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방언과 예언-1/고전14:1-19

작은샘 큰물줄기 2017. 7. 11. 18:28

앞에서는 사랑으로 행해지는 은사가 큰 은사임을 알아보았다. 모든 은사는 사랑으로 행해져야 한다. 바울은 은사가 사랑으로 행해지지 않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13장에서 사랑을 언급했던 것이다. 이어 14장 초두에서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1)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성령님의 조명(照明)을 받아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을 접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곧잘 성령님의 조명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성령님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곤 한다. 무엇을 생각해도 자신이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가는 것을 방해한다. 이미 자신들이 생각해 놓은 것에 하나님이 동의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에 관하여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기도의 태도를 보면 서서 손을 들고 하는 기도,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 술 취한 것처럼 보이는 기도, 금식하며 하는 기도, 가슴을 치며 하는 기도(눅 18:13), 엘리야처럼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하는 기도(왕상18:42) 등이 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울며 하는 기도, 소리 지르며 하는 기도, 또 요즘처럼 방언(혼자만 알 수 있는 말)으로 하는 기도 등이 있다. 꼭 방언이 아니더라도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소리를 크게 하든, 소리를 작게 하든, 아니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든 그것은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이런 기도의 종류들 중 어떤 것을 택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방편이 될 수 있다면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요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흔히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방언으로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언과 본문에 나와 있는 방언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본장에서 바울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공적 예배 시에 있었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 나오는 예언과 방언이란 공적 예배 시에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방언은 통역이 있어야 된다든지(5, 13, 27) 혹은 ‘가르친다’라고 표현한 것이라든지(19, 26), ‘온 교회가 함께 모여’(23)라는 표현이라든지, 또한 ‘차서를 따라서 하라’는 말씀(27) 등의 표현이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흔히 행해지는 방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에 통역이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차서를 따라 하라는 말씀은 지켜지고 있는가? 나아가 23절에서 바울은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혹시 사람들은 방언을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뭔가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나의 경우 그런 식으로 이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과 예언은 어느 누구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말들이 아니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

방언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방언은 개인의 신앙에 도움을 가져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은사로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이 그냥 인간을 감동시키시거나 인간에게 당신을 현시(顯示)하시기 위하여 은사라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도록 하셨는가?

그냥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음성과 함께 불을 내려 글씨를 써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하시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하늘에서 손이 내려와 공중에 글씨를 쓰셨다면 어떠했겠는가? 사람들이 더 감동을 받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도 당신을 더 잘 나타내실 수 있으셨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좀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방언을 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방언을 주셨다. 그리고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많아야 둘 또는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해야 했다(27). 게다가 또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통역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뭔가 좀 복잡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은사를 내려주실 바에는 그냥 방언을 하는 사람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셔서 바로 통역까지 하게 하시면 될 것 아니었겠는가? 그러면 시간 낭비도 줄일 수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우리의 상식으론 좀 화끈한 방법으로 하시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렇듯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방언이나 통역을 통하여 예배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직접 강림하셔서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지 못하게 하시고 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지상에 흩어버리셨다. 그 방법은 은 바로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흩어져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 때 비로소 각 나라 사람들의 방언으로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이 되며 그 이름만 지상에 남기를 원하셨다.

방언이라는 방법으로 계시를 주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통역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방언을 주신 것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방언을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셨다. 방언은 심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방언은 너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늘의 계시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어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음을 알게 하신 것이었다.

그런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통역이라는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그 통역을 통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풀어주셔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인간임을 알게 하신 것이었다. 이렇게 성령께서 직접 풀어주시고 이해하게 해 주실 때에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임을 알 수 있다(2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 받은 자들만이 비로소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 받은 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한하는 자들은 방언을 체험해보지 않았으면 방언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 말라는 분위기이다. 먼저 체험해 보라고 한다. 그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집중할 수 있고, 오래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란 단지 시간적으로 오래 하거나 깊은 기도의 맛을 들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한다. 누구나 기도를 해야 한다. 힘써서 기도하라. 우리의 기도에는 당연히 개인적인 바람이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바람과 하나님의 뜻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하되 그 결과까지 책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결과는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기도하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할 바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아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신다(롬 8:26).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우편에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34). 이런 사실을 알고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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