그러나 누가가 "글로사" 그와 같은 말을 사용하므로 그는 초기자이고 이 경험과 다른 것들과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 경험과 다른 두 개와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믿을 이유는 없다.
  10. 이제 우리는 모든 중요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 방언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들이 다른 자들을 위해 성령의 침례와 방언의 은사를 공개적으로 추구하게 한 성경적 지침으로서 영향을 주었는가?" 이것은 답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그것이 이러한 설명 위에서 오순절주의와 새오순절주의의 전체적 구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A. 우선 이 세 가지 역사적 기록들은 각각 다르고 다른 목적을 위해 각각 존재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 별개의 패턴은 확실히 어떤 믿는 자들에게도 이것들이 방언의 은사를 찾도록 하는 지침을 세웠다는 것을 믿게 할 근거를 주지 않았다.
    B.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람들은 성령의 침례나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찾고자하지 않았다는 것을 염해두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또한 그들은 방언을 구하도록 배우지도 않았고 성령의 침례를 받도록 배우지 않았다. 다른 자들에게 성령의 침례나 방언을 구하도록 하는 지침으로서 작용하는 이러한 기록들에는 적절한 가르침들이 없다.
    C. 또한 성경의 기록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경험을 계속 반복하여 구하고 있을 지라도 개개인으로서 또는 집단으로서, 이들에 대한 어떤 설명도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그것이 사람이 계속하여 갖고있어야 할 경험이라면 반드시 우리에겐 성격적 가르침이나 본보기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에 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D.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서 이러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닌 알려진 언어로 말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없는 진리였다는 것을 주목한다.
    E.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단지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적 기록이 있으므로 해서 믿는 자가 가질 경험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결론을 안다. 우리는 더욱이 이러한 기록들로부터 이것이 구해져야 하고 오늘날 믿는 자들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아무론 암시, 지시, 추리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F. 이 기록에 직접적 연루됨은 없을 지라도, 또 다른 한가지 사실이 흥미로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제한 없이 성령을 받으셨지만 결코 방언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성령이 그분께로 침례 시에 내려오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베드로에 의해 기술되었다.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행 10:38)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제한 없이 받으셨다할지라도 그분께서는 결코 방언으로 말하셨다고는 전해지지 않는다.
  11. 그러나 의미없는 소리가 아니라고 하며 다른 언어로 말했다고 하는 오늘날의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의 증거는 타당한가? 그들의 주장은 입증될 수 있을까?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고 그 문제는 답변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A.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면 또는 우리가 글로사랠리아를 조사할 자격이 없다면 그들의 주장을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테잎 레코더의 출현은 글로솔라틱 발언을 기록할 수 있게 했고 언어적 기준으로 그것들을 평가할 수 있게 했다. 결과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리고 나는 이제 어떻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B. 피터 C. 와그너가 쓴 책, (A turned on Church in an Uptight world-불안한 세상에서 자극받은 교회)에서 따온 글이다. "언어학자가 오늘날 성령운동에 속한 자들이 하는 방언을 녹음하여 언어적 분석을 위해 의뢰받았다. 인간 언어의 아무런 독특한 구조를 발견할 수 없었음을 보고했다." (p10)
    C. 도날드 W. 버딕은 그의 책, (Tongue, to speak of not to speak-방언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이와 같은 언급을 하였다. "녹음되어진 방언을 권위있는 언어학자에 의해 특별한 언어로서 확인된 적이 없다 (p60). 어떤 사람은 삼천 혹은 그 이상의 사용되고 있는 언어가 모두 언어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녹음된 말들이 인정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나. 그러한 반박은 월리암 E. 웰머아 쓴 (Christianity Today - 오늘날의 기독교) 에 나와 있는 한 편지문에서 논박되어진다. 월리암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아프리카 언어 교수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모든 알려진 언어계의 대표적인 언어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광대한 세계 언어계를 대표하는 백여종의 언어들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졌었다는 점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모든 기록된 형태의 언어들의 종류들을 공부해왔다는 점에서 결코 서술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특출나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글로소랠릭이 아프리카의 수천 개의 언어 중에서 어떤 하나로 말하고 있었다면 내가 즉시 그것을 알 수 있는 건 90%의 기회가 있다." (p61)
    D. 1911년부터 현재에까지 걸친 그의 조사와 분석을 근거로, 버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계속 쌓이고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방언은 사용중인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한 결론의 근거는:
     1). 방언을 말하는 데 있어서 반복어가 매우 빈번함.
     2). 화자의 언어 배경과 방언과의 유사성.
     3). 하나 또는 두 모음들을 지나치게 사용.
     4). 일정한 언어의 체계의 결여.
     5). 방언으로 말해진 것에 비해 그 해석은 두드러지게 김.
     6). 같은 절이나 문구에서의 해석에서 모순이 있음.
     7). 해석에서 킹제임스 스타일이 우세하게 사용됨.
"게다가, 권위있는 전문가가 주의 깊게 조사했던 샘플이나 방언의 말 어느 것도 저절로 터득되어진, 비모국어라고 밝혀진 적이 없다. 조사를 담당했던 유능한 언어학자들이 방언을 실제적인 언어의 말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요소들 때문이다." (p65)
    E. "월리암 J. 사마린은 그의 책 (Tongues of Men and Angels -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 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사실일 지라도 현대 일반 교회들에서 말해지는 방언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 언어들이 아니다. 실제로 방언은 모든 언어의 기본적 공통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방언은 무아지경(자기의 인격의지가 중단된 상태)의 육성이지 알려진 언어가 아니다."(Christianity Today, - 오늘날의 기독교, 1972년 11월 8일, p241)

Ⅲ. 문제의 그 이상의 핵심, 마음 - 경험을 찾음!

  1. 우리는 성령운동의 그 중심에는 두 가지 일 안에 놓여 있다고 이미 언급했었다.:
성령의 침례는 방언으로 말하는 경험을 뒤따르게 한다. 이 운동과 관계된 자들은 방언은 성령의 침례로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고 그 증거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종파와 계층의 사람들이 갑자기 성령운동에 심취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의문시할 때 그 설명은 한마디로 찾아진다. 경험!
    A. 냉정하고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뜨거운 심장의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교회에서 접하게 되는 기독교의 모습보다는 좀더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뭔가를 갈망하고 추구한다.
    B. 그때 다른 한 편으로는 선의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 그러나 강한 감정적 경험과 기독교인의 믿음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므로 자신들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을 구해야 한다고 믿는 잘못 인도된 사람들이다.
    C. 마지막으로 진리에 근접하여 주안에서 더 큰 믿음이나 주님과 더 밀착된 동행을 갈망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것을 영적 진보로 받아들여 어떤 인간의 육체적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D. 이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성경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들의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크다.

  2.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볼 때,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만일 주께서 더 이상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이 성령운동에 속하여 자신이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A. 우선 예레미야서에서 본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인간 본성은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이 이 경험을 갈망할 때 그리고 적합한 조건이 충족될 때, 그는 이 경험을 느낄 수 있게 되고 그것이 신약에 나와 있는 놀랍고 초자연적인 방언과 같은 것임을 믿는다.
     (1) 이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갖게 될 때 그는 그 경험 자체가 성경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정당함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그 경험을 해석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2) 경험을 갖는다는 것으로 어떤 행동이라도 옳고 성경적이며 거룩하다고 결정 내릴 수는 없다.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참다운가에 상관없이 경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에 대한 강제력이나 감독이 찾아지지 않는다면 결코 성경적이고 유익하며 순수한 것으로 평가되어질 수 없다.
     (3)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어떠한 경험이라도 평가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으로만이 우리에게 믿음과 의식에 대한 규율을 주시기 때문이다.
     (4) 그래서 문제는 우리가 경험을 가졌느냐 또는 갖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것은 사람이 극도로 그러한 경험을 갈망할 때 그리고 그 조건이 충족되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를 경험으로 속이기 위해 우리의 타락한 성품에 갖다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경험을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또는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여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5) 이 신비주의 종파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 경험이다! 이 방언을 말하는 많은 자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 경험으로도 결정되어진다. 이러한 것들이 개개인에게 그 경험을 구하도록 했다 ;
  하나, 하나님의 그에 대한 인정하심의 징표이다. 그가 영적 지위 또는 성장을 얻었을 것임에 이 무아지경적 경험으로 인해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
  둘,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 뿐만 아니라 모임에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자격으로도 작용했다. 즉 방언의 경험을 가진 자는 비슷한 방언을 경험한 자들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무리에서 어떤 영적 특권과 대단한 내적 만족감을 준다.
  셋, 그러한 경험은 내적 갈등,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일시적으로 모든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기분을 갖게 한다. 이것은 적어도 그 순간 동안은 방언자에게 있어서 긴장과 현실로부터의 도피적 심리로 판명된다.
  넷, 이 운동에 속한 자들이 갈망하고 구하고자 하는 이 경험은 또한 경이로운 것이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내려지는 것으로 간주하여 오해한다. 그들은 방언이 그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의 확실한 증거라고 진술함으로써 그들의 경험을 변호한다.
     (6) 이 모든 이유들을 정리해 보았을 때, 그러한 경험은 들뜬 기분, 즐거움 그리고 모든 긴장들로부터의 해방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경험과 그로 인한 즐거워지는 기분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호의의 증거로서 그리고 영적으로 달성되는 것 중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오해를 낳는다.
     (7)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방언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것이 잘못된 오류이므로 벗어나려고 하는데 더 소극적인 태도가 된다. 그들에게 만족스럽고 충만감을 느끼게 하는 이 경험의 어떤 것도 하나님께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증되어질 때조차 단순한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 것을 즐기고 있으며 냉엄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교리로 쉽게 돌아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한 감정적인 경험은 논리적 주장으로는 좀처럼 극복되어지기 힘들다. 설사 그 주장이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도 말이다. 이들은 진리와 그들의 '믿음'에 있어서 요지부동의 이러한 마음은 기도자가 분별하여 경험할 수 있는 기적들, 경탄하는 마음, 감정들에 의지하게 된다. 문제의 진리는 기독교인이 소유하는 것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얻은 바로 그 현실과 믿음이라는 것이다.
     (8)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잡소리 방언을 경험한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이슬람, 힌두교, 예찬자, 특히 몰몬교인, 심령론자들 사이에서 기록되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서 이교도, 힌두 성인, 몰몬, 그리고 셀 수 없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었고 마약 문화 출신의 몇몇 개종자들은 방언이 그들의 도취적 경험의 일부였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기독교, 1972년, 11월 8일자 "방언운동에 대한 조사" 헤럴드 린셀) '방언과 비기독교 종교에서 관련된 현상에 대한 조사'라는 제목의 미국인 인류학자 논문에서 L. 칼릴메이는 방언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기록해왔는데, 특히 무당이나 이교도 사제 그리고 주술사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치료의식에서 황홀감이나 종교적인 고조됨이 자주 발생하는 동안 초자연적인 존재가 언어를 말하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사람이 예언, 저주, 마술, 그리고 영혼들을 달래는 의식이 있었던 한 방언을 가지고 있었다." (버딕 p66-67) 성명은 어떻든 간에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교도들도 방언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B. 우리는 오늘날 방언의 존재를 확실하게 부인할 수 없다. 그 존재는 우리가 대답해야할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무엇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퍼진 운동에 대해 해명할 것인가? 이것이 정말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령의 은사가 다시 부활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권세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인가? 오늘날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속임수이거나 일종의 꾸며낸 연극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귀신의 영향력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심리적 또는 자기 감응(自己 感應)적인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이 세 가지 권세들이 합성된 어떤 힘일 수도 있다.
     (1)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그것이 하나님께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실현함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 아래서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어떤 표적이나 이적들을 행했다. (마가 16:15-18). 그러나 성령이 바울을 통해 방언은 끝나고 다른 은사들 역시 활동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고전 13:8-10) 만일 예수님의 예언이 실현되었다면-그리고 실제로 실현되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바울의 예언이 실현됨에 의심의 여지를 갖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 방언이 끝났나?"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방언이 그시기에 끝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었다. 그는 그들이 전환의 시기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영적인 은사들을 단계적으로 끝내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삶 속에 성령님이 만들어 주시는 열매인 "더 훌륭한 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 믿는 자들이 만일 성령의 선물을 가졌다면 이 선물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은사들의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랬다. 그래서 바울이 한 무리에게 말했다. "가장 좋은 은사를 진심으로 갈망하라"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 그리고 그는 다른 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님의 은사는 그들의 마음 속에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만들어 내므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더 좋은 길을 알렸다" 그래서 성령님이 바울을 통해 이 두드러진 선포를 하심으로 두 무리의 사람들은 연결되어졌다. 한 무리는 그 당시 은사들을 갖고 있던 자들이고 다른 한 무리는 은사를 갖고 있지 않던 무리였다. 은사를 갖고 있던 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자기 강화를 위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바르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사용할 것을 가르침 받았다. 고린도에서는, 오늘날에도 종종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정도로가 아니라 방언을 받았는지에 따라 한 개인의 영혼을 평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명확히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요 13:35) 은사를 갖지 못한 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침 받았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람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것들은 그 당시의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은사들은 끝났다고 그리고 분명히 예언, 방언, 지식에서 하나만을 고른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시한부적인 성령의 은사가 끝나는 막바지의 기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한 증거는 그것들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서 말한다. 방언은 표적을 위한 것이었고 히브리서의 필자가 우리에 전하고 있듯이 이제 이 표적은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우리는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특히 바울이 쓴 편지에서 그들이 이상하게 방언에 관한 문제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표적과 기적들과 관계있는 갈라디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에 관한 아무것도 발견되어지지 않는다. 에베소서에도 표적 은사들에 대한 언급이 없고 골로새서에서도 침묵하고 있다. 빌립보서에도 기적이나 어떤 영적인 현상에 대해 일언의 언급도 없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후서에도 기적, 치료 또는 방언에 관한 기록이 없다. 남아있는 로마서 역시 그 주제에 관해서는 조용하다. 방언, 그리고 다른 영적 은사들은 바울이 끝날 것이라고 했을 때 끝났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의 영적인 생명이 차츰 약해지기 때문에 점차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바른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에 실현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날 영적인 은사의 부활이나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그 주장을 지속시킬 근거가 없다. 그들에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성경적 증거가 없고 성령의 은사를 구하도록 종용하는 성경의 지시나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믿는 자들은 성령님께로부터 그들의 생활에 위대한 그리스도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을 일으키도록 하는 더 훌륭한 방식을 추구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교회역사에 관해 공부해 보면 성령의 은사, 특히 알지 못하는 방언은 끝났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클레온 L. 로거 박사는 1965년 4월호 Biblitheca Sacra에서 쓰고 있다. :"그 사역지가 실지적으로 약 A.D 100년에서 400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전역이었던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증언을 조사했더니, 1세기 때의 놀라운 은사들은 끝났고 기독교를 세우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나타난다. .... 모든 증거는 바울의 '방언은 끝날 것이다'라고 한 예언의 사실성을 가르치고 있다."(성령<카리스마>의 혼란, 바울 R. 반 고더, p27). A.D. 347-407년, 크리소스톰은 그의 시대의 방언은 모두 함께 과거의 것이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고린도전서 12장에 관해 기록했는데 "모든 지역이 모호하다. 그러나 그 모호성은 그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그것들이 중단됨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는 생기곤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소스톰과 동시대 크리스쳔들도 방언이 지나간 것임에 대해 확신했다. "초기 시대에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방언을 말했다' 그 방언은 그들이 배워 익힌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때까지 인정되었던 표적들이었다. 그것이 모든 방언 안에서 성령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모든 방언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필요했었다. 그것은 나타냄을 위해 행해졌었고 이젠 지나가 버렸다."(방언 p52) 그때로부터 현대의 오순절주의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방언은 점차 덜 자주 보고되고 있다. 확실히 방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일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2) 오늘날의 방언이 속임수고 만들어진 연극일 가능성은 크다. 왜냐하면 어떤 방언은 "영적인 놀이"처럼, 어떤 것은 즐겨지는 놀이처럼, 어떤 것은 한 개인이 그것으로 얻는 자극을 위해 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에 대한 해석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이다. 한 작가가 그것에 대해 말하길 '이 중대한 발견은 그 자체로 저절로 발생되거나 계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방언은 철저한 속임수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최근 마르조의 증언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방언을 하던 전도사이다. '오늘날의 방언'이란 책은 "오순절의 경험이라는 명칭으로 통하는 현상들이 있는데 이것은 영화 '마르조'에서 명확히 보여주는 것처럼 겉치레의 속임수이다. 마르조는 그가 전도 활동 중에 방언을 자극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영화에서 납득할 만한 증명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3) 아주 많은 경우 방언이 사탄의 영향으로 비롯되었을 수 있다는 실제적 가능성이 있다. 방언은 사탄의 손안에 있는 도구가 되고 있다. 방언이 종교적 의식의 일부로서 이교도 심령술 점성술에서 증명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방언은 사탄이 고무시키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사람이 이 감정적 흥분은 당연히 성령에 의해 비롯돼졌다고 상상함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 특성이나 목적으로 보아 아무런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사람이 사탄의 영향력에 좌우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가 성령님께 복종하고 성령이 그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의 굴복은 그가 방언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이성적인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그를 사탄의 권한으로 제어 당할 수 있도록 드러내놓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메릴 F 영거 박사는 '방언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 이란 그의 책에서 말하길 ; "하나님의 영광이 진실한 그러나 교리적으로는 무지한 성도들을 매우 크게 보호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권능이 불건전한 스승들과 그 가르침에의 타락한 기도로 인해 거두어 질 때 사탄이 속이고 파멸시킨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만연하는 혼란과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오류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 하나님의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이 사탄의 파괴와 교리적 속임수에 대항하는 믿는 자의 유일한 보호막인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전해지고 확실하게 믿어지고 복종되어질 때, 사탄과 그 무리들이 침투할 수 없는 기독교인을 위한 견고한 보호막인 것이다." 사람이 그 경험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계속 구하고자 하는 한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몰아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사탄의 영역아래 드러내는 것이다. 속임수를 만들어내는 대가인 사탄은 사람들의 경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처럼 위장한다. 믿을 만한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따라서 지식과 지혜는 경험과 바꿔지기 위해 희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4) 방언은 원래 개인의 내적인 연상으로 그리고 다른 외부의 근원으로부터 생기는 심리적인 것이다. 방언 경험이 사람마다 다양한 반면 그 일반적 설명은 모든 경우에 비슷하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 간에는 몇 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하나: 방언자는 방언의 가르침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는 또한 기독교인의 영역 안의 경험으로서 방언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우선 그는 단지 호기심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방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가능성을 품고 갖게 된다.
  둘: 이 경험에 대한 열망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선물과 경험을 얻기 위해 그 자신을 기꺼이 절절한 위치나 형태로 놓아두려고 한다. 이점에서 육체적인 느낌과 영적인 호의로서의 열망을 혼동하기 쉽다.
  셋: 이 열망은 방언의 은사가 주님께 놀라운 방법으로 받은 것이라는 상상의 사실로 인해 더욱더 강화되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받아들이신다는 어떤 객관적인 증거, 은사나 표적과 같은 것들을 원하다. 선행을 계속 행하기보다는 "즉각적인 영적인 것"을 바란다. 그것이 성령의 침례와 방언의 경험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넷: 이 경험은 개개인에게 매우 즐거운 뭔가를 그래서 소망되어져야 하고 찾고자 해야 하는 뭔가를 내놓는다. 특별한 방법으로 성령님에게서 부여받은 즐거운 것. 경험 그 자체로 즐겁게 되는 즐거운 것. 무리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서의 즐거움. 마지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그 근본적인 즐거움.
  다섯: 당신이 이러한 공통적인 요소들을 합하고, 개인이 성령의 침례를 경험할 수 있고 성경 가르침의 일부로서 방언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합할 때 이것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방언의 경험으로 이끌게 하는 자극적인 힘이 된다. 이 개인은 방언의 가능성에 대해 그의 관심을 모은다. 이러한 공통적이고 상상의 요소들은 점차로 그의 마음을 장악할 때까지 활동을 하고 그 자신이 방언이라고 확신하게 될 때까지 자신을 내맡겨버린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는 성령님이 자신을 통해 말을 하고 그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게되는 상태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는 오늘날의 방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소리를 갑자기 내기 시작하고 그것이 방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 경험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그의 마음속에 철저히 확신해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아경험을 분명치 않은 혼동의 형태로 일으킬 때까지 그의 마음과 육체적 속성을 배제하면서 상상한 결과이다. 사람들의 감정적 구조에 좌우되어 그 경험은 낮은 톤이거나 높은 톤일 것이다.

    C.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와 같은 위험들을 잘 알고 있고 있었다. 그는 방언은 진실한 혼령뿐만 아니라 그릇된 혼령의 역사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방언이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발산되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또한 육적인 그리고 영적인 영역이 너무 관련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로 착각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육적인 열성이 쉽게 영적인 열정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인 교회에는 호화로운 것을 아주 좋아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러한 "경험"이 가장 중요한 추구 목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을 쌓기보다는 성령의 은사라고 여긴 인간의 경험들을 구축하는데 치우쳤다.

종속적인 경험들을 위해 성경의 위대한 진리는 따로 제쳐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방언의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오용과 남용을 막기 위해 엄격한 규제를 두었다. 그가 그렇게 엄격하게 규제하던 이와 같은 추세는 오늘날 성령운동에서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때와 지금의 문제점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정신적 상태나 감정적인 상태로 인해 또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인도하신 것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해 사람의 타락한 속성을 조정하는 사탄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진실된가에 상관없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허가나 지시를 찾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경험도 성경적이고 유익하고 순수한 것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3. 성령운동에는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위험들이 있다.
    A. 오늘날의 방언은 속임수이다. 모든 영적인 은사들 중 이것은 가장 남용되기 쉬운 것이고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인간 본성의 그 조작적인 면 때문에 적절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으로 여기는 경험으로 그 자신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종류의 무아지경적 잡소리는 기독교적 경험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오류에 물든 그리고 반 기독교적 운동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무아지경적 경험들이 이슬람, 힌두, 점성술뿐 아니라 몰몬교와 심령술에도 깊숙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방언이 속임수이고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방언이 성령의 침례에 대한 필수적이고 유일한 증거이고 또한 그 주장자들에게 부여된 것이라는 그 어떤 주장도 억제되어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B. 오늘날 방언을 하려는 노력은 그를 영적인 위선자로 드러내놓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영적인 경험 안에서 그 궁극적인 것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이 은사를 받는 것은 영적 특권에서 "보통의 뛰어남"을 얻는 것이다. 방언에 관계된 자들의 가르침은 어떤 영적 수준을 방언을 갖지 않은 자들 위로 올려져 있다. 이 모든 것이 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비롯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물의 속성은 영적 우월성의 태도를 발전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개개인들이 주님의 안에서 자신이 더 영적이고 더 거룩하고 더 성숙한 자임을 느끼게 된다. 이 성향은 자아를 찬미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자신들의 경험을 중요시함으로 하등시킬 때마다 그것은 신약 기독교의 값싸고 자기 중심적인 거짓이 되어가는 것이다.
    C. 오늘날 방언 운동은 방언의 은사를 "즉각적인 성령화"의 수단으로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경험이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성령의 침례와 방언의 선물을 받을 때 가지는 즐길 수 없는 영적 즐거움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이들은 방언은 영적으로 성숙해졌을 때 갑자기 오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방언이 사람들의 생활에 무엇을 이루어내는지에 대한 모든 종류의 증언들이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새롭고 더 깊은 사랑, 기도에 대한 새로운 열정 그리고 성경공부, 경험하기 전보다도 아주 새롭고 다른 즐거움과 평화의 느낌을 가져온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정말 거짓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이 유익한 점들을 오직 방언의 경험으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 방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유익한 점들은 그와 같은 방언의 산물이라고 인식되어짐에 틀림없다. 그 모든 것들은 방언과 별개로 경험되어질 수 있고 또 경험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는 그분의 당연한 축복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영적 성장과 성숙에는 지름길이 없음을 안다. 그것은 날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실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방언은 성장, 성숙, 성령화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방언하는 자들의 생활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방언을 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영적인 순수함과 거룩함으로 바뀌어지지 않는, 방언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즉각적인 성령화"를 지지하는 자들을 불신하게 하는 사실이다. 도날드 기는 그의 책 '이제 당신은 성령 안에서 침례를 받았다'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에게 은사를 갖게 한 경험이 당신에게 성령화를 갖게 하지 않을 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오늘날의 기독교 1972년 11월 8일자 p242) 한 무아지경적 경험으로 사람이 갑자기 영적 성숙을 갖게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영적 성숙은 베드로가 믿는 자들에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라고 훈계하였듯이 오직 날마다의 성장으로 오는 것이다.

    D. 지나친 감정주의는 위험하다. 믿는 자들의 삶에 감정을 위한 곳이 없는가? 확실히!(있다) 그러나 지나친 감정주의를 위한 곳은 없다. 무엇이 다른가? 가장 간단한 설명은, 사람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올바른 장소를 그늘지게 할 무아지경적 그리고 쾌락적인 단순한 자연적 감정을 따른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의 기독교적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기보다는 경험에서 힘을 얻게 된다! 방언을 지지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그들의 경험으로 인해 이성을 잃게 되고 그것을 거룩한 발견으로 여기게 된다. 교리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으로 세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의 그 타당성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들이 그 사람의 삶에서 넘겨지도록 종용될 때 깨어지는 법칙이다. 경험은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그 느낌들은 성령의 인도라고 잘못 인식되고 있다. 감정주의가 가져오는 쾌락적인 흥분만을 추구한다면 하나님 말씀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는 것으로 오는 것이지 영적인 이성 잃음을 통한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한번 사람이 이 오류에 깊게 빠지게 되면 성경적인 진리나 이치로 바르게 고치기가 참으로 어려워진다. 그러한 자들은 너무나 확신이 강하기 때문이다.

  4.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이 이러한 오류에 잡히지 않도록 막을 수 있을까?" "이 가르침을 배운 자들에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우선은 묻지 않고는 이 글을 마칠 수는 없을 것이다.
    A.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이러한 방언에 대한 생각에 너무나 깊게 빠져 있으므로 당신이 도울 수 없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설득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들은 도움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으로 그들의 경험을 판단하기보다는 그들의 경험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우리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
    B. 이들을 돕는 첫 번째 방법은 우선 그들의 오류에 섞이지 않도록 진리에 관해 철저히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진리에 대한 끌어들일 받침대가 없을 때 잘못된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 대해 진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C. 두 번째 방법은 공개적인 토론을 갖는 것인데 몇몇 사람들을 괴롭힐 수 도 있는 문제점들이 답해질 수 있다. 한사람의 설교자가 그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간파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가 그들에게 그들의 문제점들을 말할 기회를 주게 된다면 그것들은 믿음 안에서 입증될 수 있다.
    D. 우리는 삼위일체의 한 사역이신 성령님께서 어떤 식으로 역사를 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오해의 대부분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다. 실제로 "미리 주의하는 것은 미리 경계하는 것과 같다" 라는 속담도 있다.
    E. 하나님의 백성은 믿는 자의 삶에 감정적인 면들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올바르게 알도록 배워야 한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와 육적인 감정들의 차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F.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기독교는 즐거운 것이고 흥미진진한 것이라고 우리자신의 삶에서 증명하는 것이다. 실제적 생활 상황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실의 낙담 등에 지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셨다는 위대한 진리를 비추기 위해서는 옛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마음의 순수함과 행동의 거룩함과 증거에의 권능을 주시기 위해 새로 되었다. 우리는 바울이 "더 훌륭한 방법"에 대해 말했던 것을 증명해야 하고 이런 방법으로 다른 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게 될 것이다.

출처 : 성경스터디
글쓴이 : 빛과소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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