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상식

[스크랩] 주일과 안식일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2. 21. 13:40

주일과 안식일이란

김재원

복음서와 안식일.

4복음서 내에서는 예수님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약간 있었지만 이러한 논쟁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안식일의 신학적인 진지한 논의는 시도된 적이 없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실 의무가 없으셨지만 덕을 세우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기꺼이 율법을 준수하셨다.

예를 들면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님을 향하여 시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그리고 성전세도 주님은 내지 않으실 수 있지만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토록 내시게 하셨다. 세례만해도 그렇다.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 하시고 세례를 받으셨다.

주님께서 무시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아니라 안식일에 지켜야한다고 만들어 첨가한 [할라카]였다. 오늘날도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해석하게 되면 성경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 다행이 오늘날 주석서들은 단지 해석적인 입장일뿐 이를 율법처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이 방대한 주석을 접하게 되면 성경보다 더 어렵게 느낄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의 안식일과 주일(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기록된 시기가 거의 같은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기독교와 유대교는 갈등을 충분히 겪어 오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안식일도 기억하고 있었고 [안식 후 첫날]도 공식적으로 지켜졌을 가능성이 있다. 언어라는 것은 그것이 관용구 처럼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이 관용구 처럼 쓰이고 있다. 이 말은 이미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의 언어에서 익숙해져 있던 말이다.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성도들이 정성으로 모운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드로아에서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바울은 안식일에 모임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임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던 모임이었다. 바울은 이튿날에 떠나고자 계획하고 있었고 다시는 드로아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지 강론을 오래하여 시간이 밤중이 되었는데도 강의 계속되고 있었다.이러한 모임이 안식 후 첫날 곧 제 8일, 오늘로 말하자면 주일에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제 8 일에 관하여

1.할례를 베푸는 날이었고

2.구약 시대로 말하자면 십계명을 받은 날이었다.

3.당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이며

4.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었으며

5.주님께서 승천하신 날이기도 했고

6.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었으며

7.초대교회로부터 세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은 날에 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등의 의식 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시던 밤에 특별한 식사를 하셨는데 그날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보다 하루 전이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저녁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가 요한의 다락에서 떡을 떼신 날은 13일 저녁이었고 그 날을 요일로 하면 목요일 저녁이었다.

언약이 새로워지면서 의식이나 일자도 유대교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신서의 주일(고전16: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벌써 매 주일 첫날 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傍證)하는 구절이다.

혹자들은 이 구절을 매 주일 첫날에 노동을 하여 그 이익을 연보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 구절이 매 주일 첫날에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라고 강변할 수는 없지만 매 주일 첫날에 떡을 떼는 습관은 매우 일찍부터 정착되었던 것으로 기록된 자료가 있다.

주일 아침에 일찍 모여서 기도하고 그리고 저녁에는 다시 공동식사(떡을 떼려고)로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침에 일찍 모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을 기억하여 모였을 것이고 저녁에 모인 것은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던 것을 기념하여 모였다.

(롬14 : 5-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이 문제로 인하여 약간의 마찰이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모든 곳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날은 저날 보다 낫게 여기고 혹 어떤 사람들은 모든 날이 다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날을 같이 여겼을 것이고 음식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나 아직도 유대교의 인습에 젖어서 그 습관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믿음 안에 있으면서도 안식일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아직 자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바울이 골로새에 편지를 쓸 때는 이미 이 문제가 거론이 되었고 안식일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안식일을 폐지하고 안식 후 첫날에만 모이는 사람들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어떤 교회에서는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이 주장하여 주일에 모이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말씀은 크리노 즉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안식일 등은 다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신약 성경에서 안식일이란 단어는 56절에 58회 정도 등장한다. 그 중에 단 한번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으로 기록된 없다.그나마 대개 복음서에서 사용되었고 사도행전에서 몇 번 사용되었는데 이 모든 경우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유하셨는지에 대하여 기록되었거나 안식일에 바울이 어떻게 선교하였는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마태복음 9회 마가복음 10회 누가복음 17회 요한복음 9회사도행전 9회 그리고 골로새서 1회 나타난다. 그러나 율법으로서의 안식일 제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율법은 세례요한의 때까지 한시적(限時的)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율법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이나 의미에 있어서 좋은 점은 그리스도 안에서도 본을 받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견해가 바울의 견해였다.율법으로부터 자유율법이나 계명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은 하나님과의 계약인데 이 계약은 우리 이방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체결(締結)된 계약이 아니라 모세 시대 시내산 아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었다. 그것은 돌에 새긴 율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에 얽매여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마귀들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왔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까지도 이제는 그 얽매였던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율법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어떤 율법이라도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또 살아 있는 날 동안만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다. 죽은 여인은 남편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다.죄에 대하여 죽은 자에게 죄가 상관할 것이 없는 것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에게는 율법적으로 다시는 요구할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유대인도 이러한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법이나 기타 다른 율법보다 더 우선적인 율법으로 중시되던 법이 있다면 그것은 할례(割禮)의 법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보다 할례의 법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도 사내 아이가 난지 8일이 되면 할례의 예식을 거행하였다.유대인들이 의식과 문자(儀文)로 된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는 입술과 의식은 행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그러한 법을 다 번폐(煩弊)스러워 하고 귀찮아하였다.

그 결국은 외식(外飾)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눈가림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척 했을 뿐 하나님을 마음으로는 섬기지 않았다.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가 무슨 저주를 받을까하여 그저 하나님의 엄한 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얽매여서 있는 것으로 여기고 할 수만 있으면 벗어나려고 했고 겉으로는 지키는 척 하고 외식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그 법을 싫어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세로 지키는 종교생활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었다.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야말로 하나님을 역겨웁게 하는 행위였다.아침마다 죄 없는 짐승만 잡아서 죽이는 것은 하나님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의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 신령(神靈)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마음(心靈)과 진리(眞理)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진리도 없이 마음도 없이 시간과 장소에 율법으로 매여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책망하시고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문제로 어려움이 야기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폐한다든지 무시하신 경우는 없었다.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무시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할라카]를 무시하신 것이지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폐하거나 무시하신 일은 없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하신 일도 없었다.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을 비롯하여 모든 신약 성경을 다 살펴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어떤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른 보기에는 이렇게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것이 곧 바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성경은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것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이 당연한 것이었다면 특별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사건이 의례적(儀禮的)일 일이 아니라 이례적(異例的)인 일이었기에 이를 기사화하고 있는 것이다.바울이 그날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날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더 듣고 싶어했고 따라서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들려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그리고 그들이 한 주간동안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다음 안식일이 이르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여 왔던 것이다.

바울은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이러한 반응을 경험한 후 이를 자기 규례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 규례로 삼은 것은 그 이전에는 그러한 자기 규례가 없었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경험한 이후에는 안식일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 규례로 삼은 것이다.그는 그 후로도 어디를 가든지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자기 규례를 삼은 이유는 구원의 은총이 언제나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에 이방인이라는 가기 복음의 신학에 입각한 자기 규례였다고 볼 수 있다.바울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는 거기 특별히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 없었던지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찾아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그리고 고린도에 이르러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여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기록은 바울이 율법에 의하여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사가 아니고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 일단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일단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 규례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서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을 양육하다가 핍박이 일어나면 믿는 사람들과 함께 거기를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다가 갈 때는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행동하지 않고 마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유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가 이렇게 유연한 자세를 취한 것은 아무쪼록 더 많은 형제를 얻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을 찾는 이유는 바울이 유대교의 신자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거기 가서 앉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만나기 가장 용이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날과 그 장소를 이용한 것 뿐이다. 이러한 바울의 의향을 모르고 단지 성경에 어떤 구절들만 보면 바울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사역을 한 것처럼 보인다.

안식교인들의 오해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골2:16) 바울이 안식일 문제를 가지고 기록한 곳은 오직 이곳 한 번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인즉 이러한 사소한 문제 즉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문제를 가지고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폄론이란 말은 "크리노"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 말은 그림자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었다. 이 말씀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7)?먹고 마시는 일들이나 여러 가지 씼는 일이나 절기와 월삭이나 할례나 안식일에 관한 지식은 장래일의 그림자에 속한 의식이었다.

안식교인들이 그림자에 속한 지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정죄하고 폄론하는 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이 말은 안식교도들을 정죄하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이 함부로 교회를 폄론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초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안식일 교리로부터 자유했던 장성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직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면서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시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을 이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아직까지 율법과 복음의 참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행위로 알았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안식교인들은 처음 시작부터 잘 못된 종말론을 주장하다가 급기야는 옛날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출처 :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글쓴이 : 예종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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