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스크랩] (13) 죄

작은샘 큰물줄기 2017. 12. 21. 11:07

(13)

 

기독교 신앙 체험하면 성령의 역사를 체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 우리가 죄를 체험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가 죄를 체험해보지 못하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는 죄가 없으니 죄 같은 것 체험이 있을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죄 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죄짓는 것을 우습게 생각 합니다.

죄는 지어도 회개만 하면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게 사해주시고 또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회개만 하면 일흔 번일곱 번까지 용서해주신다고 하시니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체험해야) 비로소 피 흘리기까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12:3)

[1] 자기 죄 인식

 

성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기독교의 속죄의 길을 알게 되어 한없는 위로와 감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태 신앙인 혹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다루다 보니 가장 큰 문제가 자기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죄 지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만 잘 보입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윤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죄는 인식이 안대고 남의 죄만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죄를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를 잘 아는데, 남이 할 때는 분명히 죄로 보이고 정죄를 하면서도 자기가 저지르면 죄로 보이지 않으니 이가 큰 문제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인식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자신이 추한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18:9)

인 바리세인들은 의로운 자가 아니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3-14)

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바리새인은 결코 의롭다하심(칭의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9-14)

 

아래 글은 제가 장로로 시무할 때의 간증 문입니다.

 

이번 주일에도 교회학교 중고등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학교 중고등부 부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부담을 갖고 지내다가 토요일이 되어서야 설교 제목을 잡았습니다.

본문은 : 누가복음 189- 14,

제목은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의 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자기가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하시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훨씬 더 의로워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은 죄인이면서도 자기가 죄인 인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성경 말씀은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3:10)

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의롭다고 철통같이 믿고 있으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가슴을 치고 회개하게 되고, 통회 자복하는 자는 깨끗함을 얻게 되니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당면 문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회개하게 되고 회개하면 의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나는 가슴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장로 너는 어느 쪽이냐?”

라는 음성이 마음속에서 들려 왔습니다. 대답은

나는 죄가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죄지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훤히 다 보이는데 내가 잘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마음속의 음성은

예장로 네가 바로 바리새인이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가슴이 탔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한 어제 밤까지만 해도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들로 하여금 겸손 하라는 뜻으로 준비했지 이 말씀이 나에게 선포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말씀이 나를 향해 도전해 왔습니다. 나는 설교를 마치고 나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갈등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 지은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해서 여태까지 주일날 결석해 본적이 없습니다. 십일조 헌금도 바쳤습니다. 교회 봉사에도 열심을 다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어서 실컷 죄를 짓다가 늙어서 믿을 것을……. 그렇다면 얼마나 회개할 것이 많을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 8)

라는 말씀을 보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는 지었으되 영안(靈眼)이 어두워 깨닫지를 못할 따름입니다.

나의 영안 열어 주시어 지은 죄를 생각나게 하시옵소서!”

그러자 한 가지 죄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 조사환 이라는 친구와 대판으로 싸운 일이 기억났습니다. 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죄가 생각났으니 이제는 바리새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몇 십 년 전의 죄를 생각해 내고 하나님 앞에 자백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 9)

나는 이 어릴 때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 눌러 붙어 있던 이 죄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제 나는 바리세인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날 학생회에서 설교를 시작했을 때 또 내 마음속에서 물음이 왔습니다.

예장로 너는 죄인이냐? 의인이냐?”

물론 나는 죄인입니다.”

네 죄가 무엇이냐?”

조사환과 싸운 죄인입니다.”

그것은 지난 주일에 다 자복한 것 아니냐? 이미 깨끗케 한 것을 가지고 재탕을 하려는 게냐? 나는 조사환과 싸운 죄는 이제 기억도 안 한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0; 17)

그렇다면 나는 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바리새인이다.”

그렇다면 회개하기 위하여 죄를 지어야 합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 1,2)

참으로 남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로마서 128- 32절을 읽다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도 죄가 없어 고민하든 내 눈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내 속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의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내가 이렇게도 구제 불능의 죄인이 이었단 말인가? 가히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21가지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21가지 죄는 우리가 죄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많아 문제이었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고 맹렬히 형제를 비방합니다. 심지어는 본인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한쪽 말만 듣고 비방합니다. 그리고도 자기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항상 자기는 옳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교만한 자도 사형을 면치 못합니다.

여기에는 자랑하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 윤리는 자기 자랑,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을 하면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랑하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셨습니다.

수군수군하는 자도 사형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듣지 않는 데서는 임금님의 흉도 본다. 라고 해서 듣지 않는데서 수군수군 하는 것은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시기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요. 배약(약속 어김)도 사형, 우매(알지 못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한자, 무정한자, 무자비한자도 여지없이 사형을 선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나는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죄가 없어 고민하든 예장노가 이렇게 여러 항목의 사형수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니 한 가지 죄만 보아도 이를 반복해서 계속 범하는 상습범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회개하고도 날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습범!!!

 

[2]회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 받는다.”는 개혁신학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잘 믿어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리 잘 믿어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하면 이는 비 진리 입니다.

 

우선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신앙생활을 잘해 온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면 즉시즉시 회개하고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주로 새벽 기도 시간에 회개를 합니다.

오늘 지은 죄는 내일 새벽에 회개하는데 오늘 밤에 죽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지은 죄는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있으면 아무리 잘 믿은 성도라도 구원받지 못할까요?

만약 이 사람이 구원 받는 다면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또 예수는 잘 믿는데 회개는 제대로 못한 사람, 회개는 하되 간혹 생각나면 하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가 있을까요?

 

답부터 먼저 말하면 이 모든 사람은 다 구원 받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만약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한 가지(한 가지나, 백 가지나)라도 있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구원론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구원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회개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회개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회개라는 용어의 정의를 바로 알면 해결이 됩니다.

 

신학적으로 회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회심(回心-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입니다.

이 회개(회심)는 일생에 한번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인생길을 가든 사람이 180도 뒤로 돌아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생활을 하던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회심은 믿음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즉 세상(, 권력, 명예......)을 향하여 살든 사람이믿음을 가지게 되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에게로 나오는 생의 전환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심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에게로 나오게 됩니다. 이를 회심이라고 합니다.

 

둘째: 참회(懺悔-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입니다.

성경에서는 자백(自白-요일1:9)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하나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일생에 한번이면 족합니다. 이 회심이라는 회개는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회개(회심)를 하지 아니하는 믿음은 참 믿음일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하고도 교회(하나님)에 나오지 않은 다면(회심 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여기에 말한 이 회개는 회심이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죄를 회개하는 자백(참회)은 죄를 지을 때 마다 해야 합니다.

이 회개는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성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면 기독교 구원론에 많은 혼선을 가져 옵니다.

이 두 가지 회개를 분간하여 확실한 구원론을 확립해야합니다.

 

근간에 철저한 회개 없이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성도들을 잘못 가르쳐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다 지옥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가려면 자기 교회에 와서 철저한 회개를 해야 구원 받는다고 협박을 해서 많은 성도들을 유혹해서 자기 교회로 등록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첫째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지 단 한 가지 죄라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 회개하지 아니한 죄로 인하여 지옥 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도들이 구원받기가 불가능 하게 됩니다.

 

이 들은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그 죄 값으로 모두 지옥 간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28절에서 32절에 21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중에 우리는 죄를 짓고도 무심결에 지나칠 수 있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결에 자랑하게 됩니다. 이 자랑이라는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데도 우리는 무심결에 죄를 짓고 그냥 지나치기가 일수입니다. 수군수군 하는 죄도 사형입니다. 부모 말씀을 거역하면 사형 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비방해도 사형 입니다. 배약하는 죄도 사형 입니다. 차가 밀려서 신간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배약)입니다. 우매한자도 사형에 해당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여 지식이 없는 자, 또는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자, 행동거지를 지혜롭게 못 하는 자 이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죄를 짓고도 죄인 줄도 모르고 설사 안다 하드라도 아무 죄의식 없이 그대로 지나치기 일 수입니다. 특히 교만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자기만 잘 믿고 다른 교인들은 다 지옥 간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이렇게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짓고도 우리는 지나치기가 일수입니다. 이 중 한 가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 많은 죄(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만 해도 613가지가 된다.)중 한 가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합니다. 특히 죄는 짓는 즉시 회개해야지 시간 날 때 조용히 회개하려다가 미처 회개하지 못하고 죽으면 여태까지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신앙생활 아무리 잘 했어도 회개하지 아니한 그 한 가지 죄 때문에 지옥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는 죄 회개는 제대로 해야지,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는 구원 받을 수가 없고 또 회개를 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지 회개하고도 또 죄를 지어면 그 것은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열매 없는 회개는 아무리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그 것은 회개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우리나라 교인 중 구원 받을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만약 그 말이 진리라면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명하고 있습니다. 누가 과연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만약 어떤 자가 나는 이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쪽방에서 독거하는 노인이 있는 한, 거리에 노숙자가 있는 한 누가 감이 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더욱이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직접 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는 죄인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렸노라.”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참회, 자백)하면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하고 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체험적으로)야 합니다. 이 무서운 죄의 삯인 사망에서 벗어날 길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비로소 지은 죄를 회개하고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복음을 제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출처 :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글쓴이 : 예종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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