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20:47
기독교를 일컬어 십자가의 도(道)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잔혹하고 무서운 사형 틀이 사람들의 사랑 받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본디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반란자나 도망노예를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형을 가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형벌이 너무나 굴욕적이고 잔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중간 중간에 뼛조각이 붙은 채찍으로 무참하게 맞았습니다. 죄수는 살점이 패이고 온 몸에 유혈로 낭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기진맥진해 진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의 가로 지르는 막대를 들쳐 메고서 처형장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군병들은 십자가 형틀을 땅바닥에 놓고는 죄수를 벌거벗겨 그 위에 눕히고 손목과 발목에 크고 날카로운 못을 박아서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세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손과 발로 온 몸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근육이 경직되어 고통스러웠을 뿐 아니라, 손목과 발목에 박힌 못이 피의 순환을 방해하여 심장과 폐에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뜨거운 햇빛 아래서 근육이 경직되고,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가운데서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적어도 열 시간 이상을 견뎠으며, 건강한 사람은 하루 이상을 견디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죄수를 빨리 죽게 만들려고 망치로 쳐서 죄수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처럼 잔혹한 사형 방법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잔혹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십자가의 도는 구원의 복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과 같이, 십자가의 도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워하여 배척하는가 하면, 심한 경우에는 십자가의 도를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나 오늘날이나 비슷합니다.


첫 번째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유대인이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거의 유대인이었고, 초창기의 전도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에 대한 유대인의 기여는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유대인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명기 21장에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2-23)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으라고 하였으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메시아에 대한 모독이요, 유대인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 대망해 온 메시아는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위대하고 뛰어난 인물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로 유대인들은 신명기 18장 15절 말씀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씀으로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영도자가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불가사의한 이적을 행하였으며, 율법을 전해 주었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했습니다. 그 모세가 장차 오실 메시아는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만약에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면 모세와 같이 이적을 베풀어서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민족을 해방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는커녕 로마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으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다음,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분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12-1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언약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무너진 다윗 왕조를 재건하시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법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바로 그 메시아라면 당연히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정치적인 야심을 보이신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는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곧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왕이 될 야망을 품으셨다면 백성들을 규합하기 위해 이러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 나라의 왕이 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절대로 유대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로마 당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을 메시아라고 전파하다니,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대망해 온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력과 다윗과 같은 권세를 가지고 출현해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킬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온 세계를 그 발아래 굴복시키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철저하게 유대 중심이요 현세적인 메시아 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이해했습니다.

사실인즉,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는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을 다 갖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이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첫째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구약시대에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전해 주었듯이, 신약시대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 곧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5-6)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므로 당연히 예수님이 모세보다 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란, 다윗이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듯이, 메시아 역시 다윗처럼 공의와 평강으로 다스리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 왕은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10편 4절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였는데, 이는 메시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수행하실 선지자직과 왕직과 제사장직은 하나씩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세 직분이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세 직분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이 같은 예언들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구세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아 관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고난당하는 메시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아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군왕처럼 자기의 야망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메시아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 죽음을 자취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실 것이며, 그 결과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영원히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메시아 관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고난 받으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그 뜻을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당연히 메시아를 유대 민족만을 위한 정치적인 메시아로 볼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구속주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사랑하는 민족으로서 이성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당국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유대인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지 적어도 철학을 하고 지혜를 탐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1절에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도 바울 당시의 헬라인들이 얼마나 지혜를 사랑하고 새로운 지식을 열렬히 추구하였나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한 헬라인들의 눈에 십자가의 도는 비이성적이고 어리석은 믿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철학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도는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탁월한 지혜와 지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기들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미래에 지상에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범죄와 악은 사회 환경이 나빠서 생긴 것이므로 제도와 경제 여건을 개선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은 본디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영원한 형벌을 받게끔 운명 지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십자가의 도가 통할 리 만무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람들의 죄를 씻기며 구원을 준다는 말이 너무나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형편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구세주를 영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대체로 공부를 많이 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냉담합니다.

그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구세주로 믿으라고 하다니, 그런 예수를 믿으려면 오히려 내 지혜와 내 능력을 믿겠다고, 내 재능을 믿고, 내 완력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인간적인 지혜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위해서만 시간과 정열과 돈을 들이지, 자기들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 미련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미련하고 지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잘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지혜가 없으니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며,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셔서 십자가의 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해 주십니다.

성경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씀과 같이,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모든 추한 죄를 흰눈같이 양털같이 깨끗하게 씻겨주시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며, 지옥 백성을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놀랍고 위대한 도리를 알리시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으시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미련한 방법인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는 전도의 말이 지혜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너무나 미련한 방법처럼 보일지 몰라도 초대교회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미련한 전도의 방법을 통해서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배척과 비웃음을 받을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우리의 말솜씨와 세련된 교양으로 예수를 전하면 꽤 효과가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완악한 마음이 녹아지고 깨어져서 주님을 영접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듣는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고, 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잔치에 오라는 초청장이 발부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이 초청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거절하고 있으며, 좁은 길로 들어서기보다는 넓고 편한 길로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의 길은 좁은 길일 수밖에 없고 구원받는 사람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에 전도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사용하는 전도 방법이 미련해 보이고 효과가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복음 전파의 유일한 방법이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렇게 간증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1-5)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나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박식한 랍비요,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자기의 지식과 지혜나 언변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하였더니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되었습니다. 완악한 자들이 회개하고, 귀신이 쫓겨나가며, 병든 자가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현대 과학기술과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했을지라도 인간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배척받고 무시당하는 것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이 구원의 진리를 불신 이웃에게 전하는 데 힘쓰시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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