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가? 연말이 되면 TV 배우들이 상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하곤 한다. 운동 시합에서 이긴 기독교인 선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곤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일로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또 어떤 일로 작게 영광을 받으시는가?
죄성이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려고 한다. 세상에 우뚝 드러나고, 교회나 개인의 자존심을 세울만한 일들을 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라면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오늘날 과학자들 중에는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galaxy, 銀河)는 직경이 10만 광년이라고 주장한다. 즉 지구에서 보았을 때 별처럼 둘러싸여 있는 성군(星群)의 직경이 10만 광년이라는 것이다. 10만 광년이란 빛이 10만 년을 가야 하는 거리를 뜻한다. 그런데 그 10만 광년이라는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실제로 우리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가 약 1억 5천만 km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양에서 지구에 빛이 도달하는 시간은 8분 20여초가 된다. 그러면 우리가 이 거리를 차를 타고 달린다고 할 때 얼마 후면 도달할 수 있겠는가? 잠자지 않고, 쉬지도 않고 100km/h로 계속 달린다고 가정하면 171년 후에나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
도보로는 4,280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인간의 수명을 80세로 잡을 때 53.5번 태어나야 비로소 갈 수 있는 거리다. 이 거리가 빛이 8분 20여초 동안 오는 거리다. 그렇다면 빛이 1시간 간다면 그 거리는 얼마나 될 것인가? 1시간이 아니라 하루, 하루가 아니라 한 달, 한 달이 아니라 1년, 1년이 아니라 10년, 100년, 1,000년, 10,000년, 그리고 100,000년의 거리는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10만 광년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거리이다. 그런데 우주에는 지구가 포함되어 있는 은하뿐만 아니라 이보다 크고 작은 은하가 수천억 개가 있다고 하니 가히 그 크기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린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얼마나 큰 영광이 될 수 있겠는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크게 영광 돌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령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그룹의 회장 앞에서 채용 면접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신입사원은 만일 자기를 채용시켜 준다면 1,000만 원의 돈을 회장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 그 돈이 그룹 회장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그룹 회장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조 원의 재산가 앞에서 단지 1,000만원을 주겠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신입사원으로서의 마음가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 앞에서 크게 영광을 돌렸다고 결코 우쭐거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작디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성이 있는 인간은 자꾸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크게 드러나 보이지 는 않아도, 좋은 결과가 아니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아주 거창한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무슨 커다란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란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저 먹고 마시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일 뿐이다. 이처럼 바울이 말한 영광이란 상상 외로 아주 간단한 것이다.
TV 배우들처럼 연말 시상식에서 무슨 상을 받는 것만이 아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나가서 골을 넣거나 승리하는 것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래서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도 줄 수 없는 그런 시시한(?) 일들인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영광과 연관 지어 말씀한다.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번안(飜案)하면 이렇다. 어떤 불신자가 초청하여 그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불신자가 맛있는 삶은 고기가 있다며 가지고 나왔다. 그럴 경우 그게 무슨 고기인가 물어볼 필요가 없이 그냥 먹으면 된다. 왜냐하면 초청해준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만일 그 삶은 고기가 제사지낸 것인지 아닌지를 자꾸 확인하면, 자기를 초청해준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대접하고 싶어서 초청했는데 그 고기가 어떤 고기인가를 꼬치꼬치 따진다면 초청해준 그에게는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청해준 그 사람을 위해서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옆에서 ‘그 삶은 고기는 제사지낸 것이래요.’라고 말해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제사지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자의 양심을 위해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나온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먹느냐 안 먹느냐가 영광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내가 비록 먹을 수 있어도 이웃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다. 사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무토막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제단에 올려졌던 고기라 할지라도 이웃에 초청 받아 갔을 때는 묻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 이웃이 상처를 받게 될 경우에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큰 일을 했느냐 못했느냐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한 사람을 골라서 천국으로 부르시고, 작은 일을 한 사람은 부르시지 않으시는 게 아니다. 큰 일(?)을 한 바리새인들은 버림을 받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마음으로 행했는가를 보신다. 이렇듯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정신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을 지으려 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이웃에게 상처가 되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하여 행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개고기를 맛있게 먹으면 된다. 그런데 유럽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앞에 가서 자존심을 세운다며 일부러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고기를 자랑스럽게 먹는 것은 본문의 원리에서 볼 때 삼가야 한다.
아무리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이웃에게 상처가 된다면 하지 않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에 가서는 결코 개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보는 사람이 없거나, 개고기를 좋아하는 유럽 사람들이 있으면 얼마든지 같이 요리해서 먹으면 된다. 그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이웃 앞에서 끝까지 자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자유는 단지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웃을 위해서 절제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고 그렇게 절제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8)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계 18:7)
전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사치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았다. 사치는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유익이나 재미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라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사고이지 자유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생각은 하나님께는 전혀 영광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비록 거창한 듯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거창할 뿐이지 하나님에게는 일의 크고 작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에서 먹을 것이 있을 때 나이 많은 어른들부터 챙겨주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큰 것과 작은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시다. 큰 것이 곧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당한 형제가 있을 때 진실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주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다.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누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누구는 돌리지 못한다는 식의 생각은 없어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보장(保障)을 받고, 작게 영광을 돌린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이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그저 작지 작은 인간의 수준으로 하락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건강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다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손을 잡아 주는 것으로도 영광을 돌릴 수 있지 않은가? 이렇듯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학력의 유무나 모든 환경 조건에서도 가능하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이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32; 표준새번역)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다. 형제에게 함부로 대함으로 인해서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씀이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흉보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남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는 그 가운데서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언급했다. 오늘 우리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낮은 곳으로 오셨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과 교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 교제가 참된 교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 하나가 절제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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